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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증가들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이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교리화하고 신조화하는 데와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증가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가장 탁월한 변증가였다.
변증의 정신과 내용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육체를 사랑하며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다.
내용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만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일 뿐이며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한 참 유신론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음.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함
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신)이다. 그가 신기한 표적을 행한 것은 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것이다.
변증가들은 변증을 위해서 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 기독교와 세상 철학들의 관계에 대해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변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신의 유일성과 기독교 도덕의 초월성이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은 구약 성경 중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의 감화력과 결과를 들어서 증거로 삼는 일도 많아졌다.
대표적 변증가
(1)유스티누스 (100-165)
철학은 매우 커다란 재산이며, 신에 의해 최고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성스럽다. 철학과 올바른 이해 없이는 어떤 자도 통찰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철학을 하여야 하며, 철학함을 매우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작업이다. 철학에도 진리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에게도 ‘로고스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헤라클레이토스, 스토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확실하고 유용한 철학이다. 그것은 기독교는 예언의 성취에 따른 증명이기에 철학보다 더 힘있고, 더 신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이 모든 인간적인 철학보다 뛰어나다,.
신앙인이라고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단지 스스로 몇 라지 특별한 통찰을 가질 뿐 결정적인 통찰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통찰은 이미 지나간 철학에서 되풀이되어 말해 왔던 것이다.
※로고스론이 무엇인가?
로고스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견해에 의하면, ‘소리내어지는 것’이다. 그 소리는 인간의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로 이해된다. 영혼적이다 는 말은 영혼이 자신 안에 갖는 것, 즉 생명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로고스란 어떠한 생명체가 자신이 지닌 본질을 내뱉는 소리로서 표현과 표현된 것의 종합적 진술을 뜻한다.
만일 로고스가 드러내지 않는다면 고유한 생명의 활동을 실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로고스는 스스로 은폐해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탈은폐할 가능성이 있다고, 헤라클레이토스(B.C 540년경 철학자)는 주장한다.
그는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변화를 변화로 겪어내고 읽어낼 기준으로서 ‘일자(一者)’를 설정했다. 보편이성 또는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법칙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일자는 이전 단계의 우주론에서 근원 탐구가 삼라만상의 다양성을 포괄하기에는 다소 한계를 지녔던 데 비해 변화의 상극적임 다양성과 안정을 아우르는 풍부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뒤 스토아학파(B.C 4세기 경)에 속한 학자들은, 우주의 질서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각이 되는 것은 로고스 덕분으로 보았다.
(2)이단들
교회는 초기에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받았고 2세기부터는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각종 이단 종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런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복음을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해하고 곡해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 종파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복음을 유대교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엘카이파가 다 그러했으며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역시 그런 경향을 나타내었다.
④에비온파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⑤엘카이파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⑥그노시스파(영지주의) 130년-165년
그노시스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하는데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여러 가지 세상 종교적 신비적 요소들 곧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마술,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의 신화들과 여러 가지 다른 철학들과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물에다 애매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일종의 새로운 종교 철학이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우선적인 문제는 이 우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어찌하여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의 해석 문제였는데 특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구원과 헬라 철학의 발출설(發出說), 동양과 헬라의 이원설(二元說)을 채택하여 계통있는 사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공통적 사상을 보면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이온(Aeon ; 영원히 존재하는 자)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은 아이온의 최하급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인간들인데 이들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사탄과 자신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정신적(psychics) 인간들인데 이들은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선행으로 세상의 중간층까지만 간다. 셋째, 영적(pneumatic) 인간인데 이들은 특수계층에 속하며 참 지식(gnosis)을 가졌으며 그 지식으로 신앙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영지주의적 사유의 출발점은 후기 고대인 모두에게 고유했던 감정인, ‘세계 안에서 고향 상실’에 있다. 고향 상실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인간의 본질적 운명으로 이해된다. 초기 헬라 오르페우스 전승, 헬라적-헬라니즘적 신비, 그리고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사유와 연관하여 후기 플라톤주의 근본 기분과 유사하게 영혼은 대지 위에서 길을 잃은 낯선 자로 여겨졌다.
영혼은, 자신의 노력에 지치고, 죽음에 지배되어 있으며, 출구 없이 헤매이며 미로에 빠져 있고, 쓰다쓴 혼돈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다.
빛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영혼은 비참에 던져져 울고 있다. 여기서 발렌티우스주의자들은 ‘영적인 것’ 혹은 ‘영적인 실체’라고 명명한 것을 발견한다. 즉 그것은 ‘위로부터 유래한 본질의 싸앗들’로서 ‘오물 속의 금’과 같이 인간 안에 오염되지 않고 놓여 있다. 하늘과 세계 사이에는 신적 영역(플레로마)이 있는데 이 영역은 30계단(30개의 에온)의 영적 계급이 형성되어 있고 그 제일 밑바닥에는 바로 ‘지혜’가 땅에 닿아있다. 이 가장 어린 에온인 지혜를 깨달아야 구원이 가능하다.
영지주의 자들의 신은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 신’이다. 따라서 ‘부정신학(否定)적’이다. 그래서 창조주란 최고의 신이 아니다. 창조주(데미우리고스)는 완전한 신과 악마의 중간자, 혹은 신과 비교되는 천사이다.
“그대들이 전체 세계와 그 안에 현존하는 물질을 포기하고, 빛의 왕국의 신비를 발견할 때까지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순수한 빛이 되리라. 전체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 그대들이 ‘신의 영역’(플레로마)에 들어가면 이 세계 안에 은폐된 불이 밝혀지고, 모든 물질이 점화되어 파괴되고, 동시에 이와 더불어 소진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로고스‘라고 불리는 천상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내려오는데 그는 세계로 내려와서 인간 예수와 결속하고, 세계에 흩어진 정신의 조각들을 모은다. 이 때 역사적 예수와 하늘의 그리스도는 다르다.
⑦마니교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은 동방에 있으며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종교인데 서방으로 퍼짐에 따라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 시조는 마니(216-276)인데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서 젊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반대자들로부터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과의 싸움이며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여 생긴 것으로 본다. 사람은 빛을 이 흑암 속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解脫)의 방법은 육체를 정복하여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마니교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과 혼인과 망령된 말을 금했는데 이 점에서는 불교와 비슷하다. 마니교의 최고의 덕목은 세 가지를 인봉(印封)하는 데 있다. 첫째는 입의 인봉인데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 인봉은 손의 인봉인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봉은 가슴의 인봉으로 정욕과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는 초기의 기독교와 유사하거나 더 질서정연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니 밑에 12사도가 있고 그 밑에 70인의 감독이 있었으며 그 밑에 교사들이 있었고 또 그 밑에는 행자(行者)가 있었는데 행자 중에는 택한 자와 듣는 자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택한 자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마니교는 동서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 이르렀고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어거스틴도 젊을 때 8년간이나 마니교에 탐닉한 적이 있다.
⑧마르키온(130년경 활약- 160년 사망)
구약의 하나님은 단지 정의만 추구하나 새 언약의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존재
구약의 하나님은 악의 창조주로서 오직 이스라엘들만 사랑하고 다른 인류를 파괴시키는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제외한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의 10개 서신들만을 인정했다. 그에게는 바울만이 영웅적인 사도로, 예수님의 복음을 오염시키지 않은 유일한 사도로 간주했다.
그는, 은밀한 지식체를 가졌다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인간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즉 구원이란 신비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에 의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복음을 유대교와 결부시키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모호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 인데, 그 신은 반역의 악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 데미우르고스가 인간들, 즉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신은 인간 구원에 책임을지지 않는 신이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육체 및 영혼을 악의 영역에 두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와는 달랐다. 그러나 영지주의와의 접촉으로 자가 당착에 빠져 영혼과 육체 사이에 대립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데미우르고스에게는 아무런 부채도지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의 피조물인 인간들이 태어나듯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를 가진 듯이 나타난 것 뿐이다.(가현설)
그래서 이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악한 세계와 그 율법에서 그와 그의 형제를 피신시키기 위해 십자가 사랑으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두 번 하강하셨는데, 한 번은 고난 당하고 죽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번은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그에게 진정한 그의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와 같이 이원론에 입각하여 물질을 죄악시하여 금욕주의로 쏠렸다.
(3) 헬라파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 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도 변증서가 계속 나오는 등 변증의 열심이 완전히 식어진 것은 아니나 교회는 점점 내부의 충실에 열중하였으며 신학교를 건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이 무렵 헬라 신학자와 라틴 신학자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지방과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로 사상의 경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①이레네우스(130-202)
최초의 조직신학자. 소아시아 서머나 출신
그는 영지주의에 맞서서 구약과 신약을 언약적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공간적으로 교회는 동일한 말씀을 가르치게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동일한 사도의 저술의 하나의 경전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많은 사건들은 신약의 메시야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총괄갱신’을 말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는 것은 인류를 회복하는 일이며 갱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에 관해 그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필연성을 인간의 신격화라는 구원론에서 찾았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서 아담의 타락을 회복시키는 구속자가 되셨고, 동정녀 마리아도 순종을 통하여 하와의 불순종을 보상했다고 보았다. 특히 마리아는 순종을 통해 전 인류를 위한 하와의 변호자와 구원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카톨릭의 원죄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관(神觀)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자유 의지로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였고 신의 피조물인 우주(물질) 역시 선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로고스이며 그의 독생자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 대해 순종하는 위치에 서며 성자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으로 본 것은 그의 순종이었다. 인류는 바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로서 주님은 인류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포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대해 증거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이미 로고스가 아니고 성육신과 속죄에 있었다. 오랫동안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신학은 이레네우스에 의해 다시 상기되었다.
②히폴리투스 (Hippolytus) 170-235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제자. 그는 주석과 연대기와 부활절 계산, 변증가, 이단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는 로마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하여 당시 등장한 두 가지 단일신론(Monarchian) 주장(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시키는 養子論的 단일신론과 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시키는 樣態論的 단일신론)에 크게 반대하여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4)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철학과 古文學의 소양이 풍부하였다. 그들은 이단을 반대하여 참 진리를 세우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으나 그 자유로운 연구 태도와 사상 자체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이 파의 대표자들이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유력한 교회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학교(학파)는 처음에 판테누스에 의해 지도되었다. 판테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이르러 이 학파는 최고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철학이란 덕이있는 인간이 만들며, ‘악덕의 작품’일 수가 없다. 철학은 진리에 도달하는데 적합하지만 진리엔 단지 부분적으로 도달할 뿐이다.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 신앙이 역할을 맡게 된다. 신앙은 진리의 힘이며 신앙을 통해서만 모든 것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철학은 예비 교육이다. 철학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교육시킨다. 야생올리브유와 좋은 올리브유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신앙은 ‘통찰의 시초’일 뿐이다. 신앙은 신을 탐구하지 않으며 단지 신이 존재한다고 고백하는 것 뿐이다. 영적인 지혜(영지)를 통해서 비로소 신앙은 완성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식될 수 없는 신이 스스로를 자신의 아들 안에서 계시하였고 그 안에서 항상 보이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얼굴’이며 ‘신에 대한 올바른 선생’이다.
신의 아들은 근원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로서 중요성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신이 세계를 창조한 자로, 즉 ‘사물들의 신적인 시초로’ 그리고 ‘존재자에 대한 무시간적이고 무근원적인 근원이지 첫 번째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클레멘트의 그리스도론도, 역사적인 아닌 주로 우주론적-신학적 사변이다.
신은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은 더 앞선 것과 인식 가능한 것에 의해 존립하기 때문이며, 생성되지 않은 것 이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인 지혜’란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나타남과 예언자들을 통해 가르쳤다.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신적인 은혜를 통해, 그리고 오직 그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통해 인지될 수 있다. 영적인 지혜는 ‘전승으로부터 계속해서 주어진다’ 이 전승은 신적인 문헌 뿐만 아니라 사도들 중 일부에게 씌어지지 않은 채 전승된 은닉된 경청자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전승도 포함한다.
②오리겐(185-254)
18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거룩한 삶을 향한 오리겐의 열망과 금욕적인 경향은 스승인 클레멘스보다 훨씬 더 하였다. 그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사람 중 하나였으며 아무 소유도 없었다. 그는 211년 경에 로마로 갔으며 215년에는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였으며 230년 경에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이스 등지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의 비난과 고소로 인해 추방당했고 가이사랴에 가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오리겐은 244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두로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다방면에서 석학이었으나 구약 본문 비판, 주석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저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에 관한 것으로서, 본문 비평과 주석이 있다. 비평서로서는 {헥사플라}(Hexapla; 6가지 번역 성경)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나온 기독교 학자들의 모든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역시 신 구약 전체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리상의 저서로서, {제1원리}(De Principis)라는 큰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인데 오늘날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변증적인 저술로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다. 이것은 8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전부 전해지고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필로와 같이 성경을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하여 구약 해석을 함에 있어서 풍유적 또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 해석법은 헬라 철학자들이 신화와 신에 관한 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오리겐은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뜻만 찾지 않고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찾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자적인 뜻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도덕적인 뜻이란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을 말하며, 영적인 뜻이란 성경 말씀 안에 포함된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항상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조화시키고 철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우화적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던 것도 바로 성경에서 철학적인 뜻을 찾기 위해서였다. 헬라 사상에 의한 기독교 해석법은 오리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은 철학과 윤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리겐의 작업은 기독교의 과학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바탕은 신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진 플라톤 스토아 철학이었다.
교회, 사도적 전승 위에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웠는데, 우선 그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다. 로고스(아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이지만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영혼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유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어서 깨끗하게 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의 구원관은 만인구원설이어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도 일정한 사후의 시련을 통해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리겐의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 곧 현세의 영적 실재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영혼은 그 세상에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우리를 타락시켰다. 그래서 구속 얻은 자들만 거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리겐은 바울 이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속죄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만인에게 미쳐서 성도뿐 아니라 악인들까지도 마침내 구원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마귀들까지 구원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대학자로서 그의 정신 세계의 규모와 수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모든 이론들이 다 참된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세상이 보다 열등한 주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와 아울러 물질 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플라톤주의적)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점에더 오리겐은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 영혼의 선재라든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을 주장한 것을 놓고 보면 그의 사상이 기독교의 정통 사상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겐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 이전까지의 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로서 이후 동방 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대의 기독론 논쟁에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그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 회의(399-400년)와 유스티누스 황제 회의(543년), 제5차 교회 대회(553년)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
신은 파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 초월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계의 피조물로부터 초월하여 신의 비가시성에 도달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의 영원한 힘과 특히 그 신성에로 스스로를 고양시켰다.
신은 자기 작품 안에서 인식된다. 모든 인간은 신에 속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정신’이라는게 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표상은 통찰하는 정신 자체이고, 그를 통해 정신은 신성의 본질에 대한 어떤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맹아 안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 신의 아들로서, 두 번째 신인 로고스가 나타나면 인간 자신들에게 뿌려진 지혜와 정의 확실한 씨앗이 바로 그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즉 로고스는 인간들로 하여금 우선 육화된 로고스에 걸맞는 형태가 되도록,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육화된 로고스가 육화되기 전에 누구였는지 볼 수 있는 데까지 초월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로 부른다.
그의 대표 저서는 < 모든 이단을 논박함(Against All Heresies) > 이다.
(5)라틴 교부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①터툴리안 (Tertullianus) 160년-225년)
터툴리안은 신학을 라틴 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근거하는 계시와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즉 ‘취득시효’를 언급했다. 이단들은 더 이상 계시를 바르게 해석할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에 대해 많이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이교 철학을 모두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으로 취급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쳤다.
이처럼 그는 철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오직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철학적 관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가(성경적 관심)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며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②.키프리안 (Cyprianus) 200-258
키프리안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터툴리안은 人性(人間)의 부패를 말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비해 키프리안은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자는 타인이며 俗人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카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영적 공동체'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외적 조직과 제도를 갖는 가시적(可視的) 공동체로 보았으며, 그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말씀}보다는 보이는 {사람}(감독들)에 의해 확실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카톨릭교회 곧 可見的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카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핍박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던 당시의 사정에서는 이런 주장을 할 필요성이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이나,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신약 교회의 특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인간의 제도에 근거하여 교회를 유지하려고 의도한 키프리안의 신학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잘못된 신학이며 훗날 나타나게 될 교황 제도를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교회를 크게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6)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이런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축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던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런 수찬 정지는 구원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징계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완화해 주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회하는 죄인을 받아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게 되자 음행과 간음한 자 및 배교를 한 자들까지 교회가 받아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서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217-222)는 어떤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해준다는 성명을 내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배교자는 제외했으나 박해로 인해 무수한 배교자가 속출하자 그것도 결국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넘어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 엄격파들은 그 입장을 거부하고 로마의 신학자 노바티안을 따름으로 분열하였다. 대다수인 나머지는 관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로마 회의(251년), 카르타고 회의(252년)에서 다수파인 관용파가 승리하여 교회는 회개한 배교자들의 교회 가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들은 배교자 등 죄인들의 죄책 등급을 다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등급에 따른 고해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햇수(年數)가 결정되었다. 고해(告解; penance) 개념은 세례의 속편(續篇)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고해로써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므로 반복할 수 없었고 세례는 세례 받기 전까지의 죄만 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후의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구제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와 같이 생각했다. 곧 순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이 순교를 그렇게 갈망하고 그것을 자청했던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고해였다. 이런 사상은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에 나타난다.
우리교회/이근호 목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