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05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몽금포타령」이 들려오는 곳
『택리지』에 “장연부 북쪽에 송화ㆍ은율ㆍ풍천을 만들고 장련에서 맥이 그쳤는데, 평안도 삼화부와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추산에서 뻗은 한 맥은 장연 남서쪽을 따라 달리다가 장산곶에서 그쳤는데 골짜기가 꼬불꼬불하며 깊다. 고려 때부터 호남의 변산 및 호서의 안면도와 함께 소나무를 가꾸어서 궁전을 짓고 배를 건조하는 데 소용되는 재목으로 쓰고 있다”라고 기록된 장산곶은 1952년에 신설한 용연군에 위치한다. 장연군의 남부 지역과 태탄군의 일부 지역을 합하여 만든 군으로, 용연군에는 길이가 21킬로미터에 이르는 용연반도가 있는데, 용연반도의 북서쪽 기슭에 우리나라 8경 중 한 곳으로 이름 높은 몽금포가 있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今日)도 상봉(上峯)에 임 만나보겠네.
에헤요 어헤요 임 만나보겠네.
갈 길은 멀고요 행선(行船)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몽금포타령」은 황해도 장연 지방에 있는 몽금포 어항(漁港)의 정경, 고기잡이 생활의 낭만을 엮은 노래로 가볍고 경쾌한 민요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애수가 감돈다. 이와 같은 「몽금포타령」으로 잘 알려진 몽금포에는 마치 비단 필같이 길고 넓은 흰 모래밭이 펼쳐지는데, 이 모래를 백사(白沙), 금사(金沙) 등으로 부른다. 4킬로미터나 되는 모래밭에 해수가 맑아서 천혜의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특히 모래의 질이 우수하여 명사십리 또는 금사십리라 하였는데, 모래알이 아주 가늘어 바람이 불면 날아가 모래언덕을 만든다. 맨발로 걸으면 발아래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사(鳴沙)라 하거나, 모래알이 맑고 깨끗하여 명사(明沙)라고도 하였다. 율곡 이이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송림 사이 거닐다 보니 낮 바람 시원하고,
금모래에서 놀다 보니 어느덧 석양이 지는구나.
천년 지나 아랑의 발길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고운 주름 다 걷히니 수평선은 더욱 멀어라.
장산곶은 산줄기가 서해 깊숙이까지 뻗었다고 해서 장산(長山)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조선시대에 아랑포영과 조니포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던 국방상 중요한 요충지였다. 장산곶 모래밭에 대한 『택리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장산곶 북쪽에 금사사(金沙寺)가 있고, 바닷가 20리 거리가 모두 모래언덕이다. 이곳의 모래는 아주 곱고 금빛 같아서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이 모래들은 바람에 따라 쌓여서 산봉우리처럼 되는데, 높아지기도 얕아지기도 하며 아침저녁으로 위치가 옮겨져서 혹 동쪽에 우뚝했다가 서쪽에 우뚝하고, 갑자기 좌우로 움직여서 일정한 방향이 없다.
그러나 모래 위에 있는 금사사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끝내 모래에 묻히지 않는데, 이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해룡(海龍)의 조화’라고 한다. 모래 속에서 해삼이 나는데 모양이 방풍(防風) 같다. 매년 4~5월이면 중국 등래(登萊)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는 자들이 많다. 관에서 장수와 이속(吏屬)을 보내 쫓으면 이들은 바다로 나가 닻을 내리고 있다가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다시 언덕에 올라와서 해삼을 따간다.
몽금포 동남쪽에 구미포가 있는데, 이곳의 승경을 처음 발견하고 개발에 착수한 사람이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는 1900년에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피서를 보냈고, 그 뒤 중국ㆍ일본의 선교사들과 함께 구미포해수욕장 부근 일대의 대지를 점유하는 수속을 밟아서 별장 50여 채를 지었다. 그 덕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세계적인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다.
구미포해수욕장과 몽금포해수욕장1) 그리고 대청도 해변 일대에 있는 가늘고 흰 모래를 규사라고 부른다. 마치 설탕가루나 고운 소금같이 알갱이가 가늘어 손에 쥐면 어느새 새어나간다. 가벼워서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으로 날려 천태만상의 모래언덕을 이루는 이 모래를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연간 약 7만 톤가량을 실어갔다. 한편 장산곶은 “용이 할퀴듯, 범이 움켜쥐듯 다투어 가며 자리 아래에서 기이한 모습을 비친다”라고 할 만큼 경치가 수려한데, 국사봉 자락의 장산곶 해변에는 염옹암(鹽瓮巖, 소금항아리바위)이라는 가파르고 높은 바위 2개가 있다. 그 아래쪽은 물살이 세고 해수가 굽이치므로 이 앞을 지나는 배들이 좌초하거나 난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해난 사고를 막기 위해 옛 어부들은 장산곶에 사당을 세우고 바다의 신에게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에 있는 해로(海路)는 연안 항구로서 세곡미를 나르던 뱃길이자 중국과의 무역선이 지나던 항로로 인당수(印塘水)라고 부른다. 『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이 뱃사람에게 팔려가 몸을 던지는 인당수는 물결이 세차 항로가 험하기로 이름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해주의 청성묘 앞에 있는 백세청풍비를 중국에서 만들어 배에 싣고 오다가 이곳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같이 타고 오던 점쟁이가, 비석의 ‘풍(風)’ 자 때문에 해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니 ‘풍’ 자를 깎아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풍 자를 바다에 던지니 이내 물결이 잠잠해져서 이 험한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택리지』에 따르면 장산곶 앞바다에서는 복어가 특히 많이 잡혔으며 중국의 것보다 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