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상대하는 나라에 따라 재미있는 멘트를 날렸다. 일본과 경기할 때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를, 네덜란드와 맞붙을 때는 "오렌지가 터졌어요"라고 했고, 독일을 상대하면 "전차가 녹슬었네요"라고 했다. 이탈리아를 만나면 "빗장이 낡았습니다"라고 했다. 잉글랜드 유니폼을 보고 "푸른 잔디 위에 유니폼이 마치 뽕잎을 따먹는 누에 같죠"라고도 했다.
민망하거나 난감한 상황을 재미있게 빠져나가기도 했다. 폴란드전 때 이을용이 중요 부위를 가격 당하자 "큰일이에요. 이을용 선수, 아직 애가 없어요"라거나, 차두리가 정작 골은 못 넣자 "안방 문을 젖히고 들어갔는데 결국 장롱까지는 가지를 못했어요"라고 했다. 일본인 주심이 제대로 판정하지 못한다며 "안경을 사줘야겠어요" 하거나 안정환에게 페널티 킥을 선언하지 않는 주심을 겨냥해 "카드를 안 가져온 거 아닙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이렇게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스포츠 팬들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1990∼2000년대 최고의 축구 중계 캐스터로 활약한 송재익 씨가 82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해 4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18일 오전 영면에 들었다.
1970년 MBC 아나운서 공채 4기로 입사해 마이크를 잡은 고인은 축구, 복싱 등 스포츠 중계 캐스터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중계 마이크를 잡아 축구 팬들에게 낯익다. 또랑또랑한 그의 목소리 톤은 쉽게 잊을 수가 없고, "고오오오오올"이라고 길게 내뱉는 그의 세리머니는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미드필더 이민성이 역전 결승골을 뽑아내자 고인이 외친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멘트는 지금도 많은 축구팬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또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한국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현장에서 안방으로 중계하는 데도 그의 목소리가 함께 했다.
고인은 SBS로 옮겨 10년 동안 근무하다 2009년 캐스터 활동을 중단했다가 일흔여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인 2019년 프로축구 K리그2(2부) 현장으로 복귀해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11월 서울이랜드와 전남 드래곤즈의 K리그 중계를 끝으로 마이크를 놓은 뒤 가족과 시간을 보내왔다.
tvN의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의 그해 마지막 방송 '시작과 끝' 특집에 나와 “내가 소리를 지르면 나라가 시끄러웠다. 축구를 하면 골골골, 복싱을 하면 다운, 다운”이라면서 길거리는 물론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과거를 떠올렸다.
늘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신문선 해설위원과의 '케미'로도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다만 축구 경기의 전력이나 전략, 전술보다 감성적인 멘트, 자극적인 멘트를 남발한다는 비판도 들어왔다. 하지만 어렵고 딱딱해질 수 있는 축구 분석보다 쉽게 체화할 수 있는 멘트로 축구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는 반론도 만만찮았다.
빈소는 이대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21일,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