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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의 아버지와 아들 | ||||||||||||||||||||||||
김승옥의 「건(乾)」과 김원일의 『아들의 아버지』 | ||||||||||||||||||||||||
정 지 창 (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 | ||||||||||||||||||||||||
1940년대에 태어난 일련의 작가들은 남북분단과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면 김승옥(1941〜), 이문구(1942〜2003), 김원일(1942〜), 김성동(1947〜), 이문열 (1948〜)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하다 처형되거나 월북함으로써 극심한 가난과 더불어 ‘빨갱이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소외의 성장기를 거쳐 문학에 입문한 다음,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아 아버지와 자신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숱한 작품을 통해 형상화하였다. 물론 이들 분단작가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는 시각과 문학적 형상화 방식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거칠게 나누면 김승옥과 이문열은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다 길을 잃은, 어리석은 시대의 미아로 보는 반면, 이문구와 김원일, 김성동은 아버지를 분단체제 속에서 희생된 휴머니스트이자 이상주의자로 받아들인다. 김승옥은 자신의 아버지를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해왔지만, 김원일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아버지의 이미지를 투사한 인물들을 형상화하였다. 분단시대의 작가들은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형상화하든, 회피하든 분단 의식과 분단 상황을 드러낸다 요컨대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든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하든가, 그 방식은 다를지언정,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들의 창작과정에서 핵심적인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검열과 작가 내부의 자기 검열이 일상화된 분단 상황 속에서 작가는 어떤 인물을 형상화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자신의 의식과 시대상황을 드러낸다. 김승옥이 아버지를 형상화하지 않은 것 자체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이미지와 자기 검열의 표현인 것이다. 어떤 점에서 김승옥은 아버지라는 존재와 그의 시대를 외면하고 부정하려 안간힘을 쓰다가 그 심리적 중압감과 의식의 갈등 때문에 소설 창작 자체를 포기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김원일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분단문제와 아버지의 존재 또는 부재를 끈질기게 형상화함으로써 분단의 모순과 시대적 상황을 개관적으로 응시하면서 아버지와의 심리적 거리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화해와 용서를 통해 분단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성공한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분단시대의 작가는 어떤 인물을 형상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작가의 의식과 시대상황을 드러낸다고 말했는데, 평론가 김윤식은 이문구의 연작소설 『우리 동네』를 예로 들어 이러한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1977년에서 1981년 사이에 발표된 『우리 동네』 연작에는 「우리 동네 김씨」에서 시작하여 「우리 동네 이씨」, 「우리 동네 최씨」, 「우리 동네 정씨」,「우리 동네 장씨」, 「우리 동네 조씨」 등 모두 7명의 우리 동네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성씨 분포로 보아 「우리 동네 이씨」 다음에 「우리 동네 박씨」가 나오는 것이 순리겠지만, 작가는 이상하게도 「우리 동네 최씨」로 건너뛰고 만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유신 시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우리 동네 박씨」를 빼놓은 자기 검열의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1980년 이후에 「우리 동네 전씨」를 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하고 남들 뒤를 따라가다가 죽음에까지 이른 아버지“의 트라우마, 김승옥 김승옥의 경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그의 아버지는 1948년 이른바 여순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다. 그가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그는 50년이 지난 후에야 이와 관련된 일화를 털어놓는다.
오답을 정답으로 알고, 아니면 정답이라는 확신도 없이 그저 남의 뒤를 따라가다가는 아버지처럼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조숙한 소년의 상황인식이야말로 평생토록 김승옥을 따라다닌 트라우마였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한 성장소설, 「건(乾)」 그는 대학 시절인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생명연습」이 당선된 직후 동인지 『산문시대』에 「건(乾)」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소설 속의 시점은 6·25가 터진 2년 후인 1952년이고 작중 화자(話者)인 소년의 아버지는 죽은 빨치산이 아니라 돈을 받고 빨치산을 묻어주는 ‘식육조합원’이다. 소설 속의 상황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자신의 체험을 작품 구성의 부분적 소재로 삼아 전혀 다른 상황과 인물을 설정하여 일종의 성장소설로 만든 것이다. 이 작품에는 이른바 ‘감성의 혁명’을 일으킨 그 후의 작품들, 가령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보이는 부조리극 같은 말장난이나 강제된 질서로부터 일탈한 자유분방한 개인은 보이지 않는다. 문체도 전통적인 서사 기법을 고수하고 있다. 어느 늦가을 저녁,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겨울을 날 물자를 약탈하기 위해 시를 습격했다가 퇴각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벽돌공장에서 총 맞아 죽은 빨치산 시체가 발견된다. 국민학교 6학년인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구경을 간다.
소년의 눈에 비친 빨치산의 모습은 상상 속의 용맹무쌍한 전쟁기계도 아니고, 신념으로 단단히 뭉친 투사도 아니다. 그저 만취되어 길가에 쓰러진 거지 꼬락서니다. 사람들은 액땜을 하듯 침을 뱉고 시체 곁을 지나칠 뿐이다. 그 빨치산이 고통 속에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순간을 정확하게 지켜본 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벽돌 더미였던 것처럼 소년은 느낀다. 소년의 아버지는 약간의 품삯을 벌기 위해 시체를 매장해주는데, 소년은 관을 파묻을 때 구덩이 속으로 돌을 팔매질하듯 던져 넣으면서 관 속의 시체가 비명을 지르기를 바란다. 잠시 후 소년은 소중한 처녀의 순결이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형과 그의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 동네 이웃의 윤희 누나를 빈집으로 유인하는 음모에 가담한다.
소년은 이제 약간 섭섭하지만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소중했던 것을 먹칠하고 새로운 단계로 한 발짝을 내디딘다. 그는 전쟁의 잔혹성과 이념의 순결성, 죽음의 고통과 연민 같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면서 “시체를 파묻듯이” 간단하게 과거를 정리하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리고 냉정한 사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하늘의 이치란 인간에게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이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고 돌고 돌 뿐이다. 노자가 말하는 천지 불인(天地 不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이 소년의 의식의 성장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제목이 「건(乾)」인 것은 이러한 무미건조한(드라이한) 건곤의 이치, 즉 하늘의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작가 김승옥은 아버지의 죽음을 작품 속의 소년처럼 간단하게 파묻어버리고 냉혹한 현실을 꿋꿋하게 헤쳐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도 마음이 여리고 자의식이 강한 작가였다. 그는 앞서의 ‘문학적 자전’에서 남들의 눈에는 역겨워 보이는 풍경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미안을 타고난 대신 “사회인으로서 도덕적인 분노의 능력은 마비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염려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미의 세계를 얻은 대신 도덕의 세계를 잃었다면 결코 풍요한 삶은 아닐 것”(앞의 책 158쪽)이라고 그 이유를 덧붙인다. 1970년대에 친구인 김지하가 ‘사회인으로서의 도덕적 분노’ 때문에 옥에 갇혀 있을 때 김승옥은 구명운동에 나서면서 자신이 소설 따위나 쓰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자의식 때문에 한동안 소설 창작을 접고 영화 시나리오 집필로 생계를 꾸려간다. 1980년에는 동아일보에 장편을 연재하다가 광주항쟁이 터지자 집필을 중단한 다음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기독교에 몰입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로 망명한다. 환한 달의 이면에 어두운 뒷그늘이 있듯이, 이러한 자의식과 결벽증은 그가 1960년대에 「서울, 1964년 겨울」, 「무진 기행」 같은 작품에서 펼쳐 보였던, 공허하지만 화사하고 풍요롭고, 재기발랄한 심미적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의 가장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한 언어감각을 가진 작가가 바로 분단의식의 장벽에 막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형상화하지 못함으로써 치러야 했던 어쩔 수 없는 대가가 아니었을까?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위한 진혼곡, 김원일의 『아들의 아버지』 김원일은 경남 진영에서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좌익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6·25 때 월북함으로써 가족 이산과 가난의 고통 속에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래, 자신의 가족사와 분단의 고통을 줄기차게 작품으로 형상화한 작가이다. 분단의 고통을 문학 창작의 에너지로 삼는 작가는 흔하지만, 김원일처럼 혼신의 공력을 쏟아 평생 일관되게 같은 주제를 붙들고 가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김원일은 한국현대문학사의 대표적인 분단작가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탄생 1백 주년(2014년)을 앞두고 “아버지의 시대와 그 아들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나이 일흔을 넘겨서야 쓰게 되었다.” (김원일, 『아들의 아버지』, 문학과지성사, 1913, 머리글) 작가는 자신과 삶의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행로가 정반대인 아버지를 시대의 질곡 속에 패배한 이상주의자로 이해하면서 “누구도 그 자리에 대신 앉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아버지’”를 위한 일종의 진혼곡으로 이 책을 바치고 있다. 그가 보는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작가는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르포 식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자신이 태어난 이후의 생활사를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억을 조합하여 재구성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행적도 어머니의 시선이나 아들의 사선으로만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김원일의 아버지 김종표(1914〜1976)는 경남 진영 출신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로 울산 출신의 빈한한 유생 집안의 막내딸로 신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어머니(1915〜1980)와 1935년에 중매로 결혼했다. 아버지가 작고 마른 체형에 낭만적인 예술가형인 반면, 어머니는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과묵하고 강직한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다운 애교가 부족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니와 맞지 않아 일본 유학생 출신의 신여성과 바람이 나서 부산에서 딴살림을 차린다. 아버지는 급기야 이혼을 요구했으나 외삼촌들의 강력한 반대로 별거 상태에서 큰아들인 김원일이 1942년에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유전적 내력을 이렇게 객관화하여 서술한다.
아버지는 유학시절 문학 창작에도 손을 댄 문학청년이었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열렬한 운동가였으나 결혼 전 10대부터 여성 편력을 시작할 만큼 바람기가 많은 한량이었다. 그러면서 본처에게서 1녀 3남을 낳고 신여성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하나 두었으며, 월북 후에도 1남 1녀를 낳았다. 일제시대부터 감옥을 다녀오고, 해방 후에는 지역의 존경받는 애국자로 문화운동에도 나섰으나 곧 수배자로 쫓기는 몸이 되어 서울로 피신했다가 체포된다. 결국, 6·25가 터지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하여 인공 치하에서 당 간부로 활동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후에는 박헌영 일파의 남로당 출신들이 숙청될 때 온갖 사상검증과 재교육 과정을 거치며 고생하다가 결국 병으로 죽고 만다. 어머니는 ‘사상과 계집질에 미쳐 식구를 내삐린 서방’을 둔 탓에 툭하면 고문과 검문을 받고, 가정적으로는 반소박을 맞아 시앗과의 갈등(어떤 때는 남편이 진주 기생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은 물론이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평생 짐으로 안고 산다. 그리고 전쟁 통에 자식들을 피난시키고 먹여 살리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한다. 특히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서울에서 진영으로 어린 남매 둘만 떠나보낼 때의 정경은 눈물겹다. 인공 치하의 서울과 피난길의 허기와 궁핍은 여덟 살 소년 김원일의 기억에 깊숙이 각인되어 그 후 창작의 모티브로 작동한다.
그가 다시 가족들과 만나 대구에서 살게 된 뒤의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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