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론의 첫 제사 2 / 백성들을 위한 제사와 영광
레 9:15-24
15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를 가져다가 잡아 전과 같이 죄를 위하여 드리고
16 또 번제물을 드리되 규례대로 드리고
17 또 소제를 드리되 그 중에서 그의 손에 한 움큼을 채워서 아침 번제물에 더하여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8 또 백성을 위하는 화목제물의 수소와 숫양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제단 사방에 뿌리고
19 그들이 또 수소와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콩팥과 간 꺼풀을 아론에게로 가져다가
20 그 기름을 가슴들 위에 놓으매 아론이 그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21 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았더라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 9:15-24 / [백성들을 위한 제사] 아론은 또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을 드렸다. 먼저 허물을 덮어 달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가져온 염소를 끌고 가 잡은 다음 속죄제를 올리고 16) 번제물도 규정대로 드렸다. 17) 그런 다음 아침마다 드리는 번제물과 함께 곡식제물을 한 움큼 집어내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 18) 그리고 백성이 화목제물로 바치는 수소와 숫양을 잡았다. 아론의 아들들이 이 제물의 피를 받아 바치자 아론이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렸다. 19) 또한 수소와 숫양에서 떼어 낸 기름 덩어리, 곧 꼬리 부분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내장을 뒤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허리 양쪽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간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를 아론의 아들들이 가져오자 아론은 그것을 받아 20) 희생제물의 가슴 부위 위에 올려 놓은 다음 그 기름 덩어리를 번제단으로 가져가서 모두 불살라 바쳤다. 21) 그리고 가슴 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는 모세가 명령한 것처럼 여호와께 특별히 드린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쳤다. 22) [아론이 축복하다] 아론은 이렇게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나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고는 번제단 계단을 내려왔다. 23)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자 여호와의 찬란한 영광이 온 백성 앞에 나타났다. 24) 불길이 여호와에게서 솟아 나와 제단 위에 드린 번제물과 기름 덩어리를 살랐다. 온 백성이 이 모습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먼저 자신들을 위해 제사를 드린 아론은 이제 진정한 제사장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백성을 위한 제사, 속죄제(15) 속죄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표적이 빗나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대와 목표하신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고 판단될 때, 원래 상태로의 회복을 위해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수송아지로부터 시작해서 비둘기 두 마리, 고운 가루까지 지극히 가난한 사람도 제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경제 형편과 무관하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레 4-5장). 구약시대에는 속죄제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았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습니다.
백성을 위한 제사, 번제와 소제(16-17) 번제가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라면,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의 소(素)는 곡물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밀이나 보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소제는 기본적으로 고운 가루로 준비해야 했습니다(레 2장).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면 고운 가루가 될 수 없습니다. 소제의 제물을 준비하는 시간은 자신의 위선을 벗고 자신의 자아가 깨어지는 시간입니다. 고운 가루의 곡식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제물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제사, 화목제(18-21) 화목제는 모두 불살랐던 번제와 달리 내장 쪽 기름과 콩팥, 간만 불살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동물의 부위 중 가장 기름지고 비옥하다고 알려진 부위(시 63:5)는 하나님께 드렸지만, 고기는 태우지 않았습니다. 수고한 제사장에게 가슴살 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를 주었고, 나머지 고기는 집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제사자는 돌려받은 고기를 타인과 나눠 먹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즉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도록 제물을 나누는 제사가 화목제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제사(22-24) 제사를 마친 후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에서인지 지성소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제사의 응답, 하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 후에는 달라진 모습으로 집에 있는 가족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 후에는 세상 사람이 알 수 있는 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참고 히 11:20; 고전 14:25)
적용: 당신 입술의 찬양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어디서 봉사를 해보기 전에는 재능을 발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봉사를 시작하십시오.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재능이 발견됩니다. 가르쳐보기도 하고, 그룹을 인도하고, 사무를 돕기도 하고, 악기도 다루어보고, 십대들과 같이 일을 해보기 바랍니다. 해보지 않고는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은사를 발견하고 사역에 임하는 것아 아니라 사역을 통해 은사를 발견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 설 교 >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위기 9:22~24 / 고신일 목사
레위기 9:22~24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위기 9장 22~24절>
[목회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들을 불러 주시고, 예수 믿는 이유 하나로 자녀삼아 주심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언제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이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구별된 삶의 주인공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으로 실천할 결단을 하기 원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군에 있는 자녀들, 추운 곳에서 일하며 사는 이들 …
도로 위에서 운전하며 … 하늘을 날고,
바다 위를 항해하며 사는 이들 … 위험한 기계를 다루는 이들 …
이런 저런 다양한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으로 함께 하옵소서.
원치 않는 병과 사고로 병상에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객지, 외국으로 흩어져 지내는 이들,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곳곳에서
우리 예배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들 모두에게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허락해 주옵소서.
말씀 전하는 종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치료와 회복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3 ‧ 1절이 다가오니 꽃꽂이위원들이
강단 꽃 장식을 예쁘게 무궁화와 태극기로 장식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급하고, 잘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비행기 정비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다고 하면 화를 내며 항의합니다.
비행기 정비를 꼼꼼히 해야지 그냥 탔다가 무슨 일 나면 어떡합니까.
제가 미국에서 살았을 때 공항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었습니다.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는데 비행기 정비를 해야 한다고
아침에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호텔에 갈 상황도 되지 않아서 공항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대부분 공항에서 잤습니다.
우리나라였으면 어땠을까요? 난리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을 줄 모르고 기다릴 줄 모릅니다.
옆의 분과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자”인사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리 지르며 …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되어 있고
구약 39권은 929장 신약 27권은 260장으로 <총 1,189장>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 등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수가 많은 장도 있고, 적은 장도 있습니다.
그 중에 레위기는
- 복잡합니다.
-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 낯선 용어들이 많고 읽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잠이 오지 않을 때
레위기를 읽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에는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지파’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방법과
제사 때 제사장들이 지켜야 했던 여러 율법들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필요한 ‘예배법’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 『비전 성경 사전』 (서울: 두란노서원, 2001), pp.308~311. 참조. >
번제와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던 모세는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위임식을 거행했습니다. (레 8:1~36)
그리고 그렇게 제사장이 된 아론과 함께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제사를 거행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론이 …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 9:22)
- 속죄제(sin offering)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가장 중심적인 제사였습니다.
- 번제(burnt offering)는 ‘제물을 태울 때 불꽃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드러내는 제사로
제물의 각을 떠 각 부위를 깨끗이 씻은 후
<각을 뜬다는 것은“갈기갈기 찢다, 쪼개다, 자르다”의 의미>
그 모두를 단 위에서 불살라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 화목제(peace offering)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유지하고자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 김은혜 외, 『성서 다시보기』 (서울: 숭실대학교 출판부, 2009), p.120. 참조. >
이와 같은 제사들을 마친 아론과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다 나온 후 백성들을 축복할 때였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 ”(레 9:24)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희생 제물들이 있습니다.
소, 양, 염소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싼 것이냐 싼 것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최대한의 정성을 기울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말라기 1장 8절에 “온전함이 결여된 것이 어떤 모습인지”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정성이 담긴 제물을 드렸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임해 모두 다 태워버렸습니다.
<존 하틀리, 『WBC 성경주석 (4) : 레위기』 (서울: 솔로몬, 2005), p.315. 참조. >
제물이 불에 탄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 9:24)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린 현장을 목격하고서 왜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갑자기 일어난 일에 깜짝 놀라서? 재앙과 난리가 일어난 줄 알고 무섭고 두려워서?
그래서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을까요?
우리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고만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 they shouted for joy …”(NIV)
그들은 기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레위기가 읽기 어려운 말씀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각종 제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해하거나 실천하기에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을 잡아서 제물로 태우는 제사 행위가
사람을 유쾌하고 신나게 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현상도 불꽃놀이를 구경하듯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이 제단에 임했을 때
그래서 제단에 있는 제물들을 다 태웠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 때문에 즐거워 소리를 질렀습니까?
불이 나타나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태움으로
그들이 제사를 드린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갈라놓았던 죄가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불에 타는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이 불에 타는 제물이 되는 것을 받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임에 감사했고 …
즐거이 소리 질러 기뻐하며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 마이크 메이슨, 『내 영혼의 샴페인』(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p.36. 참조. >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지금 예배 시간 후에 바로 사형당할 사형수 한 사람이 있고,
또 이 예배 마치면 무인도로 평생 귀향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예배 중에 하나님이 사면을 내리셔서 사형당할 사람이 안 죽어도 되고,
귀향 가야 할 사람이 귀향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냥 무덤덤하게 ‘고맙네. 고마워’라고 할까요?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죽을 뻔한 상황에 처했다가 안죽어도 된다고, 사면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
소리 소리 지르며 좋아하며 사방에 전화해서‘나 안죽어도 된다고, 사면 받았다고’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 받은 기쁨, 관계 회복의 감사가
소리 지를 만큼 좋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 이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은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새 옷과, 신발을 사줄 때는 월요일에 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부터 새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라고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용돈을 줄 때도 주일 아침에 주고, 주일에 아이들 야단치지 마세요.
주일은 신나고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은 은혜의 날, 기쁨의 날, 감사의 날입니다.
예배의 기쁨
회개는‘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행위’를 뜻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되새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이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마 3:2)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성령을 얻기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자신의 행동을 회개했습니다. (마 26:75)
그러나 행동을 뉘우친 것으로만 보자면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후에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마 27:3)
괴로워하고 슬퍼한 것은 베드로나 유다가 같았습니다.
두 사람 다 감정적으로는 슬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회개는 감정적으로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 감정적인 변화, 정서적인 슬픔이 물론 뒤따릅니다. (情的 회개)
- 그러나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知的 회개)
- 또 하나님을 위한 행동의 변화 …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意志的 회개)
그러므로 올바른 회개는
지(知), 정(情), 의(意) 세 요소가 모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2011년 2월 14일 국민일보 31면 ‘오늘의 설교’ 참조. >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 51:16~17)
그런데 성경을 이 문장만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절에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길은 막히고 날은 춥고 고생고생해서 내려갔는데
‘고생들이 많다. 다음엔 오지들 말어’라고 했다고 다음에 정말 안갑니까!
‘고생들이 많다만 다음에도 또 와 ~’하는 말입니다.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말은 ‘바른 제사를 드려라 너희의 마음이 들어있는
제대로 된 제사가 아니면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즐거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방대한 제사 제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를 도살해 죽임으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기 위해서일까요?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값은 죽음으로 치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이 치러졌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가
- 죄가 사해졌다는 기쁨
-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평안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제사 제도의 모든 복잡한 규정들은 피조물인 우리가 구체적인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씻음 받아, 용서 받은 세상 최고의 즐거움을 갖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회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의 의무 / 책임인 것입니다.
< 마이크 메이슨, 『내 영혼의 샴페인』(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p.37. 참조. >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던 제사에하나님의 불이 임하셨듯이
자신이 고백한 죄가 타 없어지듯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에서 임한 불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지르며 기뻐했던 것처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 우리도
예배드린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왔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의 기쁨
어떤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 생각하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한평생 이렇다 할 큰 죄를 지은 게 없다고 여기며
자신에게 만족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지혜롭기로 소문난 선생을 찾았습니다.
선생은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을 잠시 듣고 각기 다른 지시를 내렸습니다.
-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던 사람에게는
밖으로 나가 가장 큰 돌 하나를 찾아오도록 시켰고
-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작은 돌을 많이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두 사람이 지시대로 돌을 가져오자 이번에는 선생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요구했습니다.
“가지고 온 그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 자리에 놓고 오시오.”
가장 큰 돌 하나만 들고 왔던 사람은 돌이 있었던 곳에 가서 금방 제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많이 주워왔던 사람은 어느 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두 사람에게 선생이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도 그렇소. 내가 지은 죄를 크게 여기고 그 부담을 지고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통해 죄의 무게를 내려놓은 기쁨을 누릴 수 있소.
그러나 죄가 작다 해서 무시하고 있다가는 그 죄를 덜어버릴 방법마저 잃어버리게 된다오.”
<홍자성, [추만호, 채근담을 노래하다] (서울: 다차원북스, 2014) p.121. >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를 짓지 않는 것 … 다른 하나는 지은 죄를 모두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안짓고 살 수 있나요?
제가 요즘엔 조금 달라졌지만 … 아주 깔끔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깨끗이 씻고, 깔끔하게 다림질 된 셔츠를 입고 왔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가보면 셔츠 목 뒤에 때가 껴있습니다.
깨끗이 빨아 입고, 빳빳하게 다림질해도 때가 묻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깔끔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았다 해도 우리에게 허물과 죄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죄인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 3:23)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시간이 많은데 천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세 인생을 말하지만 우리 인생이 어디까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스웨덴의 관습과 민속에 대하여 글을 남긴 16세기 스웨덴의 성직자
올라우스 마그누스(Olaus Magnus, 1490~1557)는
같은 새라도 다른 지역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가 있는 지역에 사는 새들이 더 빠르게 난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위도상 북쪽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
특히 겨울에 낮 시간이 3시간도 채 안 되게 짧다는 것을 알고
그만큼 더 서둘러 둥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 토마스 왓슨, 『회개』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p.97~102. 참조. >
우리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래 오래 사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날마다 씻김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곧 하늘 백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렸을 때 / 예배 드렸을 때 … 하나님은 불로 제단에 임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하며 소리질렀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드린 기쁨이, 사함 받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리 지르게 했던 기쁨과 즐거움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 일터에서 … 계속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도 실수하고 잘못합니다.
그러면 용서를 구하세요. 받지 않으면 그 사람 잘못입니다.
용서 해주고, 용서 받읍시다.
하나님께 회개한 증거가 즐거움입니다.
용서 받은 즐거움입니다. 털어버린 즐거움입니다.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어디에 있든지 … 어느 때든지 … 용서받은 즐거움과
감격을 누리며 사시기를, 즐거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위임받은 두 제사장의 죽음
레위기 9:22~10:7 / 피영민 목사
서 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지파인 아론은 모세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형이었습니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레위에게 게르손, 고핫,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둘째 아들 고핫을 택하여 맏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고핫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인 아므람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레위의 증손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셨는데, 그는 언변이 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 아론을 택하셔서 대변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23절에 따르면 아론이 부인 엘리세바와 결혼한 것은 애굽에 있을 때였고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나답, 둘째가 아비후, 셋째가 엘르아살, 막내가 이다말입니다.
그런데 이 네 아들 중 첫째, 둘째 아들이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레위기 10장 2절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얻었는데, 이것이 그의 두 자녀들에게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등이나 4등정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어도 대재벌이 되는 것보다 동네 부자 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죠. 재벌이 되면 본인도 피곤하고 자식들도 피곤합니다. 제가 군 생활하면서 배운 중요한 교훈 한 가지는 “중간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맨 앞줄에 서 있다가 맞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아론이 아주 높아지는 바람에 두 자식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네 아들은 여러 가지 영적인 복을 받았는데,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문의 복입니다. 가문이 영적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남들이 체험할 수 없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신라시대 성골과 진골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비상한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만나는 복입니다. 출애굽기 24장 9~10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칠십 인의 장로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천국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셋째는 특별한 의복을 입는 복입니다. 출애굽기 28장 40~43절에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고의와 흰색 원피스로 된 속옷을 입고 띠를 띠는 제사장 복장을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답과 아비후를 영화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8장에서 7일 동안 이스라엘 온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사장 안수식을 받게 되었고, 9장에서는 공적 제사장으로 위임받아 첫 번째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이런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일하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구약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장 4절에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고 무자하였고 엘리아살과 이다말이 그 아비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민수기 26장 61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역대상 24장 2절에도 “나답과 아비후가 그 아비보다 먼저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식도 없이 죽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자식이 있었으면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가게 되었을 텐데, 그들은 무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식이 없이 죽으면 족보에서 제명당합니다. 그러니까 나답과 아비후는 족보에도 기재되지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여호와 앞에서 죽었습니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불에 타 죽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된 이유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교훈과 경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특권과 경험이 많이 있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으로 불순종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Ⅰ. 현장즉사하게 된 나답과 아비후의 죄
나답과 아비후의 죄는 언뜻 보면 큰 죄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편을 들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지만, 나답과 이비후가 죽고 난 이후에 모세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들의 죄가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0장 3절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자’라고 제사장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Separation)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애굽의 여느 잡신들과 구별된 분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은 바로 이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답과 아비후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나 애굽에서 본 신들이나 다 비슷하고, 별반 다를 것이 있겠는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분향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본 애굽의 신들은 제사장이 제멋대로 분향하고 제사해도 진노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태도가 용인된다면 일반 백성들도 나답과 아비후처럼 생각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섬기지 않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론의 네 아들 중 왜 첫째와 둘째 아들만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첫째, 둘째 아들이 셋째, 넷째 아들보다 애굽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기 때문임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청장년 시절을 애굽에서 보냈고, 어려서부터 애굽에서 받은 교육의 환경이 이들의 사상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어린 자녀들을 향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옳은 사상을 배우면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릇된 사상을 배우면 장성해서도 그릇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발견한 두 집단이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 가톨릭입니다. 미국에 가 보면 천주교는 천주교 초등학교를 만들어서 자기 자녀들을 모두 그곳에 보내어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생활을 익히고 배워 일평생 천주교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집단은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켜 커서도 자유민주주의 시민이 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공산주의 전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의 현장사망을 통해 자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답과 아비후가 지은 구체적인 죄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는 ‘교만의 죄’(Sin of Pride)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방식대로 하나님께 접근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 방식대로 함부로 접근한 것입니다. 제멋대로 접근해도 하나님이 자기를 맞아주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꼭 제사라는 방법,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불로 분향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를 맞이하려 하십니까? 우리 뜻대로, 우리 생각대로 해도 받아들여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라는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꾸짖는 오만불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위에 올라서서 어른 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자기들을 우러러 보니 마음 속에 큰 교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갖고 일하면 형통하게 됩니다. 방자한 태도와 교만한 행위를 보이면 그 사람은 반드시 거꾸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로 천국에 이르려는 세상 모든 종교의 근원에는 인간의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정해 놓은 방식대로 나아가려는 교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영원한 멸망이요,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각각 다른 길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두 나답과 아비후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불이 나와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건방짐의 죄’(Sin of Presumption)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고, 아버지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분향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대제사장에게 지시하시지 제사장인 아들들에게 지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아버지를 제쳐놓고 분향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똑바로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매우 시건방진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5장 30~31절에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30절의 ‘짐짓’이 바로 ‘시건방지게’라는 뜻의 부사 ‘Presumptuously’라는 단어입니다. 이들의 건방짐의 정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온전히 끊쳐진 것입니다.
셋째는 ‘왜곡의 죄’(Sin of Perversity)입니다. 바른 태도가 아니라 삐뚤어진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분향을 하려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만든 분향단에 해야 합니다. 분향단은 성소 내부에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0장 1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각자 자기 향로를 가져와서 여호와께 분향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지도 않았는데 분향했고, 자기가 임의로 가져온 향로를 사용했습니다. 분향해야 할 아침저녁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불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주신 번제단의 불을 사용하지 않고, 임의로 만든 불을 사용하였습니다.
레위기 10장 4절에 “모세가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메어 가라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죽은 장소는 ‘성소 앞’이었습니다. 분향은 ‘성소 안에서’(Inside of the sanctuary) 해야 하는데, ‘성소 앞에서’(Outside of the sanctuary) 했습니다. 뭐 하나 똑바로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삐뚤어진 성격을 가져선 안 됩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지 삐딱하게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제멋대로 나아가도 내버려두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나답과 아비후가 받은 벌
2절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켰고, 이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불이었다면 옷이 먼저 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의 옷은 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5절에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옷은 그대로 있었고 몸만 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삼킨 불은 우연히 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을 삼킨 불은 레위기 9장 24절의 불과 같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같은 불이 어떤 경우에는 번제물을 사르는 불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사르는 불이 되기도 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서 번제물을 살랐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받아주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입니다. 불이 제물을 살랐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한 단어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이 복음을 거부하고 다른 불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불은 멸망과 심판의 불이 됩니다. 복음은 죄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용서를 받아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복된 말씀이지만 뒤집으면 이렇게 엄청나게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불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이 되듯이 여호와 앞에 죽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심판은 합당한 죗값이었습니다. 죗값이 사망이라는 것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대원리입니다. 죄를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아론의 반응
이 두 아들의 죽음 앞에 선 아버지 아론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레위기 10장 3절 후반에 보면 아론이 잠잠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는데도 아버지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공의롭게 심판하셨기 때문에 반항하는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론의 인간적인 슬픔까지 막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6절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 두 명이 죽었다고 아버지가 모자를 집어 던지고 옷을 찢으며 “대제사장 못해 먹겠다! 그래도 제사를 드리려고 한 아들들인데...”라고 했다면 아마 아론도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아론이 잠잠했던 것은 죄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죄인들과 동조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죄인들이 받을 심판에 함께 참여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모세가 분명히 그 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마음으로만 슬퍼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반항하는 말이나 비판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내 가족들이 지옥에 가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후일에 천국에 가면 부자가 나사로를 향해 물 한 방울 찍어 달라고 애원했듯이 자신들을 바라보며 고통 받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찌 내 가족들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으며, 이렇게 까지 하실 수 있느냐?”며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론이 아들들의 죽음 앞에 잠잠했다는 것을 보면 그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바에야 천국에 가는 것이 무슨 기쁨이 될까?”라는 생각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서 잠잠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두 가지 속성은 바로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오해하고 거짓된 교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과 같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만인구원설을 근거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신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며 거짓말하고 잘난 척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소위 ‘Missio Dei’(미시오 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을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고 모두 천국에 보내실 것이니 공연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공산 혁명을 일으킬 때 교회가 헌금을 가지고 이들을 지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방신학입니다.
만인구원설은 결국 공산주의와 결합된 것입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자유주의신학에 공산주의까지 결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출범하게 된 것이 바로 ‘WCC’(세계교회협의회)입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용어가운데 교회의 사명을 ‘인간화’로 표현합니다. 사람을 속이기 딱 좋은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도 ‘휴머니즘’, ‘내셔널리즘’입니다. 민족끼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방신학, 민중신학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고, 여기에 빠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고 공의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내버려 두시고 아무나 천국으로 받아주시는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사랑과 공의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를 지키는 원리도 사랑과 공의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결합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결론
사람의 영혼이 교만과 건방짐에 지배당해 진리와 복음을 왜곡하면 멸망밖에는 오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불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됩니다. 레위기 9장 24절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이라는 혈통이나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나답과 아비후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혈통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행동 자체도 결코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받으시는 예배
레 9:22-24, 요 4:19-24 13.1.13 / 오세원 목사
성도 여러분, 만약에 오늘 이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마음이 좋을까요. 장로회신학대학예배학 교수로 지내시다가 지난해 연말에 인천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이기도 한 주승중 목사님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 다섯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구원의 은총에 감격과 감사로 응답하지 않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먼저 우리를 찾아와주셨고, 지금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읽은 신약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상종도 하지 않았던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에 응답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나오신 것은 은혜 받으려고 나온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난 한주간 삶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감사한 마음을 갖고 그분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주일 낮 공동예배입니다. 이런 예배여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 현장에서 이런 감격스러운 응답의 행위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죄인을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총에 있습니다. 구원의 은총에 아무런 감격과 감사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조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항상 무엇인가 받으려고만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예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서비스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예배는 과연 누구를 향해있는 예배인가. 하나님인가. 나 자신인가를 분명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동기의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매일, 그리고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있는 것인가. 그저 습관적으로 예배드리지는 않는가. 혹 헌물을 드릴 때 인색한 마음으로, 내가 이만큼 바치니까 하면서 더 큰 것을 받기 위해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자세가 참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는 헛된 예배가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입니까.
네 번째,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두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여러 번 책망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렸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 하나님 앞에 감격스런 마음으로 나아와 일치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없었습니다.
미가서6:6-8절 말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많은 헌금을 드린다 하더라도 삶이 수반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두 마음으로 예배드리면 받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는데도 대중가요 생각이 나든지, 기도를 드리는데도 집중되지 않고 다른 생각이 들든지, 헌금을 드리면서도 그 마음에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중이 안되면, 생각이 온통 주님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합니다. 예배 끝나면 할 일과 감당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예배드린 후의 약속이나 집안 일, 또는 사업 등에 온통 사로잡혀 있을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회개(참회)치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드시 죄의 문제가 해결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란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사람입니다. 삶속에서 발생한 문제 중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흠양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드린 제사 종류중에 반드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죄가 가려있으면 기도도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인데 감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5: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교회는 항상 예배 앞에 ‘참회의 기도’순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회개없이 그대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받으시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참회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배 10분정도는 일찍 오셔서 한주간 아니면 몇일간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은 감격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우상섬기는 모습보다도 더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정성보다도 정성이 덜 들어가서 되겠습니까?
시편96년 7-9절 말씀,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예배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제물로서 드려야 합니다. 산제물로서 거룩해야 하며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예배의식 따로 삶 따로 하는 것으로는 드려지는 예배가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성결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선한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 곁에서 낮에 물 길러러 나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없었고,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목이 말라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과는 만나면 안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여 유대인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당신은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여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여자가 다시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1-12절).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다시 수가성 우물가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
여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하였고,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여자가 다시 예수님에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 이야기를 하는데 예배장소를 언급합니다. 20절 말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서 조상들이 하나님께 예배한 산은 ‘그리심산’을 말합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예배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예배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교회에서 드렸느냐 가정에서 드렸느냐, 아니면 높은 산위에서 드렸느냐, 동굴에서 드렸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육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형식의 문제보다는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구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은 예배의 순서에서 다른 한 요소가 빠졌느냐 더있느냐, 순서가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에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교감되어야 합니다. 영이 교감이 안되면 결국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많은 헌금을 가지고 화려한 예배당에 들어와서 앉아 있다 할지라도 그 예배는 받으시지 않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찾으신다고 하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코람데오”즉 ‘하나님 앞에서’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배드릴 장소를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외면하시지는 않습니다.
시편99:9절 말씀,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138:2절 말씀,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63:1-2절 말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예배당을 향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것에 덜 빼앗깁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려거든 특정한 시간인 주일날, 특정한 장소인 교회에서 먼저 예배하는 사람이 될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혼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을까요?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어디서나 영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 보셨나요? 교회는 모든 경건의 모체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의 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이 필요없다고 하여 의식을 파격적으로 변화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용기가 필요하듯이 예배도 의식에 담아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전혀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의식화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법처럼 여겨 그기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면 큰 일이 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의식이 예배자의 자발성을 억제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의식을 외관적으로만 지키고 마음의 진정한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면 위선이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사야1:11-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29:13 절 말씀,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셋째, 의식이 인간 중심으로 행하여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음과 이에 대하여 응답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어디까지나 예배자로 하여금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도록 고무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드려지는 의식이 아닌 의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배의 대상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제일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무슨 자리에 올랐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중에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예배가 종종 있습니다. 말은 감사예배입니다. 감사예배 맞습니다. 그런데 순서에 보면 하나님 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역대상16장25=29절 말씀, “ 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 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 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 / 러 나라의 종족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 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예배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는 어떤 자세가 가장 좋을까요?
지금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면 여러분의 자세는 겸손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만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팔장끼고 있는 것은 금물입니다.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그런 모습을 한다면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드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우리는 무릎을 꿇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다를 꼬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정좌 정시 정청해야 합니다. 바르게 앉아서 똑 바로 보고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 경배할 때 ‘머리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라는 구절이 많습니다.
창세기24:26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출애굽기4:31절 “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애굽기12:27절 말씀,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끝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의 마침입니다. 무슨 일이든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예배의 마무리는 축도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레위기9장에 있는 말씀을 봅시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23-14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축도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나가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축도가 끝날 시점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불이 임하여 제물을 태웠습니다. 우리가 축도하는 마지막 기도가 주어일 때 성령의 불이 임하여 예배를 완결시킵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오직 자신이 참여하여야 합니다.
기도는 대신해 줄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자신이 직접 드려야 합니다. 대신 드릴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예배를 회복하십니다. 예배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예배의 성공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