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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비상조치 해제 (199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1990년 오늘 남아공정부는
4년에 걸친 비상조치를 해제했다.
남아공 정부가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인종차별정책
완화방침을 밝힌지 석 달 만이다.
흑인 폭동 주동 혐의로 종신
형을 선고 받고 28년 동안 복역한
만넬라의 석방은 흑백갈등 종식을
위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이후 만넬라는 남아공 곳곳을 누비며
아파르트헤이트의 완전 철폐를
주장한다.
4년후 실시된 남아공의 대통령 선거!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
령으로 선출된다.
▶2015년 영국 원로 여배우 헬렌 미렌,
토니상 여우주연상 수상
▶2015년 축구 국가대표 11년
정용환 별세
▶2015년 ‘반지의 제왕’
크리스토퍼 리, 93세로 별세
영국의 유명 배우 크리스토퍼 리가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사인은 호흡기 질환 및 심부전으로 전해졌다. 그의 임종은 가족들이 지켰으며 사망 소식을 가족들에게 먼저 알리고 싶었던 아내의 바람에 의해 며칠 후에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 백작, 스타워즈의 두쿠 백작,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 역을 맡은 영국의 배우로, 지난 7일 오전(현지시각) 런던의 첼시 웨스트민스터 병원에서 호흡곤란과 심부전으로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키가 195센티미터에 달해 ‘키가 가장 큰 주연’이란 별명을 가진 크리스토퍼 리는 1958년 영화 ‘드라큘라’에서 명연기를 펼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으며, 여섯 편의 드라큘라 속편과, 해리 앨런 타워스가 제작한 ‘드라큘라가 깨어나는 밤(1970)’에서 드라큘라로 계속 등장했다.
크리스토퍼 리는 20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최근에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두쿠 백작 역을, ‘반지의 제왕’ 삼부작에서는 ‘백색 마법사 사루만’ 역을 맡았다.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제작진과 출연진 중 영국 판타지 소설가 J R R 톨킨을 직접 만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2015년 멕시코 축구 영웅 블랑코,
쿠에르나바카 시장 당선
▶2010년 미국의 애플이WWDC(개발
자회의)를 개최하고 그 곳에서 아이폰
4G를 출시할 예정. (스티브 잡스가 PT)
▶2009년 대한민국, 월드컵 7회 연속본선진출. 한국팀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에서 열린 아랍에미리트와의 원정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세계에서 6번째로7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나라가 되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2009년 6월 7일 새벽(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박주영, 기성용의 릴레이골로 2-0 완승하며 4승 2무 승점 14점을 기록,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또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을 시작으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7회 연속 지구촌 최대 축구잔치에 초대된 것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대회 때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이후 다시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 것은 1986년 멕시코 대회 때다. 이후 한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개근상’을 받았다.
한국의 뒤를 잇는 국가는 7일 현재 사우디아라비아(1994-2006년 4회 연속.총 4회)와 일본(1998-2010년 4회 연속.총 4회) 정도다.
▶2008년 스위스에서
유로2008 대회가 개막함.
▶2006년 정남규가 구속기소됐다.
▶2005년 금강산 관광객
1998년 관광 개시 이후 100만명 돌파
지난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이 7일로 관광객 100만 명을 넘어섰다. 현대아산은 “관광객 1369명이 7일 육로로 방북, 관광이 시작된 지 6년 6개월 20일 만에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7일 밝혔다.
금강산 관광객은 관광이 처음 시작된 1998년 1만 554명에서 1999년 14만 8074명, 2000년 21만 3009명, 2001년 5만 7879명, 2002년 8만 4727명, 2003년 7만 4334명, 2004년 26만 8420명으로 지난 연말까지 총 85만 6997명에 달했다.
해로를 통해서는 55만 7681명이, 또 2003년 9월 본격화된 육로로는 44만 3905명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2002년 중국-러시아, 중앙아4국
"상하이 그룹" 국제 안보기구로
공식 출범.
▶2001년 대한민국의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
▶2001년 메넴 아르헨티나 전대통령
무기밀매 법정구속.
▶2001년 경기도 말라리아 비상…
파주등 환자 9명 늘어
▶2000년 미국 연방지법, 마이크로소프트사(MS)를
두개로 분할하라고 판결
빌 케이츠(오른쪽)와 제프 레이크스가
기업분할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계최대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소프트웨어 분야를 각각 담당하는 2개 회사로 분할하라는 미국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 연방지법은 2000년 6월 7일 오후 반독점법을 위반한 MS에 대해 컴퓨터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2개 회사로 분할하도록 명령했다.
토머스 펜필드 잭슨 판사는 미 법무부 및 17개 주정부가 MS사의 향후 독점행위 방지를 위한 시정조치로 제안한 분사안을 받아들여 이같이 판결했다. MS는 같은 해 4월 OS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 기본 프로그램인 윈도에 인터넷 실행용 소프트웨어 익스플로러를 끼워팔아 넷스케이프 등 경쟁사를 배제하는 등 부당경쟁을 해왔다는 판결을 받았다. 잭슨 판사는 4개월 이내에 회사 분할 계획을 제출하고 1년 내 분할을 완료하도록 명령했지만, 빌 게이츠 회장은 이날 판결에 대해 즉각 항소했다.
이후 2001년 6월 28일 항소법원에서는 분할을 명령한 하급법원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재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1996년 음반 사전심의제 폐지
1995년 12월에 개정된 새로운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음비법)`이 1996년 6월 7일부터 발효됐다. 문화체육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확정한 개정 음비법은 1. 가요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의 사실상 폐지 2. 영상-음악이 수록된 컴퓨터프로그램 등 신소재 매체의 관리규정 신설 3. 외국 음반-영화 수입절차의 간소화 4. 비디오감상실업(비디오방)의 법적 규정 마련 등을 골자로 했다.
이 법은 가요음반에 대해 그동안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의무화했던 조항을 `미리 심의를 받을 수 있다.`고 바꿔 사전 심의제도를 사실상 폐지했다. 그러나 이와함께 음반 발매 5일 전에 견본을 공륜에 납본토록 하면서, `헌법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 또는 이익을 손상할 우려가 있는 내용,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심의를 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뒀다. CF, 포스터, 재킷 등 선전물의 경우에도 똑같다.
이 법은 또 비디오물을 `영상이 유형물에 고정되어 재생될 수 있도록 제작된 물체로서 테이프 형태의 것과 디스크 기타 신소재 형태의 것을 말한다.`고 정의, 그동안 관리 대상에서 빠졌던 컴퓨터 관련 영상물들을 새롭게 포함시켰다. 하지만 공중위생법을 통해 이미 관리되고 있는 컴퓨터게임 기구와 기판은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음반이나 비디오물의 수입은 공륜의 추천만으로 가능하도록 절차를 간소화 하면서, 개인이 비영리 목적으로 들여오는 20개 이내의 물량이나 이사물품은 이를 면제시켰다. 개인 반입물의 경우에도 음란물 등 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는 공륜의 심의와 추천을 거쳐야 하도록 했다.
▶1995년 이등휘 대만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로 미국을 방문
이등휘 대만 총통이 1995년 6월 7일 대만 지도자로는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그의 방미는 모교인 코넬대학 동창회 참가를 위한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졌으나 탈냉전 이후 달라지고 있는 미-중관계를 선명히 드러냈다. 이 총통의 이날 방미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대만의 노력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중화민국의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등휘 총통은 중국이 대만의 외교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미국 방문이 달나라에 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고 말함에 따라 미-중, 중-대만간의 갈등이 크게 심화됐다.
중국은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통해 대만을 위협했으며 또한 미국에 대해서도 주미대사소환으로 항의함에 따라 미국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의 방해와 인권시비로 맞서는 결과를 낳았다.
▶1994년 영국 천문학팀
슈퍼 갤럭시 발견
영국 천문학자들이 1994년 6월 7일 소은하들의 충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은하(슈퍼 갤럭시)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트레버 폰맨 교수 등 여러나라의 천문학자들은 과학잡지 네이처에 기고한 글에서 이 슈퍼 갤럭시는 지구에서 30억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규모가 예외적으로 크고 독특한 것이라고 밝히고 "이는 많은 소은하들이 모두 한데 뭉쳐져서 한개의 거대 은하를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폰맨 교수팀은 북두칠성의 손잡이부분 바로 밑에 있는 이 슈퍼 갤럭시를 표준망원경과 X레이 집적 인공위성을 이용해 관찰했다면서 슈퍼 갤럭시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주위에는 매우 뜨거운 거대한 가스구름 같은 것이 1백만 광년 범위로 둘러싸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가스구름을 그 위치에 고정시키기에 충분한 중력을 만들 수 있는 가시적 물체는 없는 것으로 관측됐으며 이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분자와는 다른,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슈퍼 갤럭시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폰맨 교수는 말했다.
▶1988년 스웨덴 의회, 원자력발전소를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법안 의결
▶1984년 최은희여기자상 제정,
제1회 수상자 신동식 기자
▶1982년 5개 시중은행 공동으로
신용카드 발급
▶1982년 모부투 자이레공화국
대통령 방한
▶1982년 제2차 유엔
군축특별총회 개막
▶1981년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의 원자로를 폭격, 중동정세 악화
▶1975년 유제두,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획득
유제두 선수가 1975년 6월 7일 일본의 와지마 고이치 선수로부터 세계타이틀을 6회 KO승으로 빼앗았다. 와지마 고이치는 앉았다 일어서며 공격하는 개구리 점프로 유명한 선수였다. 그러나 유제두는 이듬해 1976년 2월 2차방어전에서 15회 KO패로 타이틀을 다시 되돌려줘야했다.
유제두가 2차 방어전에 실패한 후 국내 언론에서는 일본측에서 유제두가 먹은 음식에 약물을 넣었기 때문에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패배했다는 보도들이 나오기도 했다. 유제두 선수는 지금도 그때의 패배를 석연찮은 패배라고 확신하고 있다. 세계 타이틀을 잃어버린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동양챔피언으로 있었다. 그의 동양타이틀 21차 방어 성공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75년 마르코스, 중국 방문
▶1973년 서독 브란트 수상
이스라엘 방문
▶1970년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사망
▶1968년 제1차 한일의원간담회 개최
▶1967년 이스라엘, 요르단과 휴전
▶1963년 백악관-크렘린간
직통전화 가설 합의
▶1961년 한국 미국 합동경제위
기능 부활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피선
▶1958년 이기붕 국회의장 피선
▶1958년 제4대 민의원 개원
▶1958년 브라질.
열차충돌사고로 7백69명 사망
▶1955년 네루 인도 수상 소련 방문
▶1954년 국립중앙혈액은행 발족
▶1954년 세계 최초 컴퓨터 개발자 앨런 튜링 자살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 머신’을 1937년 세계처음으로 고안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동성연애가 알려져 풍기문란죄로 기소된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1912년 런던에서 태어난 튜링은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1935년 이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정부에 의해 모처에서 비밀 개발작업에 매달렸다. 2차 대전 발발로 영국정부가 과학자들을 비밀장소에 모아놓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컴퓨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43년 12월 거인을 뜻하는 세계최초의 연산컴퓨터 ‘콜로서스’가 탄생됐다.
콜로서스는 흔히 세계최초의 컴퓨터라고 불리우는 에니악보다 2년이나 먼저 탄생한 셈이다. 튜링은 이 공로로 1946년 훈공장을 수상했고, 1951년에는 영국 학사원 회원을 지냈다. 튜링은 영국정부가 그의 자살후 20년이 지난 1975년에서야 콜로서스의 사진을 공개하는 바람에 세계최초의 컴퓨터 개발자라는 명예을 놓쳤다.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막후에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암호해독반에 근무하며 영국의 숨통을 죄고 있던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영국을 구해낸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가 영국 법원의 야만적 판결과 정부의 냉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20년 만인 1974년까지 묻혀 있었다. 누구보다 튜링의 공로를 잘 알고 있었을 처칠도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침묵했다. 다만 그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고, 실수로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것으로 기술하는 데 그쳤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학에 재능을 보인 외곬의 괴짜
앨런 튜링의 부모는 원래 영국령 식민지 인도에서 그를 가졌지만, 자식만큼은 영국에서 키우려는 마음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912년 6월 23일 런던에서 앨런을 낳았다. 그러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직 근무가 끝나지 않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인도로 건너갔고, 앨런은 형 존과 함께 퇴역 대령의 집에 맡겨졌다. 그 뒤로 부모는 인도와 영국을 오가다가 마침내 1916년부터 어머니가 영국에 장시간 머물며 아들들을 키웠다.
튜링은 무척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보였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너저분한 외모에 말을 더듬고 영어와 라틴어를 몹시 싫어하는 외곬의 괴짜였다. 또한 평생을 맞춤법과 글쓰기로 고생했고, 언제든 왼쪽이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왼 엄지에다 빨간색 점을 칠해두기도 했다. 이런 그도 수학에서만큼은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미적분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을 뿐 아니라 난해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단순히 이해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읽으며 아인슈타인의 운동법칙을 독자적으로 추출해내기도 했다.
14살 때 도싯의 셔본 공립학교에 들어간 튜링은 총파업으로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자 장장 1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는 끈기를 보였고, 항상 자기만의 고집스런 생각으로 교사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5살 때는 수학적 재능이 빼어난 ‘크리스토퍼 모컴’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둘은 힘을 합쳐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2년 뒤 모컴이 결핵으로 숨지자 튜링은 깊이 낙담했고, 이때부터 필생의 과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능을 기계에 넣어두는 방법을 고안하는 일이었다. 그리되면 모컴의 뇌에 들어 있던 것도 후세에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켐브리지 진학, ‘튜링 기계’를 만들다
튜링은 18살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수치해석을 비롯해서 확률론과 통계학, 수이론, 군론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1935년부터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년 뒤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빼어난 논문을 발표해서 학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논문에서는 컴퓨터의 기본 구상이 최초로 선보였는데, ‘튜링기계’라 불리는 가상의 연산 기계가 그것이었다. 읽기와 쓰기, 제어 센터,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튜링의 핵심 개념인데, 오늘날의 컴퓨터는 튜링의 보편만능기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튜링기계에 내장된 테이프는 메모리칩으로, 테이프에 읽고 쓰는 장치는 메모리칩과 입출력 장치로, 작동 규칙표는 중앙처리장치(CPU)로 발전했다. 만일 실행시키고 싶은 계산이 있으면 그것의 작동 규칙표(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메모리에 넣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기계는 소프트웨어의 규정대로 일을 수행해 나갔다. 이 논문이 계기가 되어 튜링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서 그는 알론조 처치 교수 밑에서 공부했고, 1938년에 기존의 튜링기계를 보강한 하이퍼계산(Hypercomputuation)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강의를 맡아달라는 대학 측의 제안을 뿌리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해독반 건물. 튜링은 여기서 일하며 독일군의 에니그마 체계를 무너뜨렸다.
암호학교와 에니그마
튜링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인 1939년 9월 4일 런던 북쪽의 블레츨리 파크에 위치한 ‘정부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수학팀장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의 천재적 두뇌와 튜링기계의 구상, 그리고 그처럼 한 가지 일에 골똘히 파고드는 성격이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깨뜨리는 데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난해한 암호 체계로 꼽히는 독일군의 에니그마(그리스어로 ‘수수께끼’)는 타자기처럼 사용하는 암호기였는데, 타자기 안에 설치해둔 회전체로 인해 입력한 철자 대신 다른 철자가 타이핑되어 나오는 방식이었다. 초창기에는 회전체가 3개였지만 나중에는 8개로 불어났다. 이런 다중 회전체 시스템으로 인해 타이핑되어 나오는 경우의 수는 백만 가지가 넘었다. 게다가 매일 회전체 위치도 바뀌었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암호문을 해독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초창기 블레츨리 파크에서는 암호문을 푸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런데 침몰한 독일 잠수함에서 암호책이 입수되면서 그것을 토대로 암호학교에서 수많은 계산기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졌고, 무한한 수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계산,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직관력이 총동원되었다. 튜링은 시끌벅적한 암호학교 안에서 이방인처럼 지냈다. 일에만 파묻힌 채 군대 내 규칙이나 법규는 깡그리 무시했다. 또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감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법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된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발설했다.
1940년 튜링이 고안한 기계들이 블레츨리 파크에 설치되었는데, 거기서는 그것을 “폭탄”이라 불렀다. 폭탄 하나는 전기로 연결된 12개의 원통형 연산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24시간 가동되면서 독일 무전들 가운데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철자들을 걸러냈다. “폭탄”의 수가 15개로 늘어나면서 연산 속도는 획기적으로 빨라졌고, 에니그마가 양산해내는 엄청난 경우의 수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확 줄어들었다. 첫째, 에니그마에서 사용되지 않는 세 철자를 배제했다. 즉 원래 허용되지 않은 진짜 철자 하나를 포함해서 오타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좌우 두 철자도 에니그마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E’라는 철자가 배제되면 자동으로 좌우의 ‘W’와 ‘R’도 함께 제외되었다. 둘째, 독일군의 암호 체계가 매일 바뀌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어저께 알아낸 것은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잊어버렸다. 이로써 가능한 조합의 수는 현저히 감소했다.
튜링 폭탄. 영국군이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에는 튜링의 암호해독반의 공이 컸다.
그 다음부터는 고전적 방식으로 암호문 해독에 들어갔다. 가장 자주 나오는 철자들을 모아 군대 용어 중에서 가장 자주 쓰는 단어들과 일치시켰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예상 답안지가 나오면 그것을 독일군에서 내보내는 일기예보와 비교했다. 독일 해군은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정확하게 그날의 날씨를 일선 부대에 타전했는데, 날씨와 폭풍, 비, 파도 같은 단어들은 유추하기가 쉬웠다. 특히 암호화된 단어와 실제 단어의 철자 수는 늘 똑같았기 때문에 해독 작업은 한결 수월했다.
하루속히 결과를 내놓으라는 암호학교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압력은 1943년 3월 1~20일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독일 잠수함들은 이 3주 동안 무려 108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상선을 호송하던 전함도 21척이 파괴되었다. 반면에 적의 잠수함은 1척밖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3월 21일부터 전세가 급변했다. 격침된 연합국 선박의 수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연합국에 의해 침몰된 독일 잠수함의 수는 크게 늘었다. 이로써 히틀러는 사실상 대서양 전투에서 패배했다. 여기에는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겠지만, 튜링의 암호해독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사이 튜링은 암호를 해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단축시켰고, 나중에는 단 몇 분간으로 줄였다. 이로써 영국 함대사령부는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었다. 이제는 오히려 암호의 누출을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독일 잠수함들을 너무 빨리 공격하지 않는 데 신경을 써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군은 즉각 암호 체계를 바꾸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블레츨리 파크 팀의 활약상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가장 은밀하게 수행한 이 비밀작전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묻어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팀에서 천재적인 두뇌 역할을 했던 튜링의 비참한 죽음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는지 모른다.
튜링테스트
전쟁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인공지능에 집중되었다.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그 기계에 룰렛과 같은 무작위적 우연 체계를 도입하면 인간적 사고의 변덕스러움과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까?
1950년 튜링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실험을 제안했다. ‘튜링테스트’라 불리는 유명한 실험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서로 보이지 않는 방 세 개에 인간 두 명과 컴퓨터 한 대를 넣어둔다. 그 중 한 명이 실험 팀장을 맡는다. 팀장이 텔렉스로 다른 두 방에 질문을 보낸다.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 답변이 돌아온다. 이때 팀장이 어떤 것이 인간이 보낸 것이고 어떤 것이 컴퓨터의 것인지 가려내지 못하거나, 컴퓨터를 인간으로 간주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것은 ‘사고하는 컴퓨터’라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튜링도 1950년 당시에는 이런 컴퓨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까지는 작업 처리 속도와 저장 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바꾸는 컴퓨터가 나오리라 예언했다. 튜링은 이런 컴퓨터의 제작에 매달렸다. 특히 삶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는 거의 광적으로 집착했다. 언젠가 ‘튜링테스트’에서 인간이 웃음거리가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1951년 튜링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삶이 그에게 부여한 마지막 보상이었다. 이듬해부터 급격한 추락이 시작되었다.
독이 든 사과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19세 청년을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범죄 집단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주말에 청년을 혼자 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집이 온통 다 털려버렸다. 그는 즉시 경찰을 불렀다. 그런데 청년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순진하게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대로 불어 버렸다. 자유로운 지식인들과 어울리던 습관대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부지 짓이었다. 결국 그는 성문란 혐의로 고소당했고, 법원에서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다. 영국 정부도 튜링을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했다. 이로써 튜링은 컴퓨터 개발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년 동안 여성호르몬을 복용하는 동안 그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고, 그 기간이 끝나자 그의 삶은 반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1954년 6월 7일 튜링은 42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과에다 독약을 주사한 뒤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사과를 깨문 것이다.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백설공주와는 달리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어디서도 그의 죽음을 설명해 줄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현대 컴퓨터공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치고는 너무도 외롭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튜링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1974년까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새크빌 파크에 있는 튜링 동상 <출처: kurt seebauer at en.wikipedia.org>
컴퓨터공학의 선구자
튜링은 컴퓨터공학과 정보공학의 기본 이론을 대부분 다 만든 컴퓨터 과학의 이론적 아버지였고, 이론생물학에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오랜 세월 명성이 묻혀 있었지만, 20여 년 전부터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2012년은 튜링 탄생 100주년으로 세계적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고, 학술지 [네이처]는 튜링을 표지모델로 내세워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 계산기학회에서는 1966년부터 튜링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튜링상을 수여한다. 흔히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상이다. 그리고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에게는 뢰브너 상이 수여된다. 일각에서는 애플컴퓨터사의 로고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도 튜링을 추모하는 뜻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애플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컴퓨터 분야에서 그의 공이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1954년 동남아반공대회,
아시아민족대회로 개칭
▶1953년 이승만 대통령 ,
전국에 준비상계엄 선포
▶1951년 서독서 최후의
나치전범 7명 교수형 집행
▶1950년 동독-폴란드,
오데르나이제 국경 협정조인
▶1950년 북한. 남북한 총선거 제의
▶1948년 이재홍 민정장직 퇴임
▶1940년 조선어학회,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발표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이광수 등 1백50명 피검
▶1929년 독일배상에 관한 영국안 발표
▶1921년 한국-일본 호적법 제정
▶1920년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 해설
1920년 6월4일,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 3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국경초소를 급습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가 이들의 뒤를 쫓았으나 독립군은 이미 근거지인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에 몸을 숨기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6일 오전 10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일제사격으로 60여명이나 사살됐다. 약이 오른 일본군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지만 독립군은 이미 험준한 고려령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지대 봉오동에 은신,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해놓은 상태였다.
봉오동전투를 보도한 독립신문 1920년 6월 22일자.
6월 7일 오전 6시쯤, 일본군이 고려령 골짜기에 다다르자 매복 중이던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두 번이나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깊숙한 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은 120명이나 사살됐다.
마침내 일본군 주력부대가 포위망 한 가운데로 들어설 즈음 700여명의 독립군 총구가 불을 뿜었다. 3면에서 가해지는 일제사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일본군은 157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부상했지만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4명에 중상 2명뿐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도 시작일 뿐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오동전투
시기 : 1920년 6월 7일
지역 : 중국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봉오동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홍범도 장군
만주지방에서는 3·1운동 이후 고조되던 항일 열기를 이어받아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갔다. 이때 동만주지방에서 무력 투쟁을 주도한 사람은 홍범도로, 그는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봉오동전투도 이러한 와중에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봉오동은 원래 황무지였는데, 1908년 최진동이 중국의 지방관청으로부터 이곳의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새로 형성된 한인 마을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1920년 당시 동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봉오동은 남쪽으로는 삼둔자 등 독립군의 활동거점과 연계되어 있었고, 서북쪽으로는 약 40리 떨어진 곳에 북로군정서의 소재지인 서대파가 있었으며, 서남쪽으로 약 16리 떨어진 곳에 홍범도와 연합한 신민단의 근거지인 석현이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 약 40리 떨어진 곳에 광복단의 근거지였던 대감자가 있었다.
6월 6일 밤 10시, 한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한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부대를 삼둔자(三屯子) 서북방 봉화리(일명 범진령)에서 기습하였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의 서곡인 삼둔자전투이다.
이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가와 소좌를 지휘자로 하여 월강추격대를 만들어 독립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월강추격대는 즉각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다 남봉오동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범도 등의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봉오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7일 새벽, 홍범도의 지시를 받은 이화일(李化日)의 독립군은 남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며 마치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는 것처럼 속였다. 당시 독립군은 홍범도의 통일적인 지휘 아래 마을 주민을 모두 대피시키고, 북봉오동의 서산에 홍범도의 지휘부가, 동산에 최진동의 부대가, 남산에 신민단의 부대가 각각 매복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하촌과 중촌을 닥치는 대로 유린한 일본군은 척후병을 보내 상촌으로 진입해 들어왔지만, 신민단의 부대는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
러자 주력부대도 아무런 경계 없이 포위망 속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 홍범도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각처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여 수많은 사상을 발생시켰다. 정신없이 당하고 있던 일본군은 봉오동 일대에 갑자기 밀어닥친 시커먼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우를 이용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50여명을 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20년 대한독립단 부총재 백삼규,
일군에 피살
▶1915년 외몽고 러시아의 보호령화
▶1915년 러시아.중국,
몽고 캬흐타조약 조인
▶1913년 알라스카의 맥킨리봉
(6194m), 스태크등 4인 최초등정
▶1909년 사립학교 인가수 774개교
▶1909년 13도 창의군 대장
이인영 체포
▶1895년 마르코니, 무선 전파 라디오 발명
1895년 6월 7일.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의 한 언덕에서 마르코니라는 젊은 과학자가 금속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금속판은 유도코일을 통해 공중선과 연결돼 있었다. 맞은편 언덕에서 열심히 검파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조수가 순간 벌떡 일어서더니 공중에 총을 쏘았다. 마르코니가 보낸 전파신호가 검파기에 포착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시공을 초월해 전파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과학자의 집념이 확실히 증명되는 동시에 라디오가 지구상에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르코니가 영국-캐나다 간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교신에 최초로 성공했을
1901년 당시의 사진.
무선통신의 가능성을 입증해 보인 마르코니의 발견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무관심했다. 대신 영국 우전성이 마르코니를 전면 지원, 이듬해 브리스톨해협 횡단 무선전신 실험에 이어 1902년에는 2천5백㎞ 떨어진 선박과 육지와의 교신에도 성공했다. 5년 뒤 마르코니와 영국이 합작한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는 대서양 횡단 무선전신 서비스를 상업적으로 시작했다. 1920년쯤에는 선진국 대부분이 무선전신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후 주파수 변조장치가 개발되면서 음성과 음악을 멀리까지 보내 들을 수도 있게 됐다.
1922년에는 미국에만도 6백여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 1백만명 이상이 라디오를 청취하게 됐고, 영국에는 BBC방송이 설립됐다. 선박과 항공기에 라디오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거의 필수가 되다시피 해졌다. 마르코니의 라디오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 1592년 율포해전
1592년 5월 29일 겨우 23척으로 제2차 출전을 단행한 이순신은 중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3척과 합세해 사천·당포(唐浦)에서 왜선을 무찔렀다.
이어 뒤따라 온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25척과 합세해 당항포(唐項浦)에 침범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6월 7일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을 경계하던 중 왜의 큰 배 5척과 중간배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발견하고, 이순신이 즉시 추격을 명하여 율포해전이 벌어졌다.
이 때 여러 전선이 역풍에 노를 재촉하여 율포 근해까지 추격하자 다급해진 왜선들은 배 안의 짐짝을 버리면서 뭍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싸움에서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가 큰 배 1척을 나포하고 1척을 불태운 것을 비롯해 우척후장 김완(金浣), 좌척후장 정운(鄭運), 중위장 어영담(魚泳潭),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등이 힘을 합해 왜선 5척을 나포 또는 격파하고 수많은 왜병의 목을 베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본 왜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뭍으로 도망쳐 자결하였다. 뒤이어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과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은 위험한 적중에 뛰어들어 남은 왜병의 목을 베는 등 마지막 승리를 장식하였다.
이 해전은 제2차 출전 때의 마지막 전투이다. 제1차 출전 때의 합포(合浦) 및 적진포(赤珍浦) 해전처럼 소수의 왜선을 상대한 싸움으로,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 역사상 최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하학적 영토조약
▶1481년 동국여지승람 완간
▶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 위클리프ㆍ후스 이단으로 규정
▶ 1395년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
https://youtu.be/q83CRQ91SA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