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무봉산(舞鳳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어 당시에는 만의사(萬義寺)라 하였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 정길(貞吉)과 현묵(玄默)이 중창하였고, 1312년(충선왕 4) 당시 천태종 진구사(珍丘寺) 주지였던 혼기(混其)가 주지로 부임한 뒤 크게 중창하고 법화도량(法華道場)을 열어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선(義璇)이 사세를 더욱 키웠으며, 충혜왕 때의 주지 묘혜(妙慧)는 요원(了圓)이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을 간행할 때 비용을 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때부터는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주지를 교대로 맡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 절이 사전(寺田)과 노비를 많이 소유하여 부유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두 종파간 다툼이 심해지자 노비를 모두 수원부(水原府)에 속하게 하고 절은 천태종이 관할하게 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공이 컸던 신조(神照)가 주지로 온 뒤부터 다시 노비를 받았으며, 사전 70결도 받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에 공이 큰 까닭에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도 비교적 사세를 크게 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이 이 절에서 수도한 바 있고,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제자 선화(禪華)도 이곳에 머물다가 1644년(인조 22)에 입적하였다. 1669년(현종 10) 절터가 송시열(宋時烈)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萬儀寺)로 바꾸었다. 1796년(정조 20)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이 절의 동종을 가져다가 팔달문(八達門)에 옮겨 달았으며, 1894년(고종 31)에는 지장전이 무너져 내려 안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십대왕상, 판관상, 사자상, 인왕상 2구를 용주사로 옮긴 바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산신각·범종각·봉서루가 있고, 4동의 요사채가 있다. 유물은 1791년(정조 15) 제작된 지장보살 탱화가 유명하다. 한편 동탄면 신리의 옛 절터에는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원각사(圓覺寺)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