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아이와 대형 할인마트에 갔다.
집을 나서기 전 부터 아이는 무척 들떠있었다. 원래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날 따라 아이는 더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기분 좋을 때만 하는 존댓말 까지 내게 꼬박꼬박 하고있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져 유쾌한 모녀는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가는 다람쥐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투스텝까지 밟아가며 마트까지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
먼저 지하 1층 매장에서 아이의 바지 하나를 사고 지하 2층의 식품부로 내려갔다.
예쁜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된 아이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매장을 돌며 필요한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는 동안 아이는 계속 노래를 하고있었다. 완전 자작곡의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를...
한 쪽 코너를 돌아 다음 코너로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맥주가 한쪽 면을 다 차지한 채 진열되어있었다.
그 순간 아이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듯 놓고 맥주 진열대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무슨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라도 된 듯 한 층 높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내게 말했다.
"이이야... 우리엄마가 좋아하는거 진짜 많네!"
주말 저녁이라 마트에는 다니기 불편함을 느낄정도로 사람이 꽤 많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주위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고 그 내용 또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참 많은 소리들을 들었다.
"하하 엄마가 이걸 그렇게 좋아해?" (젊은 남자)
"고녀석 참..." (나이든 아저씨)
"키득 키득" (술 잘 먹을것 같은 아가씨)
"쯧쯧쯧..." (술맛을 모르실 것 같은 할머니)
아이를 데리고 간 친구 집에서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아이는 저만 놓고 내가 무슨 맛있는 것을 먹기라도 하는지 계속 '엄마 이게 뭐야'를 물어댔다.
"엄마만 먹는거야."
"왜?"
"아기들은 못 먹어. 배 아야 해."
"그럼 엄마하고 이모는 왜 먹어?"
"어른들은 먹어도 배 안 아파."
"왜?"
"......"
"왜에?"
"여기 봐 <엄마들은 먹어도 배 안 아파요>하고 써 놨지?"
(아이는 글을 모른다.)
"왜 <엄마들은 먹어도 배 안 아파요>하고 써 놨어?"
아이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방법은 맥주 맛을 보게 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먹어봐."
내가 유리잔을 내밀자 아이는 당황한 듯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배 아야 해서 못 먹는 거라며..."
이런 일관성 없는 엄마의 행동은 아이의 정서에 나쁘다지만 어서 빨리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철없는 엄마는 다시 아이에게 못된 거짓말을 하고 만다.
"조금 먹어보는 건 괜찮아."
아이는 조심스레 유리잔에 입술을 댔다.
"윽, <팬돌이 짱>보다 맛이 없구만..."
"맛이 없지? 나중에 어른 되면 맛있어. 아닐 수도 있지만... 혈통을 봐서 아마 너도 맛있어 할 것 같다."
제 입에 맛이 없으니 엄마가 다 먹든 말든 상관없는 듯 아이는 이미 다른 놀이에 빠져 있었다.
친구 집에 다녀온 다음날 아이는 빨대로 빨아먹던 야쿠르트를 컵에 부어서 먹겠다고 할머니에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흘린다고 엄마는 아이에게 마실 것을 줄 때면 목이 좁은 음료수 병에 빨대를 꽂아서 주곤 했다.
목적달성을 한 아이는 내게 와서 물었다.
"엄마 물 안 마셔?"
"응"
"목 안 말라?"
"응"
"아이 물 좀 마셔"
"왜?"
"엄마가 물 마셨으면 좋겠어"
"왜 좋겠는데?"
"엄마하고 같이 컵 들고 마시고 싶어."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물이었지만 아이가 좋다는데...
나는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려 하자 아이는 급하게 제 컵을 내 컵에 부딪히며 크게 외쳤다.
"건배!"
그리고는 좋아죽겠다는 듯 웃어댔다.
뒤이어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와 함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잘한다. 여자가 애 데리고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혼자 나갔다면 또 몰라도 그것도 밤에..."
"거기 '여자가'란 말이 왜 들어가? 그럼 남자는 애 데리고 술마셔도 돼?"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기에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사실 잘한 일은 아니었다.
"애 데리고 술마시는 남자 봤나?"
"남자들이 애 데리고 술 안 마시니까 여자들이 애 데리고 술 마시지..."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고!"
"......"
아이는 그 후 몇 일 동안 '건배놀이'를 계속 했고 그 때마다 나는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를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맥주 광고가 TV에서 나오기라도 하면 난 채널을 재빨리 돌려야만 했다. 혹시나 아이가 그 광고를 보고는 '저거 <팬돌이 짱>보다 무지 맛없어'라는 폭탄 발언을 할까봐...
그것으로 밤에 아이를 데리고 술 마신 죄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제가 엄마 좋아하는 것을 잘 안다는 표현으로 그것도 엄마가 오늘은 예쁜 바지까지 사줬으니 신이 나서 말을 했겠지만 그 엄마는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손짓으로 불렀지만 아이는 계속 맥주진열대 앞에 서 있었다.
"엄마 이거 안 사?"
"응"
"왜?"
"......"
"왜에?"
"배 아파서..."
"왜? 이거봐 <엄마들은 먹어도 배 안 아파요>하고 써 있잖아."
애들 앞에서는 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더니... 어쨌든 아이를 이 맥주 진열대 앞에서 빨리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팬돌이 짱> 사먹을까?"
"녜!"
돌아가신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다.
술 중에서도 특히 맥주를 즐기셨다. 그래서 지금도 제사상에 맥주를 일부러 따로 챙겨 올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가 술 드시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어쩌다 일찍 들어오신 날이라도 전화가 와서 다시 나가시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꼭 들어오실 때면 아파트 입구에서 인터폰을 해 엄마를 내려 오라 하시곤 했다. 아파트 입구까지 멀쩡하게 잘 걸어오셔서는 엄마가 내려가면 일부러 더 비틀거리거나 아니면 빤히 다 보이는 자동차 뒤에 숨어 계시곤 했다.
지금이야 그때 생각을 하며 웃지만 그때 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참 싫어했다. 술 냄새 풍기는 수염 까칠한 얼굴로 내 얼굴을 비비며 나를 껴안아 주실 때도 나는 항상 짜증만 내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아마 아버지와 난 한번씩 맥주 잔을 함께 기울이지 않았을까... 내가 마셔보고 취해보고 또 살아보니 이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다는 대화도 함께 하면서...
첫댓글 다음부턴 아이는 할머니께 맡기고 친구랑 비파랑 셋이서만 마시세요...ㅋㅋ
그라지요. 혹 비파가 바쁘다면 뭐 거문고랑 마시든가...
ㅎㅎㅎ 재밌네요^^ 혹시 남편에게 밥해주는 거 보다 안주 잘 만든다는 그 친구? (일명 지랄지교) 분과 함께 마시나요? ㅋㅋ..
푸하하~ 맞아요. 그 친구 골뱅이 무침이 일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