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머리

동아시아의 전통적 헤어스타일의 하나. 보통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른 뒤 꾸민다. 조선의 상투와 비슷하게 묶는 것 자체는 한반도에 꽤 이전부터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상투가 가지는 의미는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유교적 예절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영어로 Topknot hairstyle로 번역하며, 한국의 상투는 한국식 어휘를 알파벳으로 음차하여 Sangtu로 표기하기도 한다. 다만 해외에서는 흔히 Topknot이라고 하면 아시아의 헤어스타일로 생각하며 주로 일본의 촌마게를 먼저 떠올리며, 따라서 조선의 Sangtu를 촌마게와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다.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상투를 가리는 용도의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상투에서 망건은 이마 가리개가 아니라 머리를 쓸어올려 묶인 머리를 고정하는 일종의 헤어밴드 용도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극에서 망건 앞싸게 부분(통풍구)에 살갗(이마)이 보이는 모습은 잘못된 착용의 예 이다. 구한말에도 눈썹바로위에 망건을 쓴 사진이 있지만 이건 머리숱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망건이 많이 내려온 것이므로 오해하지말자.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다고.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 부른다. 뭐 그냥 한동네 살면서 다 이런 사정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안 통했으며, 보부상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경우 얕보이지 않기 위해 했다고 한다. 또한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투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상투에 관을 썼으면 그것은 임금이거나 왕족, 외척 등 엄청 귀한 신분을 상징했다. 한국 사극에서는 임금이 아닌 자가 상투에 관을 쓴 것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여인천하의 윤원형(이덕화), 조선왕조오백년 인현왕후의 동평군 항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영의정도 상투는 그냥 틀었고 임금이나 세자, 왕족, 외척 정도 되어야만 상투에 관을 썼다. 왕이 아닌 인물 중에서 상투에 관을 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윤원형, 장희재 등이다.
머리가 꽤 많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대머리도 상투를 틀 수 있는가?'란 문제로 현대인 사이에서 왈가왈부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도 사람 살던 시대이니만큼 조선시대에도 대머리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 일단 대머리라도 대부분 주변머리는 있기 때문에 위 초상화의 윤증처럼 주변머리를 머리 모아올려 상투를 틀었다. 얼핏보면 무슨 일본의 촌마게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빠진 머리를 잘 모아두었다가 남아있는 머리와 묶어서 상투를 트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웹툰 호랭총각에서는 무려 임금이 대머리로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상투에 대해 찾으면, '성 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로 한다.'는 옛말이 주야장천 언급된다. 풀버전은 '오(吳)나라 임금이 칼쓰기를 좋아하자 백성은 칼에 상한 흔적이 많아졌고, 초(楚)나라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 죽는 여자가 많았으며,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상투 높이가 한 자가 되었고, 성안에서 큰 소매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소매를 온필[全匹]로 하였다.'인 듯 하다. 성종실록 197권, 성종 17년 11월 19일 경신 네 번째기사
사실 일생동안 기른 머리카락의 양은 엄청나서 미관까지 고려한 예쁜 크기의 상투를 트는 것이 힘들다. 실제로 상투를 틀 때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구한말 상투 튼 사진을 보면 간혹 삐져나온 뒷머리가 짧은 건 이 때문이다. 상투 틀 정도만 남기고 자르는 것. 이렇게 자른 머리는 소중히 남겨두었다가 가발을 만들거나 조상 신위 앞에 바쳤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상투 자체가 컸다. 고분벽화를 보면 고대에는 상투 크기가 컸던 경우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은 상투를 하나만 틀었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편견과 달리 머리숱이 많으면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 대부분 젊을 때 머리숱이 과하게 풍성하면 쌍상투를 틀었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면 일반 상투를 틀었다. 즉, 또한 누구나 배코를 친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쌍상투가 흔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달걀만한 상투가 미의 기준이었기에 머리를 자르거나 길러서 크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덥고 불편하다 여긴 이들은 ‘백호(혹은 '배코')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작게는 동전 크기만큼, 크게는 손바닥의 반 크기 만큼 자르고서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가운뎃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 통풍이 되도록 하고, 남은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트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머리와 같이 머리카락을 밀지는 않았는데, 손바닥 반 정도만 조금 밀어 민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즉 상투를 풀면 마치 거란족을 연상시키는 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 행위는 사사롭게는 행해졌으나 유교 원칙이나 미관 상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트는데, 여기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까지 밀면 상투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투는 애초에 머리 길이를 정리하고 틀어올리는 형식이였으며 배코 치는 것은 꺼려지는 행위였다. 배코를 치더라도 동전에서 손바닥 반 만한 크기를 숱 치는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실톡에 그려진 것처럼 빡빡이는 아니였다.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20일 무술 두 번째기사를 보면 표류해 온 다른 나라 사람들의 특징으로, 상투 하나를 틀고 비녀를 두 개 꽂았으며, 상투 아래의 머리를 깎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구한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땐 유생들이 중심으로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하여 머리 깎는 걸 반대했는데, 이는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길 가다 관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투를 잘라버리면 백호친 선비는 소갈머리가 드러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정확히는 배코를 치면 가뜩이나 안좋게 보는데, 그나마 상투로 숨기던 게 아예 드러난다는 게 반발사유 중 하나였다. 당시 상황 기록을 봐도 강제 시행된 단발령 때문에 더벅머리가 되거나 속알머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적혀져 있다.
체면을 중시하던 유학자들이 이런 망신을 당하니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정책을 시행하던 배경에 외세와 개화파가 있었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했고, 결국 척양척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1900년에 시행한 2차 단발령 때는 강제 시행이 아니었기에 처음보다 반발이 적었다. 물론 유림 자체에서 박은식을 비롯한 신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래 문물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1930년대까지 상투를 고수하는 이들도 많았다.
현재
이렇게 일제시절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강하게 상투를 고집하였으나,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설립된 이래로 급속한 외부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6.25 전쟁 같은 거대한 사회구조 변화를 거치면서 전통 보존 의식이 많이 희박해진데다가, 점차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풍토가 늘면서 관리가 힘든 상투는 '비경제적',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점차 대중들 사이에서 밀려나 21세기 한반도에서 상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아주 드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학동을 비롯한 지역 거주자 및 방송에서도 나온 어느 남성은 지금도 상투를 하여 지방에서 거주 중인데 상투를 지키고자 모자나 모터바이크 헬멧까지도 상투가 나올 구멍을 하고 다닌다고 나온 바 있다.
상투는 변발류와는 달리 분장시 머리를 밀 필요가 전혀 없는지라 상투 가발과 망건으로 충분한 데 비해 청나라 사극을 찍는 중국 배우나 일본 시대극 배우들은 '변발'이나 '촌마게'를 위해 대머리 가발을 쓰거나 경우에 따라 정말 앞머리를 밀던지, 아니면 아예 스킨헤드를 해야만 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변발'이나 '촌마게' 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질감과 거부감이 좀 덜 한듯하다. 뭐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투도 경우에 따라 머리를 아주 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민 부분이 대놓고 보이는 변발이나 촌마게보단 낫다. 게다가 실제로는 정말 머리를 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조연들은 그런대로 상투를 제대로 틀고 있지만, 주인공은 장발에 봉두난발이다. 조선시대 봉두난발은 천민들이나 하고 다니는 머리스타일이었고, 더욱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생머리는 그런 거 없다. 혼인을 안하면 상투를 틀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정작 미혼 남성이 트는 총각머리나 떠꺼머리는 그거 먹는 건가요 취급.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상투에 장발이라는 해괴한 스타일도 나온다. 이런 건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 쌍상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원래 쌍상투는 미혼 남성의 머리였다. 총각이라는 말 자체가 어린 아이가 머리를 두 개의 뿔처럼 만든 것이다. '총각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것이 점차 미혼 남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것. 즉, 조선이든 고려든 쌍상투가 흔해야 고증에 맞다. 다만 이러한 쌍상투는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고, '총각'이란 말 자체도 중국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에 그리 쌍상투가 많지는 않았다. 풍속도 등을 봐도 대부분 상투는 하나 뿐이다.
삼국시대의 상투는 크기가 크다. 하지만 양직공도를 보면 무조건 상투를 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양직공도 속 삼국의 사신. 이들 중 신라 사신이 머리를 반만 풀어헤쳐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또한 구한말의 선비들은 '일본은 서양을 따라해 단발이고 중원도 변발이라 호풍이니 선왕의 유풍(儒風)을 간직한 것은 이제 온 세계에서 조선뿐.' 이라며 소중히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