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이수익 詩 그리운 악마
■대중교통, 특히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아침, 어떤 장소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것처럼 자주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쯤 있었을 것이다.
인사 한 마디 나눌 수 있는 빌미가 없어서 그냥 어떤 장소의 낯익은 얼굴 하나쯤으로 한동안 기억되다가
잊혀지는 가벼운 인연이겠지만.
9시30분까지 출근해야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일용직 일을 하면서 나는 매일 집 근처 목포경찰서 삼거리를
9시10분경에 들어오는 7번 시내버스를 시간 맞추어 타고 출근했다.
시내버스라는 게 기차처럼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늘 10분쯤 여유를 두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시간에 오지않는 버스를 초조히 기다리면서 우연히 건너편 정류장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어떤 여자가 혼자서 버스가 오는 방향만 바라보며 나처럼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동지... 혹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버스가 올 때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날 처음.
다음 날 나는 여전히 그 시간에 버스정류장에 나가 내가 타야할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건너 편
정류장을 바라보았는데 어제 그녀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어쩌다 그곳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불특정인이 아니라 항상 그 시간대에 버스를 타는 직장인이었다는 것을
그 후로 그녀가 그 시간대에 그곳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매일 출근길 건너 편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나에겐 슬슬 사소한 즐거움이 되고
신기루같은 것이겠지만 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누구를 기다려 본다는 것. 마음 졸이며 애태우는 일이겠지만 그런 것 하나 없이 밋밋하게 사는 삶은 또 얼마나
삭막하는 것인지....
그렇게라도 나는 아무것이나, 어떤 목적도 없이 또 기다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을 건너 편 정류장 그녀에게 눈길을 주다보니 에감이랄까? 그녀도 건너편의 나를 의식한 탓인지
자주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곤 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인사말을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즐거운 직장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이곳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그렇게 내 나름대로 즐거운 나날을 보낸 오늘
선관위 일용직(알바) 마지막 날이다.
오늘 출근 길에도 어김없이 건너 편의 그녀를 만났고 그녀 또한 건너 편의 내 쪽으로 몇 번의 눈길을 보내 왔다.
잠시 후 내가 타야 할 7번 시내버스가 먼저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부터 더 이상 이곳에서 저를 뵐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일용직은 오늘로 끝났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당신을 기다림으로 그 동안 출근 길이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내일도 아침 9시10분,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2번 시내버스를 탄다.
윤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