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복을 꿈꾼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결코 과대망상이나 허풍을 일삼는 무능력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상한 두뇌와 주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동물적인 감각,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까지 갖춘 무서운 효웅梟雄이었다. 일개 천민의 신분으로 그 험악한 전국 시대의 풍파를 헤치고 살아남아 천하의 쟁쟁한 영웅들을 모두 거꾸러뜨리고 전국을 휘어잡은 인물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원균은 ‘악당’이자 ‘간신’이었다
원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이순신을 모함한 간신배이자 무능한 장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용맹하고 과감한 명장이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순신을 성웅화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악당 역을 맡아서 격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원균은 김탁환의 『불멸』에서 묘사된 것처럼 과연 명장이었을까? 또한 『다시 쓰는 간신열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에 들어와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억울하게 격하된 역사의 희생양이었던 것일까?
이순신은 박정희가 날조한 영웅인가?
이순신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논지가 바로 '이순신은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조작하고 과대평가한 가짜 영웅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사람들은 ‘이순신은 군사 독재 시절에 파시스트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쓰였으니, 민주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는 과감한 주장까지 펴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 ‘원만한 한일 관계의 정립을 위해 현충사와 이순신 동상을 철거하자.’라는 목소리는 안 나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https://www.youtube.com/watch?v=EoiMBiIHFwA
왜군 중 10%만이 조총으로 무장했다
조총을 가진 일본군들은 총 이외에도 보조 무기로 짧은 일본도를 찼으나, 이 정도로는 근거리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일본군들이 조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조선군을 때려죽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엉터리이다. 또한 일본군 전체 중에서 조총을 보유한 비율은 10%를 넘지 않았다. 일례로 1575년,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1만 5천 명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 군을 맞아 조총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전 병력 3만 명 중에서 3천 명만이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국 시대 영주들 중 가장 부유하다는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3천 정 가량의 조총을 보유한 정도였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 전체의 무장 병력은 30만이었으며, 일본 전국의 총기 수는 3만 정이었으니 전체 비율로 보아도 10%정도였다.
조선 수군 불패의 신화, 비결은 무엇인가?
선체가 2층으로 만들어진 판옥선은 이러한 일본군의 전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일본군은 전투원이 탄 2층에 오르기가 어렵지만 판옥선에 탄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적을 내려다보면서 안전하게 화살을 쏘며 공격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창검을 잘 다룬다면 조선군은 그와는 반대로 활에 능숙했다. 이처럼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특기인 궁술과 포격전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전함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판옥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막강한 원거리 화력에 있었다. 판옥선은 많은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화포의 구경도 일본의 화포(30mm)보다 월등히 커서 '천자총통 天字銃筒'의 경우 130mm, '지자총통地字銃筒' 100mm, '현자총통玄字銃筒' 75mm, '황자총통 黃字銃筒'은 40mm에 달했다.
명군의 참전 이후 더 나빠진 전황
전투가 벌어진 지 불과 나흘 만에 성은 함락되었고, 명군과 함께 성을 지키던 조선군 4천 명도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양원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지만 그를 따라온 병사는 고작 1백 명에 불과했다. 이때 전주에는 2천 명의 명군이 주둔해 있었지만 급보를 받고도 구원하러 오지 않다가 일본군이 진격해 오자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이렇듯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한심한 자질을 보인 명군이었지만, 조선인을 상대로 횡포를 부릴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친일파의 원조들
친일파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편에 서서 매국 행위를 했었다. 임진왜란 무렵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반역자로는 국경인鞠景仁을 들 수 있다. 그는 원래 전주에 살다가 큰 죄를 짓고 함경도 북쪽 끝인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회령의 관아에서 일하는 아전이 되었으나, 춥고 황량한 변방으로 자신을 내쫓은 조정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의 두 왕자인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함경도로 도망쳐 오자, 그는 경성의 아전인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명천의 노비 정말수鄭末守 및 기타 불량배들을 규합해 은밀한 모의를 했다. 이 반역자들은 백성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고 왕자들을 붙잡아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순신은 엄격하고 냉혹한 장군이었다
이런 이순신의 방침 덕분에, 이순신의 병사들은 비리를 저질렀을 때 받을 처벌을 두려워하여 불법 행위를 함부로 저지르지 않았으며, 또한 동시에 전공을 세웠을 때 얻게 될 포상을 받고자 전투가 벌어지면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분투할 수 있었다.
공정한 신상필벌을 통한 투명한 신뢰 관계의 구축. 이것이 이순신이 가진 리더십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런 리더십은 병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감화시켰다. 임진년인 1592년 이후, 이순신의 본영인 한산도에는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고, 이순신이 행여 함대를 이끌고 본영을 나갈 때면 혹시 그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줄로 착각한 백성들이 통곡하며 바다에 투신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조선의 군민들은 이순신이 없이는 못 살 지경이 되었다. 무능력한 군왕과 잔혹한 일본군, 포악한 명군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저리 핍박받던 백성들이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이순신뿐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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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임진왜란에 관한 ‘논란’ 끝내기
임진왜란에 관한 사건과 사실들은 매우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잘못 알려져서 ‘상식’이 되어 버린 것들도 너무 많다. 이 책은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온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사건과 사실들, 그리고 ‘잘못 알려진 상식’들을 임진왜란 때부터 지금까지 남겨진 온갖 사료와 자료들을 근거로 실증적으로 분석해서, 진실과 거짓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이 책은 임진왜란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에 관한 상식부터 원균과 이순신의 실제 모습, 조선에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의 역할까지 임진왜란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궁금해 하는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전란을 도발한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말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좇았던 몽상가였을까? 원균은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대에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억지로 악당이 된 희생양일까? 이순신은 박정희가 억지로 만들어낸 억지 스타일까? 일본군은 조총만을 무기로 썼을까? 과연 일본 조총은 유럽으로 수출된 인기 상품이었을까? 일본도는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마법의 검이었을까?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선조가 말한 대로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은 조선군이 아니라 명군이었을까? 이순신은 어떻게 13척의 배로 330척의 적함을 물리쳤을까? 임진왜란 이후에도 거북선은 계속 쓰였을까? 이런 의문과 논란들에 대해 이 책은 명쾌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