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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첫 제사 1 / 제사장 취임식 제사
레 9:1-14
1 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 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 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
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속죄제를 위하여 숫염소를 가져오고 또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되고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고
4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5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
6 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8 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9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가져오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고
10 그 속죄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고
11 그 고기와 가죽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니라
12 아론이 또 번제물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13 그들이 또 번제의 제물 곧 그의 각과 머리를 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4 또 내장과 정강이는 씻어서 단 위에 있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니라
레 9:1-14 / [아론이 제사장 일을 보다] 여드레째 되는 날,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불러 모아 놓고 2) 아론에게 말하였다. `가축 떼에서 아무런 흠이 없는 수송아지를 끌고 오시오. 속죄제물로 쓰려는 것이오. 또한 몸뚱어리에 아무런 흠이 없는 숫양도 한마리 끌고 오시오. 번제물로 쓰려는 것이오. 이 제물들을 여호와께 바치고 3)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같이 이르시오. `속죄제물로 숫염소를 가져 오너라. 또 아무런 흠이 없는 한살박이 송아지와 한살박이 양을 끌고 와 번제물로 삼아라. 4) 또 화목제물로 여호와께 바칠 수소와 숫양과 기름에 반죽한 곡식제물을 가져오도록 하여라.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니 이른 대로 반드시 해야만 한다.' 5) 그러자 그들은 모세가 말한 대로 여러 제물을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막문 앞으로 가져왔다.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도 여호와 앞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6)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7) 모세는 또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번제단 앞으로 나아가 그대의 허물을 가리울 속죄제물을 드리시오. 또 번제물을 그대 몫으로 드리시오. 그리고 그대와 이 자리에 서 있는 백성들의 허물을 덮어 달라고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시오.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가져 온 예물도 드려 그들의 허물을 덮어달라고 비시오.' 8) [아론을 위한 제사] 아론이 제단으로 나아가 자기 허물을 덮어 달라는 뜻으로 바친 수송아지를 잡았다. 9) 그러자 아론의 아들들이 그 수송아지의 피를 받아 아론에게 바쳤다. 아론은 그 피를 받아 들고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네 모퉁이에 솟아 있는 뿔에 발랐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 부었다. 10) 또 이 제물의 여러 부위에서 떼어 낸 기름 덩어리와 콩팥과 간을 뒤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 11) 그리고 이 제물의 살코기와 가죽은 진영 밖에서 불에 태워 버렸다. 12) 아론은 또 번제물을 잡았다. 아론의 아들들이 그 제물의 피를 받아 아론에게 바치자 아론이 그 피를 번제단 사방에 뿌렸다. 13) 또 아론의 아들들이 이 희생제물을 저며서 머리 부분과 함께 아론에게 가져오자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다. 14) 그런 다음 내장과 뒷다리를 씻어서 번제단 위에 놓인 번제물 위에 올려놓고 함께 불살랐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를 불러다가 제사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위임식을 거쳐 제사장이 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제 자신들과 백성을 위해 직접 제사를 집례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먼저 자신들을 위해 제사를 드린 내용입니다.
첫 제사를 준비하다(1-7)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첫 제사를 준비합니다. 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2, 7),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3-4)의 제물이 준비됩니다. 아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직접 드리는 속죄제의 첫 예물은 소였습니다(2). 아론에게는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과 함께 황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죽어 마땅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민 18:7).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와 긍휼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제사장을 위한 제사, 속죄제(8-11)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먼저 속죄제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약점 있는 연약한 죄인으로 늘 자신들의 속죄제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에게 완전을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역시 여전히 회개가 필요하고 성도들의 중보가 필요한 존재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에겐 다른 제사장이 계십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예수는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히 7:28). 그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십니다(히 7:26).
제사장을 위한 제사, 번제(12-14)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조각을 냅니다. 살과 뼈, 머리, 내장과 정강이까지 모두 단 위에서 불사릅니다(레 1장). 번제는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헌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예수께서는 희생제물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적용: 존경받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행 14:23; 딤전 5:17).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세우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봅시다. 바르게 드려지는 제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대로'라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섬기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섬기기에 부족하다고 느끼며 섬김을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특별한 달란트를 갖춘 소수 인원이 섬김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에 보통의 달란트를 가진 교인들이 봉사하는 것을 주춤하게 합니다. 교회의 섬김은 소수의 엘리트보다는 보통의 교인들이 섬김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설 교 >
살아있는 번제
레위기 9:1~7 / 이필재 목사
하나님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사역을 처음으로 아론에게 허락해주셔서 공식적으로 아론이 최초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인간의 죄를 없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많은 제사의 첫 번째 제사가 오늘 성경말씀입니다. 레위기 9장에서 전체 제사의 종류와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나타나 있고, 첫 번째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대다수의 우리 한국인들은 제사 문화에 대해서 익숙합니다. 오랫동안 유교 문화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제사가 조상에 대해서 지내는 제사인데 저도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유교 문화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꽤 많이 어른들이 제사 지내는 것을 봤습니다. 관심이 없이 보면 이 제사라는 것은 그냥 음식을 차려놓고 절이나 몇 번 하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 순서나 의미와 절차가 아주 복잡합니다. 유교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도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병풍을 반드시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가정에 거의 병풍이 없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있었습니다. 다른 데 쓰려는 것이 아니고 제사지낼 때는 꼭 병풍을 쳐야 합니다. 그 앞에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 향로와 향합이 있어야 되고 반드시 돗자리를 깔고 거기에서 절을 해야 합니다. 그 제상에 올려놓는 음식물도 아무데나 보기 좋게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놓는 자리가 다 따로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홍동백서’라는 말이 있는데 붉은 것은 동쪽으로, 흰색은 서쪽으로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신분을 알리는 지방을 써서 병풍에 붙이고 제사를 지내는데 여덟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에 ‘창혼’이라고 해서 혼을 부르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오십시오.”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 절을 하는데 남자는 재배, 여자는 사배를 합니다. 남자는 두 번을 하고, 여자는 네 번씩 절을 해야 합니다. 오신 분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는 ‘진찬’으로 음식을 차려놓는데 음식물이 식거나 부패하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부엌을 계속 드나들면서 음식을 따뜻하게 차려다가 상을 완벽하게 차려놓습니다. 세 번째가 ‘초혼’이라는 순서인데 술을 따르는 순서입니다. 세 사람이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있고 한쪽에서 따라주면 받아서 세 번에 나누어서 붓고 옆의 사람에게 주면 잔을 제자리에 놓는 초혼 순서가 됩니다. 그 다음에 ‘아헌’이라는 것은 주부들이 드리는 술잔을 말합니다. “아헌하겠느냐?”라고 주부들에게 물었을 때 하겠다고 하면 여인들이 올라와서 똑같은 순서를 합니다. ‘유식’이라는 순서가 다섯 번째인데 이제 식사를 하시라고 음식의 뚜껑을 다 열어놓고 밥에다 숟가락을 가운데에 꽂아놓습니다. 여섯 번째는 ‘합문’이라고 해서 병풍 문을 가려놓고 모두 자리를 물러가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는 ‘계문’이라고 해서 다시 들어와 국그릇을 물리고 숭늉을 떠다가 물에다 밥을 말아서 마지막 식사를 하시라고 합니다. 여덟 번째는 ‘사신’으로 모든 그릇을 제자리에 다 정돈하고 밥뚜껑을 덮고 마지막 절을 하고 축문과 지방을 뜯어서 불을 태움으로 제사가 끝이 납니다. 해 보셨습니까? 그런데 다 잡수시고 갔다고 했는데 하나도 안 잡수시고 그대로 남아있어서 절한 사람들이 다 가져다 먹더군요.
레위기라는 성경은 여러분이 읽어보신 대로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제사의 종류들인데 유교보다 더 복잡합니다. 지금 제가 유교식 제사의 한 부분을 말씀드린 것과 비슷하게 제사의 종류도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다양하고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림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영적으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제물이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양이나 염소, 이런 것을 제물로 삼을 경우에 1년 된 것으로 하라.” 아주 예쁘고 상품 가치가 많이 나가는 것으로 해야 됩니다. 또한 흠이 있거나 상품 가치가 없어서 못 쓸 것을 드렸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최고 아까운 것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피는 몇 번을 드리고 내장은 어떻게 해라.” 제사마다 방법이 다 다르고 아주 복잡합니다. 구약 시대에 왜 그렇게 했는가? 이 구약에서의 신앙 교육은 시각적인 효과가 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드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성을 깨닫게 하는 효과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나실인이라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이 왜 나실인 제도를 주셨느냐 하면 시각적인 효과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런 뜻입니다. 나실인은 나실인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몸의 털을 깎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랍비들을 보십시오. 수염을 평생 깎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술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다닐 때도 조그만 등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보았을 때 사람들이 “아! 나실인이시군요.” 금방 쳐다보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느냐 하면 ‘이 나실인은 하나님의 특별 사명을 위해서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축복이다.’ 그렇게 환영을 하고 그렇게 봄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얻는 신앙 교육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의 독특한 복장 표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들은 스님의 복장이 있지 않습니까? 또, 수녀들은 수녀 복장을 하고 다닙니다. 머리에 쓰는 모자로 종교를 구분하는 것도 있으며 장식으로 구분하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도 여기 많은 분들이 십자가를 걸고 오셨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인도에 가시면 이마에 동그랗게 점찍고 다니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보는데 자기가 믿는 종교의 표시입니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도록 하는 시각적인 효과입니다. 구약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던 구약 시대의 제사 방법이 신약 시대에 와서 왜 없어졌는가? 지금 그런 것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없어졌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형식만이 남아있고 율법의 정신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양을 잡고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데 “이것을 왜 드리는지 아느냐?” 잘 모릅니다. 그냥 시각적으로만 알고 있지 ‘내 죄를 없애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진정성 있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 방법이지만 하나님이 나중에는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다. 너희가 천천의 수양을 갖다 드릴지라도 내가 보지 않겠다.” 이 말은 마음의 상태가 중요한데 마음은 없이 양 한 마리 잡아다 죽여 버리니까 “이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제사가 무시당했고,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그 모든 제사를 한 번에 다 대신 드려주셨습니다. 단번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예수님이 모든 제사를 다 지내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지내주신 십자가 제사 하나의 조건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복잡스러운 제사의 방법이 하나도 필요 없고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살아있는 번제란 무엇인가? 어느 날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시켰습니다. “세상에 가서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오라.” 천사들이 와서 수백 가지 내용을 하나님 앞에 갖다 바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수백 가지 천사들이 골라가지고 온 것 중에서 세 가지를 선택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첫째가 뭐냐? 눈물이 담긴 기도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짜로 웃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가짜로 울기는 참 힘이 듭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 연예인 여러 분이 나옵니다. 제가 여쭤보았습니다. “가짜로 우실 때 눈물은 어떻게 내시는 겁니까?” 그러면 “사실 힘듭니다.” 그렇게 대답하십니다. 가짜로 웃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정말 눈물이 나게 하는 것은 감정을 수없이 잡아야 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약품으로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는데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물이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값진 것이라고 평가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에게 어떤 때 통곡이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 통곡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통곡하고 싶을 때는 통곡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도 많은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통곡이 많은 백성이라 울고 싶을 때는 몰려가서 울어대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수백 명이 함께 가서 함께 우는 장소입니다. 사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꽤 행복해 보이고 잘 사는 거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외롭고 불쌍하고 사랑에 굶주리고 허무하고 쓸쓸하고 마치 에덴을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와 같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놉니까? 기계하고만 놉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아이패드와 같은 기기들이 나와서 그게 사람 만나는 것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그거하고만 놀지 사람끼리 놀지를 않습니다. 그런 기계들은 신경질도 안내고 돈도 안달라고 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말 상대가 없어집니다. 옛날보다 더 잘살고 윤택해졌는데 왜 자살률이 그렇게 높습니까? 외롭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공연히 사람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실컷 울고 나면 그것이 치료가 됩니다. 눈물은 그러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눈물 사건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눈물을 강물처럼 흘렸다고 했고, 소리 높여 울었다고 했고,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쉴 새가 없었다고 했고, 눈물 흘리며 씨를 뿌렸다고 했고, 눈물로 침상을 다 적셨다고 했고, 눈물이 시냇물같이 흘렀다고 했고,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했고, 밤낮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으며, 밤마다 탄식하며 울었고, 내 눈물을 병에 담으라 했습니다. 이처럼 눈물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베드로도 통곡했고,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고, 마리아는 울면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울었다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 속에 기도가 들어있을 때 그것이 살아있는 권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밝혔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 뇌가 청소된다고 합니다. 괜히 뇌가 복잡하고 공연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머리가 아프고 어떤 문제가 있는데 의학적으로도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데 밝혀낸 것 한 가지가 ➊ 눈물이 흐를 때 뇌가 청소가 되고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눈물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현대 의학이 밝혀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울고 싶으시면 새벽기도를 나오셔서 갈보리교회에 방이 많습니다. 아무 방이나 들어가셔서 울고 싶을 때 하나님 앞에 막 우십시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만 되지 않게 하시면 됩니다. 진한 감동을 받을 때 흐르는 눈물이 건강에 큰 도움을 주게 되어 있는데 저는 두 주일 전에 우리 1남선교회와 함께 수목원으로 야유회 시간을 가져서 따라갔다 온 일이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총무 집사님이 의학상식 뉴스라고 소개해 주셔서 아주 의미 있게 듣고 와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몸은 잠을 자거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엔도르핀이라는 것이 나와서 스트레스를 다 물리쳐주고 건강 회복 시켜주고 병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엔도르핀보다 4천배의 효소가 있는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나오게 되면 암도 다 물러가고 건강회복, 스트레스 문제가 완전히 회복된다고 합니다. 엔도르핀의 4천배 효소입니다. 그러한 다이돌핀이 언제 나오는가? 바로 진한 감동을 받았을 때입니다. 눈물이 흐를 만큼 감동적 영향을 받으면 이 다이돌핀이 나와서 모든 건강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효소가 된다고 합니다. 제가 이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내가 진한 감동의 설교를 많이 하면 우리 교인들은 다 병을 고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눈물이 담긴 기도보다 더 진한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들보다 수명이 긴 거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마음에 응어리가 진 모든 고난스러운 것을 하나님 앞에 다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수명이 길고 오래 삽니다.
➋ 두 번째는 주님을 위해서 흘린 땀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사람 몸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은 인간이 성실한 가장 좋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요즘은 문명의 혜택이 너무 많아져서 어느 공간이라도 땀이 흐르지 않도록 모든 시설을 준비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도 에어컨이라는 것이 있어서 시원하게 만들고 사무실에 가도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게 만들고 자동차를 타고 그렇고 어디를 가도 땀이 흐르지 못하게 하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사실 이게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돈을 받고 땀을 흘리게 하는 사업이 잘된단 말입니다. 저는 사우나탕을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는데 다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처럼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다니라고 강조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감동이 눈물을 흐르게 하는 것과 같이 내 체력의 한계를 넘는 힘을 요구할 때 땀이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땀이 주님을 위해서 흘렸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살아있는 번제입니다.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땀이 흐를수록 건강에 좋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흘리는 땀은 아주 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십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틀림없이 변합니다. 찾아오는 진한 감동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나?’ 이게 어떤 때는 마음을 괴롭힙니다. ‘밥만 먹다가 끝났나?’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내 인생의 의미를 좀 가지고 가야 될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통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일은 고난스러울 때 더 잘한다는 것입니다. 통계로 보여주는 것이 서구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여러분!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독교 문명을 이루어서 세상에 보급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이룬 문명이나 그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이룬 미국의 문명이나 온 세상을 다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할 때가 언제인가? 그들이 가장 고난스럽게 살 때입니다. 그렇게 고난스러울 때 기독교 문명을 찬란하게 성취했고 세계 선교를 다 해냈습니다. 살기 좋아질수록 주님을 위한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 시대에 세계적인 예배당 건축을 하도 많이 해놔서 여러분이 유럽 여행을 가면 관광의 90퍼센트가 예배당 구경하러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더 이상 그런 역사는 안 나온다고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 공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시절에 미국의 대형 교회들이 그때 다 세워졌습니다. 가장 열심히 교회를 나갔고 그 시절에는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를 열심히 출석했는지 아침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교회 나오기 때문에 교회 와서 하루 종일 봉사하기 때문에 교회 근처에 상점이 새로 생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7일 11시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해서 간단한 식사를 파는 ‘세븐일레븐’이라는 편의점입니다. 여기서 우유나 샌드위치를 간단히 먹고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그냥 급하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렵게 가장 뜨거운 열정의 땀을 흘리는데 부하게 되면 그 땀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GNP 1만 달러 될 때까지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더니 2만 달러가 되니까 멈추고 제자리에 살다가 3만 달러에서부터 교회에 급격히 교인 출석이 줄어들어서 이제는 교회도 안 나옵니다. 앞서가는 기독교 국가들이 다 똑같은 현상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사 최초의 사람 토마스 목사는 런던에서 파송한 사람입니다. 오자마자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영국이 1980년에서 지금까지 문 닫은 교회만 9천개입니다. 왜 문을 닫았는가? 교인이 안 오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배도 안 드립니다. 잘 살고 또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면 더 잘한다고 말했는데 반대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안 그런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런 위치라면 하나님 앞에 온갖 충성을 다한다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매우 이기적으로 모두 변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1950년대까지 미국이 가는 길은 “Peace and Love”이었습니다. “왜 미국이 존재하느냐? 세계 평화와 사랑을 위해서 미국은 존재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몸을 바쳐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온 세상에 선교사들을 보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진리를 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미국이 가야할 길이다.” 그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1968년에 폴 틸리히 목사가 죽으면서 예언했습니다. “앞으로 미국은 망한다. 로마와 똑같이 되고 있다.” 이유는 뭐냐? 네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지금 미국인들은 ‘에고이즘’에 젖어있다. 이웃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다 이기주의로 살아가고 있다. 자기만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망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제 제외된다. 그 다음에 ‘맘모니즘’이라고 하는 물질만능주의로 내가 돈 천불 줄 테니 저 사람 좀 죽여 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행한다. 이게 마귀의 소굴이지 평화와 사랑이냐? 하나님께서 이 미국 땅에 이 짧은 역사에 큰 물질을 허락해주신 것은 세계인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우유를 보내주고 쌀을 보내주고 돈을 보내서 학교를 세워주고 교회를 세우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기주의가 되어 간다. 망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휴머니즘’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학의 철학 99퍼센트가 휴머니즘으로 간다. 하나님 먼저 생각하던 청교도 정신이 다 사라지고 공립학교에서 아침 기도하는 것까지 법적으로 다 없애버렸으니 망할 것이다. 내 예언이 맞는지 틀린지 두고 보아라. 자기들이 살 집이 없어도 통나무를 찍어다 하나님의 성전 먼저 세우고 농사를 짓고 나서 자기들이 먹기 전에 모두 다 가지고 교회에 와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던 그 정신은 다 사라졌다. 망한다. 두고 봐라. 마지막은 ‘헤도니즘’이라고 하는 향락주의이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모습은 다 사라지고 향락만 찾아 헤매는 나라가 되었다. 망한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미국에서 인기 종목의 스포츠 게임은 주일을 피해서 해야 관객이 많았습니다. 주일에 모두 예배를 드리러 가기 때문에 사람이 안 왔습니다. 지금은 주일에 해야 관객이 많습니다. 그래서 거의 큰 게임은 주일에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아픔이 담긴 용서를 하나님이 살아있는 번제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라고 하는 아픔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용서했는가? 이게 기독교 정신입니다. 여러분! 용서는 아픕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가 아픔을 통과한 기쁨이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모성애라는 말은 있는데 부성애라는 말은 안 씁니다. 자녀의 출산도 엄마가 고통을 겪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버지보다 그 사랑이 훨씬 뜨거워 모성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리고 아픔을 겪는 용서가 살아있는 번제입니다. “양 잡아서 피를 뿌리는 것은 그만해라. 그것은 내가 다 했다. 이제부터는 살아있는 번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화해하기를 힘쓰라
레위기 9:4-5, 누가복음 12:57-59 / 이성희 목사
서 론
흔히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을 구분합니다. 오래 전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가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에세이에서 햄릿을 사색형 인간이라고 하였고, 돈키호테를 행동형 인간이라고 하여 두 인간형을 구분한 것입니다. 두 가지 인간형 가운데 우리시대에 맞는 인간형은 어떤 인간형일까요? 어떤 이는 가장 좋고 알맞은 인간형은 반반씩 가진 인간형이라고 합니다. 사색만하는 인간형이나, 행동만하는 인간형은 인간관계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행동 없는 사색은 공허하게 되고, 사색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사색과 행동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으면 인격이나 삶이 편향적이 되기 쉽습니다.
지난 세기 영어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말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Walk our talk)라는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믿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의 ‘신행일치’,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의 ‘언행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동은 존재의 문이며 창이라고 합니다.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영성이 내면에서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도덕성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압니다.
야고보서 2:18에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20절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26절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믿음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대지’의 작가 펄벅여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1 피트’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많은 생각이 들어 있지만 그 생각이 가슴에까지 내려가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 머리에만 있는 생각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일단 생각이 가슴에 내려가 감동이 되어야 손발이 움직이는 행동이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4:9에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행해야 결과가 있고, 실천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듣고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 위에 구축되어서는 안 되지만, 행위는 반드시 믿음 위에 구축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정당화(justify)하고, 행위는 믿음을 증거(testify)합니다. 행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행위는 믿음을 확인하게 합니다.
간디는 “신념이 행동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행동과 신앙을 통합해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이나, 이론이나, 지식이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행동이 되되 열정적이어야 하고 집중해야 하고 힘써야 합니다. 어차피 무엇을 할 때에는 열정적으로, 힘써 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화해하되 힘써 화해하라는 말입니다. 출애급기 20:9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합니다. 일을 하되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증진은 힘써야 가능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집중해서 하고, 힘써서 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주를 섬기되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화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되 “힘써 열심히 화해하라”는 말씀처럼 힘써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화해는 힘써야 합니다.
누가복음 12:58에는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화해하기를”이란 말은 ‘아팔라쏘’라는 헬라어인데 ‘벗어나다’, ‘떠나다’, ‘자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용어는 법률용어로서 고발자로부터 자유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하면 자유로워집니다.
“힘쓰라”는 말은 ‘에르가시안’이란 헬라어로 노력하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try hard to be reconciled”이라고 합니다. 화해하되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입니다. 화해는 늦기 전에 해야 합니다. 화해의 시간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습니다.
일의 능률이나 효율성은 열정과 집중력과 관심과 힘씀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일이지만 힘써서 해야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면 열정을 가지고 힘써 일하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신명기 6:5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호세아 6:3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냥 적당히 믿는 것이 아니라 힘써 믿어야 하고, 힘을 다해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걸출한 위인들은 무엇인가 비범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자기의 양처럼 정성을 다해 쳤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꼭대기에 불타는 가시덤불에 나타나셨는데 높은 산을 향해 끈기 있게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은 소명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일편단심이었습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포로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맞춰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열정이 바사 왕에게 인정을 받아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배에 오르시는 것도 관심이 없이 자신이 하던 고기잡이에 몰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에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궁금하여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초대교회에 베드로와 단짝이 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일구었습니다. 복음서와 서신과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에베소에 감독으로 갈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시고 갔습니다. 바울은 박해자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는 많은 서신을 기록하였는데 바울이 기록한 분량이 신약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 외에 모든 사도들, 기독교 역사의 모든 순교자들, 그리고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열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사바나지역의 사자들은 동물원의 사자들에 비해 집중력이 탁월합니다. 종일 빈둥빈둥 놀고 잠만 자도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는 동물원과는 달리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미래가 불투명한 야생의 환경 때문입니다. 야생의 사자는 자극과, 열정과, 집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사는 삶을 삽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동물원의 생활이 아닙니다. 마귀와 싸워야 하는 치열한 야생의 삶입니다.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호의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야성을 잃으면 타락하게 됩니다.
화해란 때가 되면 되겠지, 하나님이 하시겠지, 열심히 기도하면 되겠지, 세월이 약이지라고 한다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기도하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십니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화해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성취하는 결과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면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써 화해해야 하고, 힘써 말씀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열정이란 말의 어원은 ‘엔테오스’ 혹은 ‘엔테우스’(entheos/entheus)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진 힘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enthusiasm’이란 말도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힘을 의미합니다. 열심히 힘쓰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레위기 9:4에는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화목제를 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정성이 있어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은퇴한 야구선수는 타석에서 치고 나서 죽으라고 뛰면 한 해에 안타 세 개정도는 더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안타 세 개가 타율을 2할 9푼에서 3할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타율 2할 9푼과 3할은 엄청난 차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스티브 라이언즈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가 1990년 7월 16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경기를 할 때였습니다. 번트를 대고 1루로 뛰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1루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심판이 “세이프”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투수가 불복하여 언쟁을 하는 동안 라이언즈는 바지 안에 들어간 흙을 털기 위하여 바지를 내렸습니다. 관중석에서는 폭소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는 잠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방송과 신문은 “지금까지 경기장에서 바지를 내린 선수는 없었다”고 하였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였습니다. 방송에서 그는 “나는 바지를 내린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관중이 아니라 야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 집중하고 힘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힘써 화해한다면 부끄럼이나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관심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묻어두고 화해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면 화해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화해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화해는 갚을 것을 다 갚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2:59에는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만일에 상대에게 빚이 있으면 다 갚아야 진정한 화해가 됩니다. 빚을 갚지 않고 화해하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한 푼’이란 말은 ‘렙돈’이란 말인데 옛날 성경번역에는 ‘호리’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에서 가장 작은 화폐단위입니다. 내용이 같은 병행귀의 말씀인 마태복음 5:26에도 “한 푼”이라고 하지만 ‘고드란트’라는 단어입니다. ‘고드란트’는 두 렙돈을 의미합니다. 역시 아주 적은 돈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의 뜻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하여 빚을 다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작은 죄까지 다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는 빚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노예의 주인에게 속전을 주고 사서 자유인이 되게 방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인 우리의 빚을 다 갚으시고 값을 지불하셔서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빚을 다 갚아주셨으니 우리도 우리의 빚을 다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하여 우리도 빚을 다 갚아야 합니다. 죄를 다 회개해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습니다.
성 안셀무스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합니다. 그의 책에서 말하는 ‘구속설’은 유명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종인 우리를 해방하려고 속전을 주시고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빚을 탕감 받은 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빚을 탕감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세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 자신의 돈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다시 잡아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고 합니다. 빚을 탕감 받은 것과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빚을 청산해야 가능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비로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죄는 빚입니다. 예수님이 갚으셔야 하는 빚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헬라어로 죄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럿이 있습니다. ‘하마르티아’, ‘파라바시스’, ‘파랖토마’, ‘오훼일레마’입니다. 이 중에서 ‘오훼일레마’는 빚 즉 채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는 바로 이 단어 즉 빚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죄는 빚입니다. 하나님께 빚이 없어야 깨끗한 자입니다.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등장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갔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을 가 있는 동안에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고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주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18절에는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19절에는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다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종을 자유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빚은 다 갚아야 자유롭게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빚을 다 갚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인인 빌레몬에게 진 빚을 바울이 다 갚아 주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빚을 다 갚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빚을 다 갚으라고 합니다. 빚을 질 때 처음부터 빚을 안 갚겠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지 않아 원한을 사고 심지어 빚을 준 사람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속여서 거둬들인 돈의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빚을 다 갚은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빚을 갚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에 보면 ‘가능한 빨리 당신이 진 빚을 갚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재정관리 원칙 중의 하나가 ‘빚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칙입니다.
독일의 어느 의류회사 사장인 마크는 도매상에 가서 1,200마르크 상당의 천을 구매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도매상 주인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결제를 요청하였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고 대금을 결제해 주지 않았습니다. 도매상 주인은 속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도매상의 젊은 신입 사원이 “빚을 받아내는 요령을 말씀해 드릴까요? 험한 욕설과 함께 빚을 독촉하는 편지를 쓰세요. 대신 1,200마르크라 쓰지 마시고 1,800마르크를 갚으라고 쓰시고 반응을 보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그가 말하는 대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틀 후 답장이 왔습니다. “이 얼빠진 놈아, 돌았냐? 나는 네놈한테 1,200마르크 천을 구입하였는데 1,800마르크를 갚으라고? 이 편지와 함께 1,200마르크를 보낸다. 어디 고소할 테면 해봐라.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빚을 안 갚으면 자기 손해입니다. 욕을 먹고, 욕을 하고, 결국은 다 갚아야 합니다. 화해는 마음으로 빚을 온전히 갚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늙은 사자와 생쥐 이야기입니다. 생쥐가 사자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생쥐는 꼭 은헤를 갚겠다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사자에게 애걸합니다. 사자는 생쥐를 살려 주었습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하던 생쥐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생쥐는 사자가 그물 덫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생쥐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로 덫을 갉아서 사자가 덫에서 풀려나게 도와주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빚은 다 갚아야 진정한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여진족 아골타의 전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부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죽을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연계를 강화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세력의 핵심에서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죽을힘을 다하는 열정은 인간에게 보람을 선사하고, 예기치 않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써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9에는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친교의 악수를 하라고 합니다. 먼저 손을 내미세요. 손에 힘이 있는 자가 먼저 힘을 써서 내밀어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빚을 탕감 받아 하나님과 화해한 자인 우리 모두가 마음의 빚, 물질적 빚, 영적인 빚을 힘써 갚고 화해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광스런 첫 제사
레 9:1-24 / 김선종 교수/호남신대 구약학
레위기 8장에서 제사장 임직식을 거행한 다음에 9장에는 제사장으로 임직한 아론과 아론의 자손이 첫 제사를 드리는 영광스런 장면이 나온다. 처음으로 드릴 제사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1~6), 제사를 드리는 모습(7~21), 마지막으로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의 반응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놀라는 백성의 모습이 그려진다(22~24).
1절을 보면 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부른다. 여덟째 날에 부르는 이유는 일주일 동안 제사장 임직식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숫자 8은 성경에서 새로운 시작과 연관되는 경우가 있다(레 14:10, 25:22, 눅 1:59). 2~4절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지시하는 말이 나온다. 아론을 위해서는 속죄제를 위한 흠 없는 송아지와 번제를 위한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라고 말한다(2).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는 속죄제를 위한 숫염소, 번제를 위한 1년 되고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 화목제를 위하여 수소와 숫양,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야 한다(3~4). 그리고 모세는 아론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야웨의 영광이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한다(4, 6). 나중에 23~24절을 보면 제사를 드린 다음에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7~21절에서는 아론을 위한 속죄제(7~11), 아론을 위한 번제(12~14),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화목제, 소제(15~21)를 드리는 모습이 나온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제사를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속죄하고 나서, 백성을 위한 제사를 집전해야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룩한 제사를 드린 다음에 아론이 축도함으로써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친다(22). 아론의 축복문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온다. 아론이 축복한 다음에 야웨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야웨의 영광은 불이 나와서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는 것으로 드러난다(23~24). 이것을 본 백성은 소리 지르며 땅에 엎드리는데,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환희의 외침을 뜻한다. 그야말로 첫 제사의 위엄과 감격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제사장으로 세워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제사였다.
먼저 여기에서 본문이 교회 지도자의 중요성에 대해 주는 가르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레위기 9장은 제사 집전에 대한 15구절 가운데, 반이 조금 넘는 8구절을 아론의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에 할애한다. 그 정도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을 강조한다. 속죄제 규정은 사람이 같은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제사장과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물이 다른 점에서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4:3).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에게 충성을 요구하신다(고전 4:2).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킨다. 아론이 제사장으로 세워진 다음에 드린 첫 제사에 참여한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한 것이고,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맛본다. 하나님이 백성의 삶을 압도하셔서, 그동안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은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특별한 체험에 따른 것만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평범한 일상의 삶과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것은 신앙인의 삶의 기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한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도,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이다. 그리스도인은 매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아론이 드린 첫 제사 때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이 예배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예배함으로써 가능하다. 레위기 8장에서 제사장을 세울 때 일곱 번이나 반복된 표현이 "야웨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다"였는데(8:4, 9. 13, 17, 21, 29, 36), 이 표현은 9장에도 세 번 나온다(7, 10, 21).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평생 예배하는 삶 가운데 그 예배가 자신을 만족시키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배를 통해 과거의 잘못된 나를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호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제사를 집전하지 않아 제사장이 즉사하는 사건이 영광스런 첫 제사 뒤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