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1일 (금)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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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역사관이다. 역사관 로비에 두 대의 차가 전시되어 있는데 코로나와 크라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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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 높이 160cm. 길이 410cm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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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인천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새나라 자동차에서 시작된다.
정부 정책에 따라 1962년 부평에 설립된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 닛산과 제휴해서 블루버드 자동차를 들여와
조립, 생산했다. 1963년 말 우리나라의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자 자동차 부품을 수입할 외화가 부족해지면서
신진공업사에 인수되었다.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공업사는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고, 부평공장(현 한국GM부평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생산된 대표적인 차량이 일본 토요다와 기술 제휴를 통해 제작된 코로나와 크라운이다.
1966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코로나는 각 진 차체가 특징인 소형차였다.
자동차 한 대당 가격은 83만 7,000원으로 당시 60원이었던 택시 기본요금과 비교하였을 때 매우 비쌌다.
그렇지만 출시되자마자 상류층의 승용차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 영업용 택시로 거리를 누볐다.
비록 소형차였지만 히터, 라디오, 시가라이터 등을 갖추어 "승용차의 대명사"라고 불렸으며 디자인이 예쁘고
우리나라 도로사정에 꼭 알맞다는 평이 나왔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44,248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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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 / 높이 170cm. 길이 493 cm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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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은 토요타가 자체 개발한 첫 번째 모델로도 유명한 중형차로서 국내에는 1967년 처음 등장했다.
신진자동차는 1967년 5월부터 크라운 생산을 시작하여 한 대당 150만원의 가격을 책정했다.
크라운은 소형차였던 코로나에 비해 크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재를 불러 모았으며,
출시 이후 상류층들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여기에 경찰 순찰차로 사용된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최초의 국산 고급차로 수량이 많지 않았고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모두 3,840대의 차량이 생산되었다.
글. 박민주(인천도시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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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역사관 1층에 있는 근대도시관이다.
이 곳엔 1883년부터 1945년까지 근대기 인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란 비석이 있다.
"바다의 입구를 막고 지킬 것이니 다른 나라의 선박은 함부로 통과하지 말지어다"라는 쇄국의지를 담은
경고문이다. 이와 같은 비석은 강화도 덕진돈대에도 있다.
19세기 중엽 무력으로 중국과 일본을 개항시킨 서구 열강의 시선이 조선으로 향하자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서구 열강과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무력 침공에도 개방을 허용치 않았던 조선은 강화도를 불법 침략한 일본 군함
운요호와의 충돌이 계기가 되어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부산을 포함한 3개 항구를
개항하기에 이른다.
그 중 서울의 초입에 위치했던 인천의 개항을 두고 조선 정부와 일본은 치열한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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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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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박문보통학교 제12회 졸업기념 / 1922년.(사진 속 인물들 중 살아계신 분은 없다)
*클릭해서 크게 보면 단정한 모습의 학생들의 모습이 지금과 별로 다름없어 보인다. 뜬 구름같은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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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의 한쪽면의 화상지계 반대쪽면은 조선지계라고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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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춘 간판 / 1910년 대.
공화춘은 산동성 출신의 화상 우희광이 선린동에 문을 연 중화요리집이다.
1900년대 초 인천으로 이주한 우희광은 처음 숙식업소인 산동회관을 개업하였으나
1913년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인 공화춘(共和春)으로 개명하였다.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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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조계(日本租界)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제물포에 공사관 직원을 파견하여 조계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1882년 7월 부두에서 가까우면서도 매립이 가능한 해안 지대 약 7천 평을 자국의 조계지로 정하고 측량을
통해 도로와 영사관 부지를 구획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정부는 1883년 9월 일본과
<조선국인천구조계약조,朝鮮國仁川口租界約條>를 체결하고 인천에서 일본조계 설치를 공식 승인했다.
일본조계에는 우편국, 경찰서 등 관공서와 함께 일본 상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은행, 사찰, 학교 등도
들어섰다. 청일전쟁 후 인천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조계 너머 조선 땅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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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조계석 /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4호 / 1884년 이후
조계석은 각나라 조계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길가에 세웠던 표지석이다.
이 조계석은 각국조계와 조선땅의 경계였던 내동 성공회 입구에 서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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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엘 회사의 염료통 /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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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표석유 상자 / 근대.
스텐다드 석유회사의 철제 석유통을 담던 나무상자이다. 1897년 미국의 타운센트 상회는 인천 월미도에
석유 저장소를 설치하고, 미국 스텐다드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 판매권을 획득하였다.
스텐다드 석유는 솔표, 승리표라는 상표를 붙이고 조선에서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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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발행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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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다 가족묘 비석 / 화강석 / 31.5 * 31 * 70cm / 1935년.
나가사키 출신으로 인천에서 일본식 여관을 설립한 하라다 긴타로의 가족묘를 알려주는 비석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1880년 하라다가 조선에 입국했던 사실과 본인 및 가족의 생몰연도가 새겨져있다.
하라다 긴타로는 개항 초기 인천에 정착한 인물로, 일본영사관 인근에 거주하며 하라킨여관(原金旅館)을
운영하였다. 한편 그 후손들은 사동에서 하라다운송점(原田運送店)을 경영했던 인천의 부호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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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거리 재현 미니어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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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우체국.
1884년 조선 정부는 우편제도의 도입을 위해 우정총국을 설립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업무가 중단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한성과 인천을 오가는 우편업무가 재개되면서 인천에도 우체사를 설치하였다.
1898년부터 우편업무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였고, 인천우체사를 일본영사관 인근의
인천우편국으로 통합하였다. 인천우편국은 192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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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인천지점.
조선은행은 1878년 부산에 설립된 일본 국립 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인천의 관세취급권을 장악하고 일본 상인들의 이권을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1888년에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하고 서울의 출장소를 두었다. 제1은행의 통상적인 은행업무
외에도 관세, 조선금궤 및 사금의 매입, 은행권 발행 등의 업무까지 대행하며 실질적인 중앙은행의 기능을
하다가 1909년 통감부에서 설치한 한국은행으로 흡수되었다.
1911년 총독부에서 조선은행법을 제정하면서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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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풍 건물(擬洋風 建物)
의양풍 건물은 서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목조 건물로 외벽은 목조비늘판으로 마감하고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를 올려놓았다. 의양풍은 일본에서 187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 영향으로1900년대 초까지 인천 일본조계에 위치한 관청, 상점, 가옥 등의 건물에 활용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의양풍 건물로 인천측후소, 인천경찰서, 인천우편국, 인천유치원, 조선신보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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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
수순을 밟게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 용도로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는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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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센(일제강점기 때의 인천)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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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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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탑(Siren Tower)
1907년 화재 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한 소방용 망루와 사이렌탑이다.
1906년 2월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대포가 각국공원에 설치됐다. 매일 정오에 포를 쏘았다 하여
오포(午砲)라 했는데 1931년부터는 소방용 망루에 설치되었던 사이렌으로 대체되었다.
전시체제로 돌입한 1940년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사이렌 소리에 맞춰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고,
정오에는 묵도와 신사참배를 해야만 했다.
사이렌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 통제를 위해 사용된 억압과 구속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