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道 旅行 人生 眞理 故鄕
-길
/박노해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 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 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을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잃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길
/윤동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정용철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출 때 지칩니다.
몸이 가는 길은 앞으로만 나 있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돌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젖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더 깨끗해집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합니다.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섭니다.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출 때 지칩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합니다.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섭니다
-길 가는 자의 노래
/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길 안내문
/성담(스님)
자기속에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의지하지 말고
바깥에서 구하지 말라.
오직 자신을 믿고 의지하라.
이 세상 어떤것도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생긴다.
이것은 진리이니
이 진리를 믿고 의지하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속에 보배가 있는 줄 모르고
바깥에서 찾는 사람이다.
자기 마음 밭에 생각의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싹이 나와 자라서
꽃피고 열매맺어
나도 먹고 남도 줄 수 있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자신이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 가르침을 믿어라.
이것이 길이리라.
-길 위에서
/이정하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하고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길 위의 거울
/고찬규
길을 걷다가
길인 줄도 모르다가
걷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헐떡이며 쉬다가
쉬다가 나는 저만치 있는
나를 보아버렸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벗어난 자 감옥에 갇히고
감옥을 벗어난 자 길에 갇힌다
기도해보지 않은 자 있는가
바람의 채찍에 생채기
나지 않은 자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길 잃은 날의 지혜
/박노해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은 작은 옮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시십시오
작은 것 속에서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길을 떠나다
/이애경
여행을 말할 때ᆢ
우리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에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ᆢ길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은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ᆢ지금 가던 길을 내려놓거나 지금 가고있던 길
을 떠나 잠시 안녕, 하는 것인지
도 모른다
내게 익숙한 그 길과 다시
돌아왔을 때ᆢ변한 건 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익숙한 길을 걷다 멈출 줄
아는용기ᆢ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
그것이 여행이 길을 떠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
/백무산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이상 측량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를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어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길은 가면 뒤에 있다
/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지평선)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경)도 없다.
經(경)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자기야.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길이 끝나면
/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