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김정호 - KIM JUNG HO LIFE (1983) : 1985년 33세 사망
KIM JUNG HO LIFE 앨범 앞면
김정호(본명 조용호)는 데뷔 초기엔 남성 듀오 4월과5월의 멤버로도 활동했고, 그가 작곡 작사한 어니언스의 노래들이 히트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74년 <이름 모를 소녀>를 히트시키면서 인기 가수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동안 대중 앞에 서지 못했다. 1979년 해금된 이후 활동을 재개했지만 군복무 말년에 걸린 감기가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요양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1983년 그의 유작이 된 앨범 「Life」에 수록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마지막 히트곡이다. 인천 결핵요양원 투병 당시 송도 해변을 걷는 여인을 보고 느낀 슬픔을 담은 처연한 멜로디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중음악과 국악의 접목을 시도하며 마지막 음악적 불꽃을 태웠지만 1985년 11월 29일 3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노래를 기리는 후배가수들의 추모 앨범과 추모 공연, 노래비 건립 등 추모 활동들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7)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1987) : 1987년 26세 사망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 앞면
유재하는 비록 단 한 장의 음반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음악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음악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찬사를 받아왔다. 한양대학교 작곡과 출신으로 순수 음악과 대중음악에 모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대학시절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활약하며 가요계에 처음 발을 디뎠다.
1987년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통해 클래식과 재즈의 화성학에 기반을 둔 세련되면서도 다채로운 악곡들을 작곡, 편곡과 연주까지 완벽하게 선보였다. 이 걸작은 발표된 직후에는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발표 3개월 후인 1987년 11월 1일, 그가 교통사고로 2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망 후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이 남긴 앨범 수익금을 바탕으로 1988년 유재하 음악장학회를 설립했고, 이 기관이 주관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통해서 이후 가요계를 대표한 여러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들이 탄생했다.
8) 최병걸 - 난 정말 몰랐었네/그 사람 (1978) : 1988년 38세 사망
난 정말 몰랐었네 / 그사람 앨범 앞면
트로트 고고 계열의 히트곡 <난 정말 몰랐었네>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병걸은 197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동한 인기가수였다. 1972년 안혜경과 함께 포크 듀엣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고, 정성조가 조직한 밴드 메신저스에서 보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당시 인기 미녀 탤런트 정소녀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자작곡 <그 사람>이 담긴 앨범이 공개된 후였다.
이 앨범에 함께 수록된 <난 정말 몰랐었네>는 그의 커리어를 단숨에 끌어올린 빅 히트곡이 되면서 MBC 10대 가수에 오르게 만들었다. 1980년대로 접어서는 더 이상 큰 히트곡을 만들지는 못하다가 1988년 11월 9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간암으로 별세했다.
9) 김현식 - 6집 내사랑 내곁에/추억만들기 (1991) : 1990년 33세 사망
KIM HYUN SIK VOL.6 앨범 앞면
1980년대의 대표적 남성 싱어송라이터 김현식은 한국 가요계가 너무나 빨리 잃어버린 보석 중 하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길을 시작한 그는 1970년대 후반 이장희의 눈에 들어 가수로 데뷔할 첫 기회를 얻었지만 이장희의 도미와 그의 대마초 흡연으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80년에 첫 앨범을 낸 후 동아기획의 소속가수가 된 그는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을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신촌블루스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폭음과 흡연, 과로 등으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1990년 11월 1일, 그가 아꼈던 후배 유재하가 죽은 지 3년 뒤 같은 날 그는 간경화로 33세의 일생을 마감하며 연예계에 ‘11월 괴담설’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후인 1991년에 발매된 그의 유작 앨범이 된 6집과 타이틀곡 <내사랑 내곁에>에 당대 대중은 아낌없는 찬사와 호응을 보내며 그를 추모했다. 또한 1991년 추모 콘서트와 추모 앨범 발매를 시작으로 10주기, 20주기를 기념하는 트리뷰트 앨범들이 계속 발매되고 있다.
10) 장덕 & 장현 -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 꼬마인형/순진한아이 : 1990년 28세, 35세 사망
예정된시간을위해 슬픈약속 나의공주님 앨범 앞면
꼬마인형 / 순진한아이 / 소녀와 가로등 앨범 앞면
뛰어난 음악재능을 보였던 장덕과 장현은 1976년 남매듀오 현이와 덕이로 공식 데뷔했다. 특히 장덕은 안양예고 시절에 진미령의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해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일찍이 선보였다. 두 사람은 함께 여러 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면서 청춘스타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미국에서 장덕이 귀국한 1980년대 중반 두 사람은 듀엣을 재결성해 잠시 활동했었다. 이후 장덕은 <님 떠난 후>의 빅 히트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1980년대 말 장현은 설암 진단을 받아 투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사로 인해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장덕은 오빠를 간호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울증이 재발했다. 1989년 발표한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결국 장덕은 1990년 2월 4일 수면제 등 약물 과다 복용으로 28세에 사망했고, 장현도 같은 해 8월 16일 35세의 나이로 동생의 곁으로 떠나갔다. 장덕의 영결식에는 50여 명의 가수들이 모여 그녀를 추모했고, 그녀의 유작들을 동료 가수들이 커버한 추모 앨범으로 발표되었다.
11) 김광석 - 일어나/서른즈음에 (1994) : 1996년 32세 사망
김광석 네번째 앨범 앞면
심금을 울려주는 보컬과 한국 포크의 계보를 잇는 음악적 행보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함께 받았던 김광석의 요절은 김현식에 이어 1990년대에 한국 가요계의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다. 대학생연합 노래 동아리 ‘메아리’의 멤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와 동물원을 거치며 <거리에서>와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등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겼다.
1989년 솔로로 독립해 4장의 정규 앨범과 2장의 리메이크 앨범, 1천 회가 넘는 소극장 콘서트를 통해 ‘가객(歌客)’의 위상을 얻었다. 그러나 1996년 1월 6일, 그는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어 음악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2008년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 위치한 노래비를 비롯해 2010년 고향인 대구 중구 대봉동에 ‘김광석 거리’가 조성되었을 정도로 그를 기리는 추모의 마음은 이어지고 있다.
12) 김재기(부활) - 사랑할수록 (1993) : 1993년 25세 사망
부활Ⅲ 앨범 앞면
김종서, 이승철을 포함해 현재까지 10명의 보컬리스트가 거치며 꾸준히 활동 중인 록 밴드 부활의 역사에서 제 3대 보컬리스트인 김재기는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였다. 교회에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부활의 리더 김태원과 만나 군 복무 후 부활 3집 녹음에 참여했다. 보컬 데모 트랙들을 녹음한 그는 1993년 8월 11일 밤에 운전 중 중앙선을 넘어온 다른 차량과 충돌한 사고로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보컬 트랙들로 발매한 부활의 3집에서 <사랑할수록>, <소나기> 등이 큰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이후에도 부활이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된 것에 김재기의 노래가 크게 기여했다. 앨범 발표 후 실제 활동은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가 대신해 팬들의 아쉬움을 달랬다.
13) 김성재(듀스) - 우리는 (1993) : 1995년 23세 사망
DEUXISM 앨범 앞면
1992년 등장한 듀스는 뉴 잭 스윙(New Jack Swing), 힙합 등 당대의 흑인음악 트렌드를 한국적으로 풀어내고 한국어 랩이 갖춰야 할 운율의 표본을 제시했다. 타고난 춤꾼으로 그룹의 패션과 콘셉트를 리드했던 멤버 김성재는 1995년 7월 듀스가 해체한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가 같은 해 11월 <...말하자면>으로 컴백해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 다음날인 1995년 11월 20일 새벽, 투숙했던 호텔 방에서 23살의 김성재는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몸에서 많은 주사바늘 흔적이 발견되어 초기에 경찰은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발표했으나 부검 때 발견된 동물 마취제 성분이 검출되면서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그의 여자 친구가 살해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의 사망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남겼고, 그의 빈소와 발인에는 수많은 소녀팬들과 동료 가수들이 찾아와 추모했다.
2. 그 외에 우리 곁을 너무 빨리 떠난 가수들 (1990년대 후반~2016년)
1996년 해외 교포 생활을 하다가 20세에 한국에 돌아와 <또 다른 시작>으로 하이틴 스타로 급부상 했던 서지원은 활동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한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20살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1994년 데뷔하여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로 스타덤에 올랐던 이원진은 1997년에 미국 LA에서 교통사고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000년 남성 아이돌 그룹 NRG의 김환성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 호흡기 감염으로 입원 8일 만에 19살의 나이로 사망해 팬들을 눈물짓게 했다.
2008년 언더그라운드 래퍼 출신으로 혼성 댄스 그룹 거북이의 리더로 활동했던 터틀맨은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38세에, 같은 해 보컬그룹 먼데이키즈의 김민수는 그룹이 막 대중에게 알려지던 시점에 오토바이 사고로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2013년, 울랄라세션의 리더로 위암 투병 중에 ‘슈퍼스타 K3’에 참여해 우승한 임윤택은 33살의 나이로, 2014년,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고은비(22세)와 권리세(23세)가 고속도로 차량 전복 사고로, 2015년에는 인디밴드 브로큰 발렌타인의 보컬 반이 휴가 중 33세의 나이로 익사해 우리 곁을 떠났다.
첫댓글 1985년에 33세의 나이로 김정호가 투병끝에 요절한 결핵요양원 자리에 지금은 적십자병원(연수구)이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산속에 결핵요양원 하나만 있었는데 지금은 변해도 너무나 변했고 인천의 연수구는 1990년 이후 탄생이 됐습니다.
운봉은 요즘 적십자병원에 두달에 한차례씩 내과처방을 위해서 방문하고 주에 2~3번은 적십자병원 옆에 위치한 공원에서 걷기운동을 하기도 합니다.(한바퀴 대략 1km)
김정호의
마지막 유언과 유작이다.
지금은 유언대로 금촌공원묘지에 잠들어있다.
유언
내가 죽거든 절대로 태우지 말고 묻어주세요.
앞이 환하게 내다뵈는 양지바른 언덕에 다 묻어주세요
유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https://youtu.be/kFNojSZ-r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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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 峰 박종태
김정호의 유작
"님"
https://youtu.be/ShasjTy39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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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보는 종태홍아로 부터 짱!!
평소에 당구실력 향상에 倍加의 노력을 기울이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