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끝페이지, 휴대폰, 꽃배달의 공통점은?"
수첩 끝페이지, 휴대폰, 교회, 꽃배달, .. 제시하는 단어를 듣고 단번에 "지하철노선도"가 있다 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야말로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뒤집어보면, 지하철노선도만큼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지도도 없다는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지요.
우리 일상의 다양한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지하철노선도를 보면 재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이 디자인의 지하철 노선도는 전세계 공통이라는 것입니다. 환승역, 선의 굵기, 각도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평양부터 뉴욕까지 지하철 노선도는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선의 종류는 색깔로 표시되며, 실제 노선의 위치와 거리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최근 도입되고 있는 지하철노선도를 보면 장암역과 도봉산역의 역간거리가 엄청 떨어진걸로 나오고, 편집에 따라 오이도역과 동막역이 인근위치에 표시되는 등 철저히 단순화되어 표현됩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일부 철도동호인들이 만든 실측지도가 있긴 합니다.)
따라서 이용자는 지하철역의 거리와 실제 지도상의 위치를 무시하고 역 수와 노선만 보고 어디서 열차를 갈아타야하는지... 급행운용이 일반화된 일본의 경우 급행열차가 어느역에 서는지를 가늠하여 이동계획을 짭니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버스노선도 적용되어 있는 이 편리한 디자인의 노선도!
수학원리의 힘이 없었다면 절대 나오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1930년대.. 우리나라가 조선총독부의 압제에서 시름하고 있을 때, 영국 런던의 시민들은 지하철 이용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런던의 지하철노선은 오늘과 유사한 형태로 끊임없이 노선이 생기고 중간에 역이 생기는 확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도시교통의 향상에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만 이용객들 입장에선 런던토박이어도 노선도를 척 보고 단번에 길을 찾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런던지하철 당국은 1908년부터 노선도를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당시의 지도입니다.
지하철노선을 선과 점 그리고 색으로 표시하고는 있었지만, 이 노선도를 처음 본 이용객들은 "나는 어디?"를 외칠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지하철 외에 도로, 철도, 템즈강 등 쓸데없는 정보가 너무 많아 이용객들을 헷갈리게 했습니다. 또 환승역의 표시가 명확하지 않아 이용객들은 저기서 갈아타도 되겠지..하고 갔다가 낚이기가 부지기수였지요.
초창기 디자인의 이 지도는 전통의 나라 영국답게 디자인 변경 없이 노선만 계속 추가해서 1930년 당시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었습니다. 런던지하철노선도를 보며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의 머리속을 복잡한 실타래로 만들어주는 노선도였지요.
"머그잔=도넛을 세번 외쳤더니 노선도가 나왔어요"
런던교통국은 노선확장에 따라 노선도는 그려야하고... 이용객의 항의에 대처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왠 듣보잡이 나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머그잔=도넛을 세번 외쳤더니 노선도가 나왔어요"
뭔 듣보잡의 뜬금없는 소리... 저렇게 외치며 영원불멸할 지하철 노선도를 내놓은 사람은 런던지하철 다이아 작도 부서에서 근무중이던 해리 베크 (Henry Charles Beck, 1902~1974)였습니다. 머그잔과 도넛이 왜 같을까요? 그리고 이게 그의 지하철노선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요?
머그잔과 도넛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 특히 학자는 위상수학자(位相數學, topology)들이 유명합니다.
위상수학은 20세기에 들어오며 공간의 위치관계, 가까움을 다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수학 분야인데, 분기이론(bifurcation theory), 파국이론(catastrophy theory)와 혼돈이론(chaos theory)등 복잡한 이론이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가 여기 위상수학에 들어가죠.
위상수학자들에게 머그잔과 도넛이 왜 같느냐?라고 물어보면, "머그잔과 도넛이 모두 한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다."라고 답합니다. 어쨌든.. 이 조낸 복잡한 수학이론을 베크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원리를 노선도에 대입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든 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지하철역,노선의 실제 위치를 이용객들은 노선도상에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선도에서 필요한건 목적지까지 몇 정거장이고 어디서 갈아타야하는가?"
"따라서 노선도에서 실제 지리적 위치를 과감히 배제해야 노선도의 가독성이 높아진다"
지하철노선도의 표준을 만든 베크의 노선도
베크의 노선도는 역과 노선도의 실제위치가 아닌 상관관계만을 보여줬습니다. 90도, 180도, 45도의 각도로 노선을 그린 것과 함께, 도심부의 노선도를 확대해 이용객들에게 자세히 보여줘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연구와 연구를 거듭했고, 철저히 지하철 이용객의 속마음을 꿰뚫은거지요.
그는 1930년에 런던지하철 당국에 새로운 지도를 내놓았습니다만, 지하철당국은 전혀 새로운 디자인에 당황했습니다.
"어? 괜찮네?"
런던지하철 고위 당국자들은 이 디자인에 주저하다 3년후인 1933년, 시험적으로 500부의 노선도를 제작하여 역에 배포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런던지하철은 1933년이 끝나지도 전에 70만부의 노선도를 찍게 됩니다. 매우 편리하고 이해가 쉬운 베크의 지하철 노선도는 런던지하철을 필두로 다른 국가에서도 앞다투어 채택하기 시작했으며, 지하철노선뿐만 아니라 버스노선, 수도관/하수관의 지도,회로기판, 공장의 생산라인 지도에도 도입되었습니다.
"허허허.. 일단 써봐."
자신이 만든 휴대용 노선도를 들고 있는 해리 베크
그의 독창적인 노선도는 1960년대에 색상, 각도변경 등의 사소한 보정을 거친 것만 빼면 33년이나 현재나 여전히 같은 디자인으로 런던지하철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후 베크는 런던지하철을 퇴사하고,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에 출강해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산업디자인을 강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74년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불멸의 지하철 노선도 디자인을 남겨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채택한 역번호 시스템과, 환승띠 시스템도 분명 발명자가 있을텐데... 조용히 묻혀버린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분은 누구였을까요? 지금도 살아 계실까요?
영국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베크의 스케치
노력없는 천재는 없는 법이지요.
-출처-
http://www.vam.ac.uk/vastatic/microsites/1331_modernism/highlights_19.html
http://www.ltmuseum.co.uk/
http://en.wikipedia.org/wiki/Tube_map
첫댓글 잘봤습니다.^^ 저도 런던지하철 노선도디자인이 너무 이뻐서 아예 커다란 포스터를 하나 사서 방에 걸어놨어요^^;;ㅋㅋㅋ
런던에 있는 교통박물관에 가면 지하철 노선도를 만들기 위하여 고뇌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있답니다. 물론 런던에서는 노선도가 들어간 마우스, 티셔츠 등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도권은 언제 그런 수준까지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처음에 개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네 정말 역사적인 발언이죠
영국은 런던 지하철 노선도 변천사에 대한 책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서점에도 철도 서적이 수십종이 꽂혀있고, 철도 관련 잡지도 여러 종류죠. 철도 애호인들 영국으로 여행가시면, 큰 서점에 들러서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정책실명제나 그런걸 했더라면 찾아보기가 쉬웠을텐데요. 그러나 노선도에서 역 번호가 나타나기 시작한게 언제쯤인지 알게 된다면 묻고 물어서 누군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만에 의미 있고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역번호 시스템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입한 것인지에 대한 관련근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station님께/ 제가 서울지하철을 처음 타본게 1986년이었는데, 그때 이미 노선도는 물론이거니와 출입구 폴사인과 역명판에 역번호가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고 있었습니다.ㅎㅎ 참고로 1기 및 2기 서울지하철 안내체계에 대한 디자인 가이드북은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서울특별시 종합자료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9호선 디자인 가이드북은 pdf파일로 있죠..) 누가 했는지까지는 안나와있어도, 어느 디자인그룹(???)에서 했는지는 나와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본글과 별 상관없는 여담인데, 서울지하철 1~8호선 구간에 적용된 지하철 전용서체 역시, 1~4호선 안내체계를 디자인한 디자인그룹(???)에서 서울지하철만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서체입니다. 그땐 컴퓨터도 없었을 때였으니, 서체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했었겠지요. 나중에 이 서울지하철 전용 서체가 5~8호선 구간에까지 쓰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서체의 디자인을 미치도록 좋아합니다..ㅎ
저도 좋아합니다... 장평만 10%정도 조금 줄여서 쓰면 좋을 듯 하네요^^
우리나라 지하철 노선도중에 제일 잘한 디자인을 뽑으라면 환승역을 삼태극으로 표시한겁니다. 외국 지하철 노선도 보면 환승역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는 표시가 확 눈에 안들어 옵니다. 단순히 점크기를 크게 표시하거나 동그라미 표시를 하거나 그 뿐임.
만약 휴대전화,종이,수첩 끝,컴퓨터 등등에 저런 노선도가 많이 있는걸 베크가 본다면 기분이 정말 좋겠죠?
이거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