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루카 10,13-16
내가 머무는 곳이 내가 믿는 행복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세 도시를 향해 발하신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희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루카 10,13)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공동체가 곧 나의 심판이 됩니다.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야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두 천사가 롯의 가족을 이끌어내며 “뒤를 돌아보지 말고, 평지에 머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몸은 소돔을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죄악과 허영으로 가득 찬 옛 공동체에 미련을 두었기에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는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 프랜시스가 불행을 한탄하면서도 허영의 삶을 놓지 못해 파멸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작은 등불의 어둠을 좋아하는 벌레가 태양의 빛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작은 사랑의 공동체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큰 사랑의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두 천사가 하느님께 파견되어 롯의 가족을 이끌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파견된 제자들의 공동체를 물리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무느냐가 내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작은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사랑도 점차 증가합니다.
일본 도쿄 시부야 역 앞에는 하치코라는 충견의 동상이 있습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치코는 1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역으로 주인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 변치 않는 사랑이 하치코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고, 그 사랑이 하치코를 주인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치코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만들어내는지 배웁니다.
이 원리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야생 소녀' 옥사나 말라야입니다.
3살부터 8살까지 개들과 함께 자란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동물 치료 시설의 전문가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그녀는 점차 인간 공동체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옥사나가 먼저 개의 공동체를 떠나 '사람의 공동체'에 머물 수 없었다면, 결코 하느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야 하는데, 기본적인 인간의 사랑 공동체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을 꾸려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없다면,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외면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행복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점차 더 큰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종착지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끔찍한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콰지모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유일한 공동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탑이었고, 자신을 거둔 프롤로 주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목마른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네주는 작은 사랑을 보여주었을 때, 콰지모도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는 프롤로 주교의 그릇된 욕망보다 더 순수하게 에스메랄다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는 에스메랄다라는 '사랑의 공동체'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추한 외모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을 통해 우리는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며, 그것이 곧 나의 심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족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 만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교회 공동체만큼 큰 사랑을
요구하고, 또한 가장 완전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혈연을 넘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르는 사람까지도 이웃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봅시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그 대답이 우리의 삶을,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한 우리의 길을 결정할 것입니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강론>
(2025. 10. 3. 금)(루카 10,13-16)
<구원받는 일에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1) 여기서 ‘불행하여라.’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주 활동 지역인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 세 고을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대표 도시인 예루살렘을 사용하시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루살렘을 꾸짖으시는 말씀은 뒤의 13장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34-35).”
세 고을들을 꾸짖으신 말씀과 예루살렘을 꾸짖으신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다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수가 적기는 했지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고, 바로 그들이 교회 건설을 위한 겨자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대상을 이스라엘 민족이나 유대인들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할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언급하신 것은 “너희는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으니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이방인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만심과 특권의식과 선민의식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런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3)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는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뒤의 12장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을 찾고 아쉬운 상황이 지나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받은 은총은 잊어버리고, 죄에 대한 처벌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사람은 정상참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 주어도 믿기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등지고 살았던 사람은, 더욱 무서운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도, 특권의식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그들은 자기들이 제대로 살지 않아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잃었고, 그 지위와 은총은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는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모범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