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순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안녕하세요. 역사책 읽기를 즐기는 한우리 독서토론 논술 선임 교사 북대양입니다.
11월에 치르는 중학교 3학년 역사 시험 범위에 조선 시대 4대 사화가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역사 수업을 하다 보면 사화가 뭔지, 사회에 대해 뭔지 모르는 학생들이 있어서
사화 순서와 사화의 뜻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화(士禍)의 뜻
사화(士禍)는 사림(士林)의 화(禍)를 줄인 말로 사림파가 훈구파의 공격으로 크게 피해를 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특징
훈구파는
혁명파 신진 사대부를 계승한 세력 중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을 말하는데요,
이들은 지위를 이용하여 토지와 노비 등 재산을 늘리고 주요 관직을 차지한 세력을 말합니다.
사림파는
온건파 신진 사대부의 길재를 계승하고,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썼는데요,
성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다른 사상은 배척하고 왕도 정치를 지향한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던 사림파는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영남 출신 사림을 등용합니다.
사림파는 주로 언론 기관에 등용되어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합니다.
김종직은 1431년~1492년 사림의 지도자로 성종 때 관직에 진출하는데요,
그가 지은 '조의제문'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다고 해서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고 맙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내용은 김종직이 지어 실록에 실린 글로, 중국 초의 항우가 어린 의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한 글인데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 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화(士禍) 무오사화(戊午士禍)
사화는 연산군 때 부터 시작되었는데요,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은
드디어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첫 번째 사화는 1498년 연산 군 때 일어났는데요, 성종이 죽은 뒤 성종 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훈구파 이극돈이 발견하게 되고, '조의제문' 내용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 하여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을 주장합니다.
이 사건으로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 30 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고, 조의 제문을 지은 김종직은 이미 죽어 땅속에
묻혔는데도 불구하고,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부관참시란 무덤을 파헤치고 관 뚜껑을 열어 시체의 목을 베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 사화(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두 번째 사화는 연산군 10년 1504년 에 일어났는데요, 연산군의 친어머니 윤 씨는 연산군이 어렸을 때,
왕비의 자리에서 쫒겨나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연산군은 임금이 된 후에도 이 비극을 모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왕의 측근이자 훈구 세력인 임사홍이 사림 세력에 타격을 주기 위해, 연산군에게 폐비 윤 씨의
비참한 죽음을 알립니다. 이에 복수심에 불탄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이 사화로 훈구 세력도 일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성종 때 언론 기관에 근무하면서 윤 씨의 잘못을 따지고
폐비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림 세력들은 큰 화를 입었습니다.
피해를 입은 훈구파 중 정창손과 한명회는 이미 죽은 후였는데요.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당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 사화(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포악해지다 못해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연산군이 훈구파의 재산까지 빼앗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기로 합니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훈구파는 반정을 일으켜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되는데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합니다.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 갈 인재로 조광조를 발탁하는데요,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 정치를 격려해주다가 너무 급진적인 그의 정치에 결국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 기회를 노린 훈구파는 개혁을 주도하고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조광조 세력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조광조 식 개혁 정치를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리는데요,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 사화입니다.
기묘사화 하면 나뭇잎을 떠올리면 되는데요, 나뭇잎에 꿀을 발라 놓고 벌레가 갉아먹으니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조 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네 번째 사화(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을사사화는 1545년에 일어났는데요. 중종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윤 씨들이 집안싸움을 벌입니다.
중종을 이어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외척인 윤임이 왕위 계승 권을 놓고 경쟁을 한 윤원형 일파를 홀대합니다.
그런데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명종이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명종의 외척은 윤원형 집안인데요. 이번에는 윤원형 일파가 자신들을 홀대한 윤임 일파를 제거합니다.
마치 복수혈전 같이 말입니다. 이 사건은 왕실의 외척들 간에 벌어진 권력 다툼이었는데요.
중앙 정계에 조금 남아 있던 사림 세력은 이 사건의 와중에서도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사화 순서와 조선 시대 4대 사화, 사화의 뜻과 무오사와,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정리한 내용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4대 사화를 겪은 사림 파들은 끝끝내 살아남게 되는데요. 바로 서원과 향약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후 사림파는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치열한 붕당 싸움이 이어지게 됩니다. 붕당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사화 순서. 조선 시대 4대 사화 정리|작성자 북대양
*사화를 한자에서는 士禍라 하기도 하고 史禍라 하기도 함을 밝힙니다.
<옮긴 글>
첫댓글 조선시대 4대 사화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권력 다툼’으로 번지며 수많은 선비가 희생된 비극이었고, 그 과정에서 사림이 도덕적 명분을 강화하고 붕당 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교훈을 줍니다.
핵심 교훈은
권력 다툼은 ‘이념’보다 ‘권력 강화’가 우선될 때 비극으로 치닫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립을 ‘정치적 숙청’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은 결국 왕권과 신권의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사화는 사림이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고, 훈구가 점차 몰락하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사화는 훈구-사림 대립이 단순한 세력 다툼을 넘어 ‘왕권 강화’와 맞물려 확장된 사례로 생각됩니다.
사림은 사화 이후 학파·학문 중심의 결속을 강화하며 붕당 정치로 전환하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4대 사화는 사림의 성장, 훈구의 몰락, 붕당 정치의 토대 형성을 촉진한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결국 권력 다툼 속에서 ‘대승적 양보와 협력’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역사적 교훈을 남깁니다.
이조 정치를 당파 싸움의 정치라 하지요.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무슨 정치라 해야 할까요?
똑같은 역사의 반복이라 생각되지 않는지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나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