1월 30일 오전 11시 스리랑카 최대도시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공항의 공항버스를 탔다. 한사람당 150스리랑카루피, 짐 하나에 50루피, 인당 200루피로 우리돈 1400원이다. 공항버스로 시내 터미널까지 30분가고 시내 버스로 다시 20여분을 가야 예약해둔 호텔까지 간다.
여긴 덥다, 내리자 바로 두꺼운 겨울옷을 벗었다. 그리고 마스크도 벗었다. 한국 인천공항이나 우리 중간 기착지 방콕공항사람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하고 있으나 이곳 스리랑카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마스크 쓴사람이 없다.
우린 3월 24일 마닐라 돌아갈 때까지 56일간 스리랑카와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몰디브 그리고 인도 남부를 도는 여행의 첫 이틀밤을 콜롬보의 남서쪽교외 밤발라피티야에서 보내기로 했다. 콜롬보가 스리랑카의 최대도시이긴 하지만 수도는 콜롬보 외곽도시 코테.
역사적으로 스리랑카 주민은 기원전 8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원주민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룩하였다. 이후 16세기에 들어와 유럽 열강의 침입을 받아 약 440년간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쳐 왔으며, 1948년 2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스리랑카는 남아시아 인도 남쪽에 위치한 섬나라다.
콜롬보시내 중심가의 베이라호수변 풍경
스리랑카는 인도계 왕조인 촐라왕조, 이를 물리친 폴론나루와 왕조 등이 수 세기간 번성하다 유럽 대항해시대의 영향으로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베이라호수변의 콜롬보 중심가 빌딩군
1948년 영국으로부터 자치령으로 지정받아 실질적 독립을 이룬 스리랑카는 1972년 국호를 스리랑카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
베이라호수변의 불교사원
스리랑카의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Sri Jayewardenepura Kotte), 줄여서 '코테'(Kotte)라 부른다. 스리랑카의 행정수도는 콜롬보(Colombo)이며 국토면적은 6만5610km², 인구는 약 2120만 명이다.
강가라마야 불교사원, 베이라 호수변에 있다.
오랜 기간 인도양의 아름다움을 지닌 천혜의 관광지로 유명했던 스리랑카는 길고 험했던 내전으로 기반시설이 많이 망가진 상태다. 1983년 7월 시작된 내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2009년 5월 18일 다수 싱할라족의 주축이 된 스리랑카 정부군이 소수 타밀족으로 구성된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반군 근거지를 점령하며 종식됐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패배해 물러난 타밀족은 특정 종교에 정체성을 뒀다고 규정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테러 공격의 배후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타밀족은 힌두교도들이 많은 집단이기는 했지만, 내전의 주원인은 종교가 아니라 차별 때문이었다.
1959년 당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가 싱할라어만을 공용어로 채택하고 싱할라족에 선택적 혜택을 부여한 것에 대해 타밀족이 자치권을 요구하며 내전의 씨앗이 피어났다.
또 타밀족은 주로 불교, 이슬람교도와 충돌을 일으켜왔다.
싱할리족은 대부분 불교도다.
콜롬보 시내의 이슬람 사원, 레드 모스크,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다. 기원전 3세기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에 들어온 불교 신도의 비율이 약 70%로 가장 높다. 이슬람9.7%, 힌두교13%, 기독교도들도 적지 않다
싱할라어와 타밀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며, 타밀어는 근대 이후 영국인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본격 유입된 인도의 타밀 지방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베이라호수변의 캡틴가든불교사원
그러나 타밀 사람들의 많은 수가 싱할라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 문제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영국 식민 시대의 영향으로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베이라호수변의 캡틴가든불교사원
인종은 싱할라인이 75%, 타밀인이 15%, 무슬림(스리랑카 무어) 10%를 차지한다. 인종 구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원래 스리랑카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은 싱할리족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인도에서 건너온 왕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인도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인도 남부에 살고 있던 타밀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어 스리랑카 민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이 타밀 사람들의 유입은 영국의 스리랑카 식민 지배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캔디인근의 고산지대가 홍차 재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인들이 인도의 타밀인들을 노동자로 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에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에 남았다.
첫댓글 좋은세상 줄겁게 생활하는 친구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