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 바깥온도는 영하 20도를 가까이 하는 날씨에 작은 담요 한 장에 시린 코를 묻고 혹한을 견딘다.
아기 강아지 때 부터 방생의 생활을 한터라 어느 한 곳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이 견생의 전부가 되어 더 이상 편안하고 따스한 집안 생활에 적응하긴 힘들 것 같다.
출퇴근 길 주변 여학교와 학생들이 통행이 많은 터라 길 섶에 쪼그리고 앉아 귀여움을 많이 받던 꼬맹이 강아지 시절을 잊지 않아 아직도 지나는 학생들의 관심과 애정의 쓰다듬이 나이 든 까미에겐 행복한 관종의 기쁨인 듯 하다.
간혹 집도 없이 건물 앞 양지뜰 담요 한 장 위에 앉아있는 까미를 보고 동물 학대 한다고 충고를 하시는 분들을 볼때면 마음이 불편해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배부르고 따뜻한 구속보다는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생활이 좋아 안락한 실내의 생활도 거부하고 차가운 바닥에 행복을 비비는 우리 까미를 보면 누군가에 편리함의 생각이 누구에겐 불편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 만의 프리덤이 이해할 수 없는 까미의 행복일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된다.
언제부터인지 강아지는 사람들의 집안에서 사는 반려의 식구가 돼어 버렸고 이제는 사람들의 상전이 되어 아기 유모차에 썬글래스를 걸치고 꽃무늬 옷을 입은 강아지가 사람의 흉내를 내며 거리를 타고 다니는 씁쓸한 현실이 개탄스럽지만 시대의 트랜드에 더불어 살아감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런지...
내 어릴적에 키우던 강아지를 귀여워 방안에 들였다가 어른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참으로 짧은 시간 강아지들에 격세지감의 신분상승을 느낀다.
정. 따뜻한 마음하나로 살아왔던 우리네 과거시절의 인정에 반하여 각박하게 변해가는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식어가는 인간애를 대체할 그 무언가를 우리는 간절히 원하고 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수 많은 경쟁과 다툼속에서 이겨내고 승리해야 하는 작금의 일상속은 나에게만 순종적인 매개물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대상이 작고 나에게만 한없이 예쁜 반려 동물인 것 같다고 생각된다.
좋은일이다. 늘어나는 초 핵가족화 시대에 애완동물의 격을 넘어선 반려동물 들과의 애정의 교감으로 결핍된 우리의 외로운 메마른 정서를 채울 수 있다면 반려동물과 우리모두에게 윈윈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빠르게 변모하는 시대의 트랜드에 우리는 현실에 머물기에도 힘겨운 세상이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세상에서 지금의 반려동물은 어쩌면 시대의 애물단지로 변모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동물들은 생물이기에 언젠가는 병들고 죽기 마련이므로 어릴적 귀엽고 사랑스러움은 자연히 불편함과 귀차니즘이 되고 아픈 부모의 봉양도 요양원에 맡길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늙고 쇠약한 반려동물의 케어는 쉽지 않은 버거운 동행이 될 것이다.
할머니와 로봇이라는 말레시아 나라에 무언의 애니메이션에서 멀지 않은 우리에 미래를 보았다. AI 에 급격한 발전과 멀어지는 인간애의 사이에 AI 로봇 반려강아지 루나의 현실은 섬뜻 변모하는 시대에 핸펀보다 가까운 로봇 집사를 우리는 접할 것 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문제는 다가올 미지의 현실이다. 그런 닥크 페이트 같은 미래의 세상에서 잃어버린 반려동물에 본능은 그들의 생존에 가장 아픈 리스크가 될 것 이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만든 미래는 사람들에 의존적 생활이 잃어버린 그들의 생존적 본능으로 그들을 얼어 죽고 배고파 죽게 만들 것이고 길거리 로드킬에 멈추지 않은 숨결을 아랑곳 없이 외면한 채 시대의 애물단지가 되어 가는 미래의 현실이 그들의 검은 눈망울에 맺혀 보인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쉽사리 정을 주고 또한 무심히 거두어 버리는 우리네 각박한 정서들 사이에 그들이 희생물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선택한 세상, 우리가 지켜야 할 세상, 그렇게 함께 지키고 공유할 수 있는 복합적인 유토피아의 시공간을 그리고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