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드디어 스물스물 비가 나린다. 목감기 놈이 찾아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코트 깃을 세우고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버스는 오래지 않아 도착했고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느낌표와 좋아요를 눌러댔다. 힘없이 눌러대는 손가락 운동은 집 앞에서야 멈췄고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진동으로 바꾸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포의 빨간대야 안에 들어앉은 커다란 무우들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
- 우라질, 이게 왜 또 있는 거야 -
"이제 오는 거야?"
"네"
"밥 차려 놨으니 어여 먹고 오늘은 무우 채썰자."
"네?"
- 우라질, 이게 무슨 시추에션이지? -
목으로 넘어가는 사료가 오늘따라 거칠게 느껴졌다.
- 우라질, 지가하지 -
"공주는 안 온데요?"
"응, 하준이가 감기 기운이 있다네."
"지들 먹을거랑 같이 허는건디 일찍 와서 이런 거 좀 하라고 하지 그랬어요."
"손주가 감기 기운이 있다잖여. 당신이 하면 되지."
- 우라질, 내가 머슴이냐? ㅠ -
"네, ㅠ"
사료통을 싱크대로 갖다 놓고 명령을 기다렸다.
"어떤 거 하라고요? 무우 채썰면 되요?"
"채써는 건 나중에 하고 우선 강판으로 무우를 갈어"
"네?"
- 우라질, 이게 뭔 말인지 모르겠네. 내가 갈갈이도 아닌데 무슨 무우를 갈으라는 건지 ㅠ -
"내일 김장하는 거 아니였어요?"
"김장을 할려면 미리 준비해 놔야 되잖아. 어여 갈어"
"네. 그런데 무우을 채썰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왜 무우를 갈어요?"
"갈으라면 갈어. 그래야 김치가 맛있으니까 그런 거지 밥팅아."
- 우라질, 지가하지 ㅠ -
준비된 강판에 무우를 올려놓고 사정없이 갈아댔다. 밀고 땡기고 쎄게 천천히
- 우라질, 장난 아니네 -
"이거 다 갈아야 되는 거에요?"
"엉, 어여 갈어"
하나를 다 갈았다. 꼬투리를 조금 남기고 무우는 장렬히 전사했다. 하나를 더 집어 다시 사정없이 갈아댔다.
- 우라질, 이게 뭐하는 짓인지 ㅠ -
두개를 끝내고 세개 네개. 슬슬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
"이거 다 해야 하는 거에요?"
"어여 갈기나 하라고. 내일 김장할 생각하니 삭신이 벌써 아파지네. 어여 갈어."
- 우라질, 혼자 아프기 싫다는거야 뭐야 ㅠ -
여섯개를 넘기자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라질,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
그런데... 그런데... 아홉개를 넘기자 도저히 못 하겠다. ㅠ
"이거 다 갈라구요? 넘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 ㅠ "
"그래? 그럼 그만해 나머지는 내일 그냥 채 썰어서 버무려야겠네. 수고했어"
- 우라질, 오늘 다 해야한다더니 뻥 깐거야? -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완전 방전된 듯 아무리 힘을 줘도 감각이 없다.
- 우라질, 이게 뭐여. ㅠ -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손에 힘이 풀 려 힘들게 한자 한자 적고 있다.
- 우라질, 내일 어쩌지? 가출할까? ㅠ -
***
어제부터 목이 아파 오더니 오늘은 스멀스멀 감기라는 놈이 서서히 내 몸을 점령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동네 공원길을 한 시간 정도 걷다가 투벅투벅 지치고 처진 몸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 섰다.
"일찍 왔네? 점심 먹었어?"
"아뇨 생각 없어요. 그냥 좀 쉴게요."
옷을 갈아 입고 썰렁한 옥탑 개집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얼마를 잤을까? 시끌한 소리에 잠을 깼다.
- 뭐지? -
그때 아랫층에서 대장님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일루 나와 봐. 어여."
"뭔데요?"
"배추 왔네. 응접실로 옮겨 어여."
- 잉?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 절임 배추? -
"그게 벌써 왔어요?"
"그러게 빨리 왔네. 어여 들어 놔."
- 우라질, 몸도 안 좋은데 무슨 ㅠ 지가허지 ㅠ -
무거운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갔더니 대문 앞에 절임 배추 5박스가 놓여 있었다.
- 이크, 택배 아저씨 나뻐요 ㅠ 안 까지 올려 주시고 가시지 ㅠ -
낑낑거리며 3층까지 절임 배추 박스를 옮겼다.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왕복 다섯 번. 급속하게 몸 에너지가 방전 되었다.
"다 옮겼는데요. 좀 쉴게요. 몸이 안 좋네요."
"뭐야? 김칫속 넣어야지. 이걸 다 나 혼자 하라고?"
"아뇨,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헐 대박. 그래서 못 하겠다?"
- 우라질, 머슴 아프다고요 ㅠ -
"깐돌이 엄마한테 전화해서 오라할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빨리 버무리게 알았지?"
"네. ㅠ "
- 큰소리로 '나 못하거든 감기 기운도 있고 이걸 남자가 왜 해? 나 못하니까 니가 알아서 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건 죽음을 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ㅠ -
십분쯤 지났을까 깐돌이 엄마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공주 아빠 계셨네요. 두분이 다정히 김칫속 치대면 되지 왜 불렀을까나."
- 우라질, ㅠ 깐돌이 엄마. 나 죽으라는 말이네요 ㅠ -
"깐돌이 엄마. 이 남자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껍데기여. 빨리 끝내자고 알았징"
- 헐 껍데기? 사료값 생활비 다 내가 주고 있거든 ㅠ -
숙달된 조교로부터 김칫속 넣는 방법을 전수 받고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아따 그렇게 대충 비벼대면 안 되지. 속 적당히 잘 넣고 배추잎 잘 감싸서 김칫통에 넣어야제"
- 우라질, 지가허지. 내가 김치공장 사장 이냐? -
"네 신경 써서 속 넣을게요. ㅠ"
세 명이서 열심히 김칫속을 넣었더니 까마득하기만 했던 김치와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김치 전투에 참여 했더니, 완전 방전 됐네 ㅠ 우라질 -
"다 끝났네 수고 했어. 깐돌이 엄마 돼지고기 삶은거랑 보쌈해서 먹자. 머슴도 일루와 보쌈 먹게"
"아뇨. 저 들어가 쉴께요. ㅠ"
"그럼. 들어가 쉬던지"
"네 ㅠ"
기듯이 옥탑 개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얼마를 잤을까? 방안이 깜깜하다.
지금 시간 11시 30분.
- 아! 배 고프다. -
°
첫댓글
김장은 하셨나요?
ㅎㅎ
우라질,,,
재미있어서
따라해 봅니다.
ㅋ
해피한 하루 되세요
그렇게
김장은 마무리 하셨군요~ㅎㅎ
네
해피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