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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음이 카카오랑 합쳐지면서 뭐가 오류가 생긴건지.. 예전 아이디가 안들어가져서 새로 가입했습니다.^^:
오랜만에 공부하다가 예전부터 갖고 있던 궁금함이 있어서 여쭤보려는데요.
사실 조금은 철지난 의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방문객님의 언어를 통해 선명히 정리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최근 소위 도판의 상당히 가벼운 깨자들이 많아지고..그들이 또 일반인들을 선동하는 병폐(?)를 많이 보아서 여쭈어 봅니다.
(근데 적어 놓고 보니까 내용이 너무 많네요..)
질문1.
사람마다, 종파마다, 단체마다 다르겠지만, 유사하게 번뇌 즉 보리라는 어구로 법신불, 본래면목, 본성, 깨달음, 돈오 등을 이야기하는 그 자리는 무엇인가요?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역시나 식의 대상으로서 평등한 어떠한 표상에 불과할까요?
지금은 조금 이상하게 대중화되어서 박수 한번 치고 그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그러한 것을 포함하여 특히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에서 이야기하는 견성이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서요.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어떻게 들어가는지에 대한 여쭘은 아닙니다. 그 자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의미가 있는 자리인지 여쭤봅니다.
질문 2.
제가 방문객님께 배운 바를 토대로 이해한게 맞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떠한 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매우 어려운 것 같은데요. 신심과 교학이 함께 해야하는 아주 어려운 무언가이지 어떠한 자리랄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서로들 다르다고 하지만, 이러한 견성과 참나를 이야기하는 부류는 엄밀히 말하자면 아트만 또는 브라흐만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하고 있습니다. 간화선의 공안을 통한 화두 타파, 견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것이 맞을까요?
(질문이 너무 직접적이어서…죄송합니다..)
(마찬가지로 깊이의 차이일뿐 요새 일반인(재가수행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매우 가벼운 선불교식 깨달음 또한 넓은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견지의 열화(?) 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애매한 자리인 만큼 서로 다른 자리를 같다고 하는 걸테지만용.)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박수치고 깨달았다고 하는 시류는 누구든 쉬이 깨달을 수 있다, 직입여래를 이야기하는 것들의 부작용이 아닐까합니다.)
개인적인 견해와 상태.
20대 때 일입니다.열심히 화두를 잡고 수행하는 어떤 소규모 단체에 들어가서 나름 몇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그들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류의 단체가 늘 그렇듯 나름의 인가도 받고 참 기뻐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그 자리가 어떤 대상화되는 일체 상태와 무관한 견성의 자리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공안들이 풀린다고 해야할까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상태입니다만, 그것에 대한 견해와 입장은 다릅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냥 당연한 이야기일뿐이고, 일종의 착각과 같이 있던 게슈탈트가 붕괴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두리뭉술하게 아닌가보다 생각하기보다는 방문객님의 말씀으로 선명히 들어야 의문이 풀릴 것 같아서 입니다. 또한 그러한 견성 자리를 찾는 시류(?)가 뿌리 깊은 것 같아 이게 무엇인지 부처님의 성불과 정말로 유관한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닌 것이라 추정하지만 어떻게 아니고, 왜들 저러시는지, 언제부터 저렇게 된건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고 해야할까요.
(여담이지만..그 당시 방문객님 말씀대로 대학생이 준 백수라, 나름 화엄 카페에 정리해주신 가르침도 열심히 공부하고, 촉감을 대상으로 하여 의식은 깨어있지만 외부로부터의 오감이 알려지지 않는 상태, 몸을 취한 즐거움까지도 체험해보았는데요. 더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텐데 어째서 거기에 빠졌었던건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목적을 선명히 하기는 커녕 그냥 저냥 흘러가는대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관한 공통된 이야기.
(* 이 자리에 대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묘사들과 이것을 견성이라 이야기하는 근거들을 두서없이 정리해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견지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질문을 드리는 것은 아니나 한때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시류들이 많기에 그들의 입장에서의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자리에 대한 묘사
(* 이게 사실 말 장난이긴한데요. 당연히 아시겠지만은, 실제로 그렇게 계합되었다고 느껴지고, 그냥 그렇게 이해가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실로서 그러한 자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그냥 이게 당연한 사실에 불과하고, 게슈탈트 붕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01) 어떤 상태나 삼매, 내적 표상은 ‘식의 대상’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궁극의 진리라고 할 수 없다.
02) 일체 알려진 것 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넘어서고, 시간과 공간, 전변하여 이름 붙일 자리가 없는 것을 넘어선 계합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03) 에크하르트 톨레와 같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다. 식의 대상도 아니고, 식 그 자체도 아니다. 일체가 나라는 자리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 그냥 그 자체도 아니다. 이름 붙이는 순간 틀리다.
04) 계합되었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없다. 없지도 않다. 있지도 않다. 중간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대상화되지 않는다.
(* 이 자리가 식이나 식의 대상으로서의 상태가 아니라고들 주장하는 이유는 이 자리에 계합되는 것과 상태는 무관하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라기 보다는 어떤 추상도 높은 앎에 가깝습니다. 이 상태에서도 삼매에 들어가고 화가 나고 한다는 것이죠~그러니까 화가 나도 화가 없다는 둥..아무튼..)
2. 그들의 논리
(* 이 논리는 그냥 불교적 사실이기에, 이것이 본성 계합이나 견성이 존재한다거나 그 자리가 견성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그대로 그냥 불교적 사실이나 견해에 불과하니까요.)
- 사선사정과 삼매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 그것은 식 그 자체이거나 식의 대상으로서 평등하며, 알려지는 모든 상태는 과보 이기에 인과를 다하면 언젠가 스러지고 만다.
- 사선사정과 어떠한 상태, 삼매, 선정은 삼계 중생의 존재 상태를 체험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 꿈을 꾸고, 꿈 없는 잠을 자다가, 깨어나는 하루의 삶 또한 사선사정과 삼계 중생의 존재 상태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
- 그러므로 어떠한 상태나 사선 사정의 삼매 등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무한한 윤회 속에서 무수겁 동안 어떠한 상태에 전-변하여 체험하였고, 하루의 삶에서도 삼계 윤회를 하는데 어째서 아직까지 깨닫고 성불하지 못한것인가.
- 그러므로 성불과 깨달음은 사선 사정과 삼매와 견해를 통하여 이룰 수 없다.
3. 텍스트
이러한 부류들이 텍스트로 삼는 것들은 주로 중론이나 조론 등인데요. 대체적으로 진리는 알려지지 않음, 알 수 없음의 무와 시공에 대한 게슈탈트 붕괴 유도에 관한 것들을 탐구합니다. 화두를 통해 추상도 높은 의중을 일으키는 형태로 수행을 하기도 하구요.
조금 더 나아가서 다른 종교나 타종교 수행자분들의 텍스트들을 근거 자료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의 표현이 하나님이든 무엇이든 궁극의 자리는 같은 것이다라는 견지에서 접근합니다.
몇가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해당 자리에 관한 텍스트를 올려보겠습니다.
(* 공안이나 화두는 추상적이고 비유적인 부분이 많고, 조론과 중론 등은 익숙해서요. 실제로 다른 종교의 언어로 설명된 텍스트가 떼묻지 않게 설명되어 있어서 오히려 직접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 개인적인 자리(A)와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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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중세 추기경인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박학한 무지(아는 무지)입니다. 특히 승조 스님의 반야무지론 사이와의 유사성을 이야가합니다. 또한 조주의 무와 같은 자리로서 이해합니다.
(* 제가 번역된 전문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목차와 일부 내용만 올려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전문을 공유하겠습니다. )
대체로 절대적 최대(하나님, 진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알려지는 모든 것은 축소된 최대(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대상)이지만 그 실상은 절대적 최대이라는 것,
번뇌 즉 보리와 같은, 진제와 속제의 둘아님, 법신과 계합 등과 닮아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3-1-1) 박학한 무지의 목차 입니다.
제1권
서론_5
제1장 어찌하여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인가?_6
제2장 따라야 할 것에 대한 예비적 설명_7
제3장 진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_9
제4장 최대와 일치하는 절대적 최대는 이해할 수 없다_10
제5장 최대는 하나다_11
제6장 최대는 절대적 필연성이다_13
제7장 셋이자 하나인 영원성에 대하여_14
제8장 영원한 발생에 대하여_16
제9장 연결의 영원한 진행에 대하여_17
제10장 단일성 속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만유를 초월하는가?_18
제11장 우리가 하나님의 여러 진리를 이해하는 데는 수학이 큰 도움이 된다_20
제12장 우리의 목적을 위해 수학적 부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_22
제13장 최대이자 무한인 선의 특질에 대하여_23
제14장 무한한 선은 삼각형이다_25
제15장 최대의 삼각형은 원이며 구이다_26
제16장 최대의 직선이 만유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최대가 만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비유적인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_27
제17장 같은 것에서 끌어낸 매우 심오한 교훈들_29
제18장 우리는 어떻게 같은 것으로부터 존재의 참여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가?_32
제19장 무한한 삼각형―최대의 삼위일체에 대한 비유_34
제20장 삼위일체에 대하여 좀 더 말함. 사위일체나 그 이상의 일체는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함_36
제21장 단일성을 비유하는 무한한 원_38
제22장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모순을 하나로 만드는가?_40
제23장 무한한 구(球)―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의 비유_41
제24장 하나님의 이름과 긍정신학에 대하여_43
제25장 이교도들은 피조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여러 가지 이름을 부여했다_47
제26장 부정신학에 대하여_49
제2권
서론_52
제1장 하나의 무한한 우주를 추론하기 위한 예비적 추론_52
제2장 피조물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최초의 존재에게서 나온다_56
제3장 최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유를 포함하고 전개하는가?_60
제4장 축소된 최대일 뿐인 우주가 어떻게 절대적 최대의 모습인가?_63
제5장 각각의 사물은 각각의 사물 안에 있다_66
제6장 우주의 전개와 그 축소의 정도에 대하여_69
제7장 우주의 삼위일체성에 대하여_72
제8장 우주의 가능성 또는 질료_75
제9장 우주의 영혼 또는 형상에 대하여_79
제10장 만유의 영에 대하여_84
제11장 운동에 대한 추론_87
제12장 지구의 조건에 대하여_90
제13장 세계와 그 요소들의 창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술에 대하여_96
제3권
서론_100
제1장 이것이나 저것으로 축소된 최대를 넘어서는
더 큰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최대는 절대 없이 존재할 수 없다_100
제2장 축소된 최대는 창조주이자 피조물로서 또한 절대적 최대이다_104
제3장 그러한 최대는 어째서 인간성 안에서만 가능한가?_106
제4장 이 최대가 어떻게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복되신 예수인가?_109
제5장 성령으로 잉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처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는가?_113
제6장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_115
제7장 부활의 신비에 대하여_119
제8장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_122
제9장 그리스도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심판자이시다_125
제10장 심판자의 선고에 대하여_128
제11장 믿음의 신비_130
제12장 교회에 대하여_136
율리아누스 추기경에게 보내는 저자의 편지_141
3-1-2) 박학한 무지의 일부 발췌입니다.
제1장
어찌하여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유 안에는 각 사물의 자연조건이 허용하는 최선의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자연스런 욕망이 있음을 본다. 만유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작용하며 적절한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자신들의 욕망이 좌절당하지 않고 각자의 본성의 경향성이 원하는 목적 속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들의 지식이 목적하는 바에 일치하는 선천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병이 나면 맛을 제대로 알 수 없고, 편견을 품으면 이성적인 판단을 바르게 할 수 없듯이, 언젠가 그렇지 않게 되면(즉, 선천적인 판단력을 잃게 되면-역주)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자유로운 지성은 타고난 탐구를 통해 사랑의 포옹 속에서 얻고 이해하기를 지칠 줄 모르고 갈망한다는 것을 사실로 안다. 건전한 마음은 가장 참된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구자들은 누구나 확실하다고 가정한 것과 비교해서 불확실한 것을 비율적(比率的)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모든 탐구는 상대적이며 비율의 방법을 쓴다. 탐구의 대상을 확실하다고 가정한 것에 근사한 비율로 비교할 수 있는 한, 우리의 판단력은 쉽게 이해하지만, 많은 매개물이 필요할 때는 어렵고 힘든 작업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수학에서 인정한 것인데, 먼저 나온 명제들은 처음의 가장 명백한 원리로 훨씬 쉽게 되돌아갈 수 있으나, 뒤이어 나오는 명제들은 더 어렵다. 이는 그것들이 먼저 나온 명제들을 매개로 해서만 처음의 원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탐구는 쉽다거나 어렵다는 상대적인 비율로 이루어져 있다. 무한은 모든 비율을 벗어나기 때문에, 무한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율은 어떤 점에서 일치를 표현하며 또한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수(數)와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율에 영향을 주는 수는 양(量)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우연히든, 일치하거나 다를 수 있는 모든 것에 그런 수(數)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모든 것은 수의 힘을 통해 구성되어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결합시키는 일과, 알려진 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너무나 넘어서는 것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모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심히 지혜로왔던 솔로몬은 만물은 어려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단언했으며, 신성한 영을 지닌 다른 사상가는 지혜와 명철이 있는 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눈에서”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매우 심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철학에서 주장하기를,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장 명확한 것들을 접할 때 겪는 어려움은 밤의 올빼미가 태양을 볼 때 겪는 어려움과 같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속에 있는 알려고 하는 욕망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완전하게 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는 무지에 이를 것이다. 아는 데 아무리 열심인 사람일지라도, 원래 자신의 것인 무지 속에서 가장 잘 알았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일은 인간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그만큼 더 알게 된다. 내가 아는 무지에 대해 몇 마디를 쓰기로 한 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제2장
따라야 할 것에 대한 예비적 설명
무지라는 최대의 앎을 다루기 전에, 나는 최대성(maximumness) 자체의 본질을 논해야 한다. 나는 더 큰 것이 없는 것을 “최대”라고 부른다. 물론 하나인 것에게는 완전함이 고유한 것이며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일성(unity: 즉, 하나인 것-역주)-그것 또한 존재이다-이 최대성과 일치하며, 그런 단일성이 모든 관계와 축소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절대적 최대성이므로, 그것에 대립하는 것은 분명히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최대는 절대적인 하나이며, 그것은 만유이며, 만유는 이 최대 안에 있으니, 그것이 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대에는 대립자가 없으므로, 최소 또한 그것과 일치하며, 그러므로 최대는 또 만유 안에 있다. 그것은 절대적이므로, 실제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존재이며, 사물에서 아무 것도 축소하지 않으니, 만유가 그것에서 왔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의 신앙은 분명히 이 최대를 하나님이라고 믿는데, 나는 제1권에서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홀로 거하시는” 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인간 이성을 넘어 불가해한 방법으로 탐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 만유가 제 모습으로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 최대는 절대적 존재인 것과 같이, 절대적 존재로부터는 “절대적 존재에서 나온 최대의 존재”라고 불리는 존재의 우주적 단일성이 있다. 이 우주적 단일성은 우주라는 축소된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 단일성은 다수성(plurality)으로 축소되는데, 단일성은 다수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 최대가 자신의 우주적 단일성 속에서 만유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절대적 최대에서 나온 모든 것은 이 최대 안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만유 안에 있고, 다수성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축소와 떼어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축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최대, 즉 우주에 대해 나는 제2권에서 추가적인 고찰을 할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 종류의 최대가 드러날 것이다. 우주는 축소된 방식으로만 다수성 속에서 존재하므로, 우리는 바로 이 많은 것들 속에서 하나의 최대를 찾을 것인데, 우주는 그 속에서 실제로 그 종국에서처럼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하게 존재한다. 이 최대는 우주의 목적인 절대적 최대와 통일되어 있다. 절대적 최대는 가장 완전한 것이며,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말을 힘을 위로 자신의 지성을 끌어 올려야 하며, 그러한 위대한 지적 신비들을 적합하게 표현할 수 없는 말의 특성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독자가 쉽게 단순한 지성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초월적인 방법으로 예를 들고, 감각적인 것들을 내버려야 한다. 이 방법을 따르기 위해, 나는 어려운 문체를 피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했으며, 먼저 진리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아는 무지의 기초임을 평이하게 밝힌다.
제3장
진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무한과 무한 사이에는 비율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는 ‘단순하게 최대인 것’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크고 작은 것들은 유한하지만, 그러한 최대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단순하게 최대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가정한다면,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는 정도(程度)에서 나타나는 대등성을 보게 되므로, 성(性)과 종(種)과 장소와 영향과 시간의 일치점과 차이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비슷한 종류의 다른 것들 중에서는 제3자보다 다른 어떤 것과 더 대등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둘이나 그 이상의 사물이 너무도 비슷하고 대등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비슷해질 수 없다고 여길 만한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척도와 측량된 것이 아무리 대등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항상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지성은 유사성을 통해서는 사물의 진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없다. 진리는 더 많은 것도 더 적은 것도 아니고,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참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참된 것을 정확하게 측량할 수 없다. 이는 원이 아닌 것이 원을 잴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원이라는 존재는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지성은 결코 진리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언제나 더 정확한 이해가 무한히 남아 있다. 지성과 진리의 관계는 다각형과 원의 관계와 같다. 원 안에 그려진 다각형은 그 각이 커질수록 점점 더 원과 같아진다. 그러나 그 다각형이 해체되어 원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 각이 무한히 커진다고 하더라도, 그 다각형은 결코 원과 같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는 사실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 진리는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덜할 수 없는 가장 절대적인 필연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가능성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인 사물의 본질은 그 자체의 순수한 형태로는 잡을 수 없으며, 철학자들이 그것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발견한 일이 없다. 우리가 이 무지 속에서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진리 자체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
제4장
최대와 일치하는 절대적 최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으로 최대인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 그것은 무한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만 그것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더 크거나 더 작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들의 특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더욱이 감각이나 이성이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서, 그리고 서로 간에 너무 달라서, 그것들 가운데는 정확한 특성이 없다. 그러므로 최대인 것의 특성은 어떤 것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모든 이해를 넘어선다. 절대적으로 최대인 것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더 작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는 그것보다 더 작은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최대 또한 그러한 것이므로, 분명히 최소는 최대와 일치한다.
최대와 최소를 양으로 축소하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최대의 양은 최대로 크지만, 최소의 양은 최대로 작다. 그러므로 “크다”와 “작다”를 지성적으로 제거하여 최대와 최소를 양에서 벗어나게 하면, 최대와 최소는 같다는 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최대와 최소는 둘 다 최상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양은 최대의 양 못지않게 최소의 양이다. 그 속에서 최소는 동시에 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립은 더 크거나 더 작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들에게만 해당되며,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절대적으로 최대인 것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최대인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것은 최소가 최대와 일치할 정도로 대립이 없고, 모든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만유인 그런 방식으로 “이것”이며, 그것은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아닌 그런 방식으로 만유이고, 그것은 그것이 가장 작게 “이것”인 그런 방식으로 가장 크게 “이것”이다. “절대적으로 최대 자체이신 하나님은 빛이다”라는 주장은 “하나님은 가장 작게 빛이신 방식으로 가장 크게 빛이시다”라는 주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최대는 무한인 동시에 만유라는 한계이며, 또 동시에 그것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약할 수 없는 것이 아닌 한,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에 그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최대인 것은 우리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다. 우리의 이해는 이성의 길에 의해 그 근원에 있는 모순들을 결합할 수 없으니, 우리는 자연에 의해 우리에게 명백한 것을 통해 나아가는데, 이성은 이 무한한 힘이 부족하므로 무한히 멀리 떨어진 모순들을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의 모든 작용을 넘어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무 것도 대립하지 않고 최소와 일치하는 절대적 최대가 무한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최대”와 “최소”는,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 의미를 지닌 초월적인 용어여서, 양이나 힘의 정도에 대한 모든 대립을 넘어 절대적인 단순성 속에서 만유를 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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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마찬가지로 니콜라스 쿠자누스 경의 숨어계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어떤 대상화 되는 무엇이 아닌 진리 자체로서의 하나님(견성)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짧기에 전문을 올립니다.
- 전문
두 사람 사이의 대화. 한 사람은 이교도이고,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이교도가 말한다:나는 당신이 지극히 경건하게 엎드려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된 눈물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눈물이더군요. 당신은 누구신지요?
그리스도인: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교도:당신은 무엇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인:저는 모릅니다.
이교도:당신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그렇게 열심히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제가 예배하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교도: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을 보다니 놀랍군요.
그리스도인: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더욱 놀라운 알이지요.
이교도: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인:나는 지식에 의해 진리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자기가 안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가 진리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교도:그런데 나도 같은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그러므로 진리 자체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가 먼저 나오고 “이해된 것”이 후에 나오면 진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교도:나는 진리가 그 자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당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당신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교도: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당신은 분명히 잘못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밖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형(圓形) 밖에는 원(圓)이 없으며, 인간 밖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진리 밖의 어떤 다른 길이나 어떤 다른 것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교도:그러면 제가 인간이 무엇인지, 또는 돌이 무엇인지, 그 밖에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리스도인:당신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당신은 다만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본질에 대해 물으면, 당신은 인간이나 돌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겁니다. 당신이 인간이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당신이 인간과 돌과 그들의 차이를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서, 그들이 작용하는 방식과 그들의 모양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구별할 때, 당신은 그것들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름들을 부여하는 것은 구별하는 이성 속에 있는 작용입니다.
이교도:진리는 하나입니까, 아니면 하나 이상입니까?
그리스도인: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의 단일성밖에 없고, 단일성은 하나라는 것은 참이므로, 진리는 단일성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수(數) 속에 오직 하나의 단일성밖에 없듯이, 많은 것 속에 오직 하나의 진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일성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수에 대해 언제나 무지할 것이며, 단일성 속에 있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무 것도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훨씬 더 참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보다 더 참되게 볼 수 있습니다. 더 예리한 눈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듣는 것이나 기타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모든 것은(그러나 그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 자체인 방식 외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참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친 것이며, 진리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눈 먼 사람이 색에 대해 모를 때, 자기가 색의 차이를 안다고 생각하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요?
이교도:그러나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면, 인간 중에 누가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든 앎이든 이해든 간에 진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공경합니다.
이교도:당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마도 진리 안에 있으려는 바람으로 인해서겠지요.
그리스도인: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만, 당신의 이교신앙이 그릇되게도 안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그런 분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교도:형제여, 당신이 진리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는 진리 안에 계시지 않은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이 없으므로, 내가 묻고자 하니, 당신과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 중 가장 큰 하나는, 우리는 절대적이고 혼합되지 않은 영원하시고 형언할 수 없는 진리 자체를 예배하지만, 당신들은 진리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작용 속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예배하고, 절대적인 단일성이 아니라 수(數)와 다수성 속에 있는 단일성으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당신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하나님이신 진리는 남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교도:형제여, 나를 인도해서 당신의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해 주시오.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을 내게 말해 주시오.
그리스도인:저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제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닮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교도:그렇다면, 하나님은 무(無)이군요.
그리스도인:하나님은 무(無)가 아닙니다. 이 무는 “무”(無)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만일 하나님이 무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떤 것이로군요.
그리스도인:하나님은 어떤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이라기보다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당신은 기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은 무(無)도 아니고 어떤 것도 아니라니, 이성으로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하나님은 무(無)를 넘어 계시고, 어떤 것을 넘어 계십니다.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無)가 하나님께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니,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넘어서시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듯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하나님은 비존재가 존재로 되게 하시고, 존재가 비존재로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아래에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전능하심보다 뒤에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교도:하나님은 이름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름할 수 있는 것은 작습니다. 그 크기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교도: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인: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은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름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에게 이름을 주시는 분이 어떻게 스스로 이름이 없겠습니까?
이교도:그러면, 하나님은 형언할 수 있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군요.
그리스도인:이 둘이 모두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순의 뿌리가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뿌리보다 앞선 단순성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언할 수 있으며 동시에 형언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교도: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말하시렵니까?
그리스도인:하나님은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이름이 있는 동시에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모든 것을 넘어서시므로, 나누어서 말하거나 하나로 말하거나, 일치하게 말하거나 모순되게 말하거나 간에,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생각 이전의 하나의 시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교도: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존재는 하나님과 상응하지 않는군요.
그리스도인:옳은 말씀이십니다.
이교도:그러면 하나님은 무(無)이지요.
그리스도인:하나님은 무(無)도 아니고 무(無) 아닌 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은 무(無)이면서 동시에 무(無) 아닌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시작의 원천이며 근원이십니다.
이교도:하나님이 존재와 비존재의 시작의 원천이시라구요?
그리스도인: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교도:그렇지만 당신이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저는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것을 부정할 때 저는 지금도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존재와 비존재의 시작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들보다 먼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존재는 비존재의 시작이 없습니다만, 존재는 시작이 있습니다. 비존재가 존재하기 위해 시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비존재의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비존재가 없으니까요.
이교도:하나님은 진리이십니까?
그리스도인: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보다 먼저 계십니다.
이교도:하나님이 진리와 다르십니까?
그리스도인:아닙니다. 다름은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부르는 모든 것보다 무한히 비할 데 없이 먼저 계십니다.
이교도:당신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인:우리도 그렇게 부릅니다.
이교도:당신은 진실한 말을 하는 겁니까 거짓된 말을 하는 겁니까?
그리스도인: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 둘 다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거짓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거짓이 아니니까요. 또 우리는 그것이 진실하면서 동시에 거짓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단순성은 이름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이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당신은 당신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분을 왜 “하나님”이라고 부릅니까?
그리스도인:완전함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교도: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인:“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테오로”(theorō)라는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나는 본다”라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 색의 영역 속에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영역 속에 계십니다. 색은 보는 것 외의 다른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보는 것이 자유자재로 모든 색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 보는 것의 중심에는 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색이 없기 때문에 보는 것을 색의 영역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의 영역에게는 보는 것은 어떤 것이라기보다 무(無)입니다. 색의 영역은 그 영역 밖에 있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데도,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 영역 속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을 거기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색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색의 영역 안에서 이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색의 이름도 그것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는 것은 구별하는 판단력을 통해 모든 색에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색의 영역에서 모든 이름은 보는 것에 의존해 있으나, 보는 것의 이름은 모든 색의 이름을 벗어나 있으므로 어떤 것이라기보다 무(無)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유의 관계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교도:당신의 설명을 들으니 기쁩니다. 저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든 피조물들의 영역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또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그 분은 모든 개념을 벗어나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피조물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피조물의 영역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혼합적인 것들의 영역에서는 혼합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할 수 있는 모든 이름들은 혼합적인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혼합적인 것은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혼합적인 모든 것에 앞서 있는 것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혼합적인 것들의 영역과 혼합적인 모든 것들이 혼합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만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혼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혼합적인 것들의 영역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현자들의 눈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3-3) 다음으로는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주의자 마르게리뜨 뽀레뜨 수녀님의 「소멸된 단순한 영혼들의 거울」입니다. 소멸된 단순한 영혼이란 .어폐가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하나님과 계합된 자들을 말합니다.
- 마찬가지로 일부 발췌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처에 계시므로, 영혼은 하나님을 도처에서 본다.”
“이 영혼은 아주 잘 안정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있을 모든 피조물의 모든 이해력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영혼이 사랑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이해한 일이 없고, 지금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결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아무 것도 이해 못함’이라는 행복한 나라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하여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해체되어, 자기 자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신 선하심에 의해 완전히 자신만을 보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에 의지를 소유하고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의지를] 지니고 계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나니,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사랑하시며, 자신만을 완전하게 보시며, 자신이 자신이라는 것에 의해서만(alone by His being Himself) 완전하게 찬양하신다.”
“이 영혼은 ...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안식한다.”
“(해방된 영혼은) 더 이상 참회를 통해서나, 거룩한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나, 생각을 통해서나, 말을 통해서나, 일을 통해서나, 이 아래 피조물을 통해서나, 위의 피조물을 통해서나, 정의를 통해서나, 자비를 통해서나, 영광의 영광을 통해서나, 거룩한 이해를 통해서나,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나, 거룩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다.”
“(해방된 영혼은) 죄를 지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의지가 없으면 아무도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영혼이 자신이 심기운 곳, 즉 그 분의 선하심으로 자유롭게 그 영혼에게 그 의지를 주신 분 안에서 자기 의지를 버린다면 죄에서 벗어난다.”
“... 그 영혼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확신과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든다. 그리고 이 아무 것도 없음이 ... 그 영혼에게 모든 것을 주나니, 다른 방식으로는 아무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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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정리하면,
열화버전이긴 하지만 비슷한 논리의 K 돈오를 포함하여, 힌두나 기독교나 불교의 일부 종파들에서 알 수 없고 알려지지 않는, 모든 걸 포함하고, 있음과 없음을 넘어서는, 브라흐만, 참나, 본성, 계합, 진리, 하느님 등등과의 계합이라는 자리를 이야기하고 그걸닦는데요. 이런 게 도대체 무엇인지..부처님 말씀과 유관한건지..하도 견성과 깨달음이라는 이야기가 많기에 주저리 주저리였습니다.
늘 풍요롭고 행복하세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응답이 늦어질 것 같은데요. 이번 일요일까지는 제 생각을 적겠습니다.
지금 다뤄지는 사항은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진 않더라도, 한번쯤 자기 입장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과거 적은 글에서 밝힌 입장과 같은데요. 제가 원래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근신과 매를 버는 똣으로 말씀드림다..우몽의 십무기에 대한 위 질문은 아시다시피 아사히님이 방문객님에게 추가 질문을 한 것과 는 상관 없슴에 댓글 지면을 어수선스럽게 한 점 ,물은 이미 엎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쫄싹쫄싹 끼어드든 버릇이
참 쉽게 안 고쳐지네요..ㅠㅠ
일단 십무기에 대한 제 생각은 ...사실인지 모르나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그수많았던 부처님 제자들은 위 십무기 내용의 질문을 단 한 사람도 묻질 않았다고하데요...거의 외도들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다고하는 카더라 통신을 어디선가 접했는데..
우몽은 그 카더라 통신을 듣고 ..탄복스러
과연 부처님이요 그 제자들이시구나 하며
무릎이 쳐졌는데 ..이윤즉슨 ..살다보면 대책없이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우몽도
적지 않게 침묵이나 도망을 가거든요..
해서 부처님께서는 그 자비로우심에도 째비도 안되게 무식한 넘들에게는 침묵을
하신 거라 봅니다..그 증거가 부처님 제자들은 십무기 십자도 안 꺼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잖아요..
이상입니다..
아!! 그러므로 우몽은 비록 카더라지만 우몽 나름 다양한 식견을 장착하고 덫을 놓은 것인데 자비로운 아사하님이 덥석
무시고는 시공간이며 수와질량이며 거리감등을 운운키에 우몽 식견으로 생각기에는 아사하님은 아..공부는 많이하신 거 같은데..무식한 지경도 있구나 싶었던 거죠..세상은 누구나
지 맘대로 무식할 권리도 있슴에 타인에게 크게 상처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설령 상처를 입더래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개물린셈
치는 권리도 있습니다..아이고 말이 어디로 가는지 ..더 했다가능 ..ㅜㅜ
안녕하세요. 우몽님, 주신 질의와 답변 모두 문제없어 보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아사하2 덕분에 질 좋은 수혈을 받은 듯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유익한 법담
이끌어 주십시요..()..
@우몽 아참 !!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말도 있는데 저는 좀 뒤끝 작렬이라서요..
위 우몽의 덫에 .. 아사하님은 이렇게도 번호를 매기셨네요.. 그 또한 우몽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봅시다..
1. 담백하게 저의 상태(견처?)로는 전혀 설명되는 것도 없고 유추할 수도 없습니다^^;;;;;;;;;;;;;
.......
위 1번은 혹 아사하님의 눙침이 아닙니까?
설마 아사하님의 그 동안의 공부로서 위 십무기에 대해서 설명되는 것도 엄고 유추할 수도 없었습니까?
그렇담 .. 이미 여러모로 생각해 봤다는 지경의 결론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쩐지 아사하님이 은근히 눙쳐서 뭔가를 숨기는 자세의 스킬이
아니냔 말이죠..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몽 우몽님. 저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사람인데요.
공과 사를 나눠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뭐가 문제냐면요.
제가요..사실 우몽님과 법거량을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이게 저의 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눙침이라 표현하자면,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함께 법담을 나누고, 공부하면 좋겠지만요.
거칠게 말하면, 서로 깔고 앉은 방석 들춰보면서 노는 것이 뭐가 즐거운지 저도 아는데요.
개인적으로 현실의 일도 바쁘고, 시간은 새벽에 밖에 나질 않고,
또 제 위치가 어디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런 놀음을 통해 무익한 단물을 얻기 보다는 방문객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싶은게 저의 바람이라, 그냥 조용히 좀 넘어가고 싶었던 겁니다.
이것이 눙침?이 없는 저의 본심입니다.
다만, 다시 말씀해주시니 마지막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실 거래처에 주기로한 서류를 다 몬만들어서 회사에 있는데, 졸려서 일하기가 싫거든요^^ㅋ)
1. 무엇보다도 처음 주신 질의와 관련하여서요.
고민하다가 답변 드렸다는 저의 글은, 같은 질문도 그 의도하는 바가 다르기에, 주신 질문의 의도를 고민하다가 답변을 드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사하2 2. 십무기와 같은 질문에 대한 논의는요. 도판에서 금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본질적인 질문이며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무언가입니다.
당연히 기독교와 힌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종교의 주요 담론이기도 하구요.
불가에서는 십무기의 설화로 묶여서 전해내려올 만큼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십무기 설화는 그 자체가 위와 같은 뿌리 깊은 질문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처님은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이라는 대답을 한 것이랄까요.
그런 의미로, 십무기와 관련하여 논의하거나, 답변하거나, 생각해보는 일은 도판에서 상당히 흔한 일입니다.
우몽님이 뜬금없이 지나가는 아사하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정도로 흔한거란거죠.
그런 즉, 당연히 우몽님도 이런 맥락을 아시리라 간주했고, 설마 저에게 '저 썰에 답변하면 너는 바보'라는 이상한 놀음을 했으리라고까지는 생각을 못한겁니다.
그냥, 니 깔고 앉은 자리가 뭐냐 정도의 잽이랄까요? 그 정도로 생각을 한겁니다.
@아사하2 근데, 본 글에서 제가, 현재 제가 깔고 앉은 자리가 무엇인지를 방문객님께 여쭤본 것이 아니고,
우몽님께서는 제 자리를 들춰볼 이유도 없으시니, 위 담론에서 언급된 K-선의 견처와 관련하여 십무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측면에서 답변했을 뿐입니다.
@아사하2 3. 제가 좀 깎아 내리기는 했지만, 위에 K-선의 많은 수행자분들은 뭐가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고, 밥 먹을 가치도 없을 정도로 기초가 없어서 십무기에 답변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자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다들 현실 열심히 살면서 그 와중에 공부하고, 배우고 똑같이 고민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불자에게 있어서 해당 질문의 의미 정도는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불자이면서도, 굳이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는가 하면요.
말씀드린대로 십무기 자체가 매우 중요한 담론이기도 하거니와 불자로서의 어떤 이상한 의무감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이란 이런 것인데요.
"부처님은 십무기에 대해 답변을 못했잖아?" 라는 의문에 일종의 항변을 하고 싶은 마음 같은거죠.
"아니, 우리 부처님이 지금 그걸 몰라서 답변 안하셨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그런 답변들 중에, '십무기 질문 자체가 말이 안되기에 답변을 안한 것이다'라는 논지를 펼치시는 분들 '도' 많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아사하2 그리고 그 분들은 마치 '슬픔이 포유류입니까?파충류입니까?'라는 질문과 같이,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말씀들 하시는 것이죠.
또 그들이 나름의 견처(인상,느낌)에 수승한 의미[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를 부여하기에, 그러한 견처의 인상을 기반으로, '존재는 있거나 없거나 한 개념이 아니고, 시간 역시 흐른다는 개념이 아니기에, 애초에 질문이 성립되지 않습니다'라고들 답변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더불어, 우몽님의 질문이 제가 여쭙지 않은 제 자리에 대한 질문이었으니,
저도 위와 같은 인상은 알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러한 인상에 기반한 십무기의 주관적 추론은 비약적 사고의 산물로 보이기에, 바른 답이 아닌 것 같다는 답변을 애써 드린 것일 뿐입니다.
하따~ 고거 참 ..
지적에 대한 답글이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 미안함니다. 가능한한 빨리, 늦어도 이번주까지는 적겠습니다.
입장 표명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늦어져 미안하고, 기다려줘 감사합니다. 가급적 이미 적은 내용과 중복 피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 근간[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동의 속에 결론[공성의 체득]의 분열도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닌 것이지, 불교가 아닌 것이 불교로 변신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에서 달라졌는데, 불교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내부 논쟁이 있더라도 창조주임을 부정한다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현실적 이유로요.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불교를 표방하는 종교집단들이 서로 사이비라고 비난하며 다투는 것은 별로 재미 엄는 일입니다. 대중에게 불교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거든요. 그러니 불교 종파 지도자가 불교를 표방하는 여타의 특정 집단을 사이비라고 매도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경우, 불교를 잘 드러내서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바르게 성립했던 종파가 어느 순간 그르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파 내부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한 경우, 그 종파는 역사적으로만 불교였을 뿐입니다. 즉 더 이상 불교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위의 두가지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 역사적 그 어떤 경우이든,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가 아니라고 배척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닐 뿐입니다.
불교의 여러 종파는 불교의 여러 모습입니다. 하지만 불교라고 할 수 있은 다음에야, 불교의 여러 모습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닐 뿐, 불교의 여러 모습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화두선 등을 행하는 선불교는 게송으로 견처를 확인하는가?
만약 화두선 등에서 스승이 게송만으로 제자의 견성을 확인한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그런 형식의 게송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지,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의 견처를 유추해야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견처가 일차적으로나마 불교의 견처라고 이름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냥 조금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면 너무나 쉽고 자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견처가 존재 표상인 것은, 요가등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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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오직 연기만이 사실일 때, 연기 그 자체로서 무한히 전변하여 가는 것 외에 연기를 떠난 무언가가 되는 것은 없는 것일까?
연기만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연기가 아닌 무언가인 경우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사실이 아닌 무언가가 사실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연기가 사실이라면, 연기로 성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조건에서 연기만이 사실이기에, 우리는 연기에 따라 성립합니다. 하지만 "연기에 따라 성립한다"는 것이 "연기 그 자체로서 무한히 전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연기는 연기 그 자체라 할만한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연기에 따라 A가 성립했다 멸하고 B가 성립했다"고 하여, A라는 사실과 B라는 사실에 공통된 실체로서의 연기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A가 연기에 따라 성립했다 멸했고, B가 연기에 따라 성립했을 뿐입니다. A와 B 모두 연기에 따라 성립했다고 하여, A와 B에 공통된 연기@를 상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렵지 않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찾는데요. 무언가를 찾기에, 늘 그 무언가인 겁니다.
여기서 갑자기, 최근 눈꽃님이 올린 법구경 제11장 늙음의 품 제 11장 늙음의 품 8번과 9번 게송이 생각나네요.
<<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꺾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
이야기하다 보니, 부처님의 게송을 가져왔는데요. 위의 게송만 가지구요, 비록 부처님의 게송이지만요, 저런 게송만 가지고 누군가를 깨달았다고 평가하거나 단정한다면, 그거 정말 코미디입니다. 선불교가 그런다면, 선불교는 불교 종파가 아니라 그냥 개그맨 모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 중생에게 자신안에 그 어떤 실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중생에게 자아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는데, 그 사랑스러운 것이 그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윤회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냉정히 평가하면요. 중생에게는 윤회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워 하기에 중생은 윤회합니다.
중복을 피하고 싶지만 다시 한번 위에 언급한 부처님 말씀을 가져오겠습니다. [ 괴로움이 아닌 것, 절대적인 것, 항상하는 것등이 있다면, 그것을 '나'로 취하고 '나'로 삼아라.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소멸까지 알려졌음에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없는 것을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수용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떨치셨죠. 그렇기에 위에 언급한 법구경의 게송을 읊으시게 된 겁니다.
3. 2) 연기의 확증은 조건지어진 것이 아닐까?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일체는 조건지어진 겁니다. 그리고 일체는 연기에 따라 성립합니다. 그러니 연기의 확증도 연기에 따른 성립입니다. 따라서 연기의 확증도 조건지어진 겁니다. 이 역시 너무나 자명합니다.
조건지어진 일체는 즉 형성된 일체는, 꿈 환상 거품 그림자와 같이 실체가 없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이나 번쩍이는 번개와 같이 찰나적이어서 무상합니다. 금강경 사구게죠?
그런데요.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요. 연기의 확증으로 더 이상 태어남이 없다면, 더 이상 연기의 확증은 필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성립하지도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는데, 연기의 확증만 홀로 성립해 있겠습니까? 연기의 확증이 성립해 있다면, 태어난 거죠. 연기의 확증이 유위법(조건지어진 것, 형성된 것)이니까요.
둘째는요. 연기의 확증에도 태어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연기의 확증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는 흐름이 형성될 거라는 점입니다. 연기의 확증에 조건지어진 상태가 형성될 거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연기의 확증에도 불구하고 완전 도루묵이 되는 것을 상정함은 연기의 이치에 반합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면, 악업으로부터도 완전 도루묵이 될 수 있을 거구요. 결국 연기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인 인과의 부정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우연론이라고 하는 단견이 되버리죠.
결국 어떤 경우이든요. 굳건하게 자신을 세우는 삶을 살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스스로의 행위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 우리가 조건지어지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점이 선명하면 그만큼 수행의 무상등과 관련한 두려움도 스러지기 마련이고, 이 또한 연기의 확증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연기의 확증'이란 것이요. 일차적 그러니까 기본적인 사항들만 놓고 봐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죠? 특정 경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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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멸진정, 소멸요. 알려지면 좋고 알려지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구요. 소멸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경계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알려지면 좋은 거니까, 그런 경계들이 무용하지는 않겠죠? 다만 알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뿐입니다.
어쨌건 그 무엇이든 자신에게 의미 있고 수행에 도움이 될만한 어떤 경계가 알려진 경우, 그 경계가 무엇이든 그 경계에 의지하면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편리함이 그 어떤 경계여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한 제 생각은, [현재의 기억] 게시판 50번글 [ 숫따 니빠따 ( 경전 모음 ) 05-07 우빠시바 ]를 한번 훑어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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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거나 미진한 부분은 지적하시면 됩니다.
여담으로 몇 자 적습니다.
연기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 반야부 경론인데요. 중론등의 언명에서 출발하면 엉뚱한 길로 들어설 위험성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니 니까야나 아함부등에서 말하는 내용에 입각해 과연 연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론등의 언명에서 생각하기 보다는, 니까야나 아함부의 언명에서 중론등의 언명을 도출하려고 노력하면 그르칠 위험이 낮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기의 확증과, 연기의 확증으로 인한 다시 태어남이 없음 등..적어주신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한참 많이 해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공부 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좀 시간이 걸려도 분명히 대응하니까, 이상하거나 분명하지 못한 부분은 가급적 지적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