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백제는 미지(未知)의 왕국이다. 우리가 백제에 대해 아는 것은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의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적은 내용들로 인해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적으로는 금동대향로라는 유물, 무령왕릉이라는 무령왕의 무덤과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국가라는 사실로 인해 생긴 문화가 매우 발달한 국가라는 인식뿐이다. 그래서 나는 고구려나 신라에 밀려 관심밖에 있었던 백제 초기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하남위례성은 백제가 처음으로 도읍한 곳이라고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의 지리적인 면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잘 맞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나는 이런 고찰과정을 거친 결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의 도읍 하남 위례성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번 답사를 가게되었다.
2 . 백제의 초기 도읍지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
백제 온조왕 이후 근초고왕 26년까지 약 400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던 하남위례성에 대해서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그 얼마 후 부여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비류이며, 둘째 아들은 온조이다. 그들은 후에 태자(주몽의 태자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등 10여명의 신하들과 더불어 남쪽로 가니, 많은 백성들도 이들을 따랐다. 드디어 한산에 닿아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했다. 이에 10명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간했다.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놓여 있으므로 천험과 지리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표' 백제 온조왕조에는 위례성을 다른말로 사천이라 하는데 지금의 직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위례성에 대해 미상지명(未詳地名)으로 분류해 놓아서 그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하남의 지형에 대한 기록은 위례성이 어디였는지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하남위례성이란 강 남쪽에 있는 위례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강은 한수(漢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한강(漢江)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북쪽에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고 했으므로 바로 붙어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강 남쪽에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은 서울의 강남구 일대와 광주 평야 일대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하남위례성이 산성이 아니라 평지나 적어도 여기에 가까운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고, 남쪽으로 비옥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는 반면,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다는 기록은 하남위례성은 평야 지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이다.
왕성의 위치를 찾을 때에는 문헌 기록말고 하나를 더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바로 고분군이다. 그냥 고분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 정도면 왕릉급이다 할 만한 대규모 고분이,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떼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현대 한국인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죽은 이를 안장하지만, 삼국 시대에는 모두 왕성 아주 가까운 곳에다가 왕릉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확실한 한성 백제의 왕릉급 무덤은 풍납토성에서 한강 하류쪽으로 3 킬로미터 가량 내려간 지점에 밀집해 있는 석촌동 고분군이다. 일제가 191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곳에는 고구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돌무지 무덤(적석총(積石 )) 23기, 흙무덤 66기 등 모두 89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망실되고 지금은 10기 남짓 남아 있는데, 그 중 적석총 제 3호와 제 4호 무덤은 한변의 길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규모로 볼 때 왕릉급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주변 지리에 대한 기록과 북쪽의 아차산성, 남쪽의 이성산성 등이 이를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는 점과 주변의 왕릉급 고분들로 볼 때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은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아니면 두 성을 합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
3 . 몽촌토성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 공원 내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백제의 역사만큼이나 무관심한 아름다운 토성이다. 사방을 어디를 쳐다보아도 고층아파트와 상가건물만 즐비한 이 지역에 눈을 상쾌하게 해주는 연한 자연의 곡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매우 부러웠고, 그들이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몽촌토성은 잠시 시름을 잊고 휴식할 수 있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물론 잔디와 나무는 최근에 복원과정에서 심었겠지만, 그 초록색과 나무 그늘은 토성을 찾아오는 동안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또 토성의 자연스러운 곡선과 그 위에 펼쳐진 산책로는 걷는 동안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몽촌토성은 오래 전부터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전해져왔을 뿐, 그 정확한 내용이 알려진 바도 없고 이미 토성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지도 오래되어 그 옛날 성안엔 민가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성벽과 언덕에는 여기저기 무덤들이 들어선 야산으로 변해 있었고, 단지 꿈마을 즉 몽촌이라는 이름만이 전해져왔을 뿐이다.
그래서 서울대 박물관이 3년여에 걸쳐 발굴·복원한 결과 몽촌토성의 총면적은 6만 7천 평, 성의 모양새는 자연구릉을 최대한 이용하여 불규칙하지만 대체로 타원형 또는 마름모꼴 형상으로 남북 최장 730 미터, 동서 최장 540 미터이며 성벽의 총 길이는 약 2.3 킬로미터인 것으로 드러났다. 토성의 높이는 대개 30 미터이나 높게는 43 미터나 되는 곳도 있으며, 동쪽의 외곽 경사면에는 생토를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게다가 경주의 반월성처럼 도랑을 깊게 판 해자(垓字)까지 설치하였으니 토성으로서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더욱이 동북쪽 외곽에 약 300 미터 길이의 바깥 성을 일직선으로 쌓아서 보강하고, 성의 북쪽 외곽 경사면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의 침입을 대비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몽촌토성을 발굴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여러 개의 저장구덩이와 여러 기의 움집터 같은 생활 유구와 무덤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출토유물을 유형별로 나누면 다양한 종류의 백제 토기류, 갑옷 파편과 철제 무기 및 마구류, 그물추, 낚시바늘, 가락바퀴, 거푸집, 돌절구, 신앙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목제오리 조각품 같은 일상생활 유물류, 백제 기와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중국제의 유물이 몇 점 들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유물을 백제토기인데, 주로 백제 초기의 회백색에 연질계통의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3세기 중국 서진(西晉)시대의 회유도기(灰釉陶器) 파편도 발견되어 이 토성이 3세기 이전에 축조되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많은 결국 이 모든 것들을 근거로 많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말하게 되었다.
4 . 풍납토성
한강을 가로지르는 천호대교를 건너 강남쪽으로 가다보면 다리가 끝나는 자리 오른쪽으로 아주 깔끔하게 단장된 흙 둔덕이 우람하게 솟아 한 줄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풍납토성 성벽 중 1976∼1978년에 복원된 북쪽 및 동쪽 벽 446 미터 구간의 일부이다. 우리가 이 풍납토성을 찾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이유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사전에 알지도 못한 점과 찾아가는 길에 어떤 안내 표지판도 발견할 수 없었던 점, 풍납토성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풍납토성의 존재를 몰랐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위치를 물어본 어느 누구에게도 풍납토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 부근에서 일하는 공익근무요원도 풍납토성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또 풍납토성이 주택이 밀집한 곳에 위치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풍납토성은 몽촌토성과 같이 완벽히 복원한 토성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토성이 정말 길고 그 안에 매우 많은 인구가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실감하게 된 원인은 현재 토성 내에 엄청나게 많은 주택이 들어서 있었던 것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초기 백제시대에 축조한 평지성으로 남북이 긴 타원형의 토축성곽이다. 풍납토성의 주위를 살펴보면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있고, 한강 건너편에 서북쪽으로 아차산성을 바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몽촌토성과 송파로 통하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멀리 남한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약 3.5 킬로미터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성벽 약 3만 6천 평을 포함한 전체 토성의 면적은 총 26만 평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는 토성의 동벽, 동북쪽 모서리, 그리고 북벽과 남벽의 일부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 한강에 면한 서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대부분 허물어져 없어졌다. 현재 토성의 동벽이 약 1500 미터, 북벽이 약 300 미터, 남벽이 약 200 미터, 서북벽 250 미터 가량 남아 있어 남아 있는 토성의 길이는 모두 2250 미터 가량이다. 또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4군데가 크게 뚫려 바깥과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원래의 성문자리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풍납토성 성벽중에서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을 근거로 삼아 풍납토성의 축조과정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성벽은 다져 쌓기법을 이용하여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모래로 엷게 한층 한층씩 다져서 쌓아 올렸으며 경사면에는 2단으로 축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외벽은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고 거기서부터 기울기를 줄여서 토성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북벽이 약 8m 정도이다. 토성의 기초인 밑부분의 너비는 약 30m 가량 된다. 토성의 내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성벽 중에서 동벽의 외부가 패이고 물구덩이 생긴 것은 축성 당시 축성용으로 모래를 채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풍납토성 내에서는 적지 않은 생활유물을 찾은 바 있다. 우선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에서 자루솥 2개를 찾았고, 1966년에 토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풍납리식 무문토기, 조질유문토기, 김해식 토기, 신라식 토기, 풍납리 흑도 동의 토기와 도제 그물추, 물레가락바퀴, 기와 , 숫돌, 철제 꺾쇠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백제 초기)에 축성되었음이 밝혀졌고, 그 당시 이 토성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토성이 단순한 방위를 위한 군사시설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와 큰 강을 낀 입지적 조건, 그리고 주변에 고분군과 산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 국내성에 비견된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 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고려해 볼 때, 백제 초기에 이런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되었다는 점은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그리고 풍납토성은 축성 연대가 기원전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삼국사기>의 삼국 초기기록의 신빙성을 높이는 근거가 되고 있다.
5 .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은 우리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이 고분군이 있는 고분공원은 특이하게도 터널으로 뚫린 지하차도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이 지하차도를 건설할 때에 '지하에 있던 유물들이 훼손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분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적석총들은 멀리 보아도 정말 엄청난 규모였다. 특히 제 3호 무덤은 정말 거대했고, 사진으로만 봤던 장군총이 전체적인 규모 면에서 이보다 훨씬 거대하다고 하니 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많은 적석총을 남한에서는 그 주변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따라 천천히 음미하며 감상했다. 그런데 몇몇의 아이들이 3호 무덤 맨 위의 잔디를 깔아놓은 곳을 놀이를 위해 만든 동산으로 아는지 그곳에 올라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행위가 피장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내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물론 아이들은 바로 내려왔지만, 사람들의 문화유산을 놀이터로 보는 시각이 매우 아쉬웠다.
석촌동 일대는 백제시대엔 지배층의 공동묘역으로 흙무덤과 함께 적석총이 떼를 이룬 것이 특색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흙무덤들은 다 농지로 변해버렸고, 돌무지가 가득한 들판에 인가가 모여 돌마을 또는 돌마리라고 불렀었다.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80기 이상의 고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74년 최초 발굴조사시에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3호·4호·5호분 뿐이었다. 적석총인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서, 남분은 적석총이며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4호분 남쪽에 위치한 2호분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를 채운 내부에서 목관 1기가 조사되었다. 3호분은 기단식(基壇式) 적석총으로 제 1단의 규모가 동서 50.8 미터, 남북 48.4 미터로 중국 집안의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太王陵)과 거의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 3호분은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이 대개 4세기의 것이므로 고고학자들이 백제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근초고왕(374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3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4호분은 점토입방체(粘土立方體)로서 사방을 석축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적석총 형태를 띄고 있다. 한편 5호분은 봉토로 덮은 형태인데,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석촌동 적석총의 상한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공주로 도음을 옮긴 이후 적석총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
이 석촌동 고분공원의 적석총들이 갖고 있는 의미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계성을 증명하는 자료라는 것이다. 적석총은 고구려가 많이 사용한 무덤 형식으로, 대표적으로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천추총(千秋塚)이 있다. 즉 백제의 도읍지 부근에 이런 무덤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계통이 고구려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중 백제 시조인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왔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면서 삼국 초기기록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 있는 명백한 자료인 것이다.
6 . 방이동 고분군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5 킬로미터 떨어진 표고 약 30∼50m의 구릉 경사면에 고분군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첫 행선지였던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백제고분군이다. 이 곳을 찾아갈 때에 고분공원의 문이 단 하나밖에 없어서 문을 찾으려 공원 둘레를 한바퀴 돌았던 것이 생각난다. 힘겹게 문을 찾아 들어가 보니 정말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공원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만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 있을 뿐 우리처럼 답사를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고분 앞에 올라와 잠시 숨을 돌릴 겸 뒤를 돌아보자 길 건너편의 주택가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내가 풍수지리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분은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에 편안히 누워있었고, 자신의 후손의 삶을 한눈에 보고 있었다. 무덤이 평지에서 구릉으로 옮겨간 이유에 대해서 김원룡은 '왕이나 호족이 평야를 내려다보는 높은 능선 위에 장방형의 석곽을 만들고 그 위를 거대한 봉토로 덮어서 평지의 무덤들보다 장대하고 위압적으로 만든 것은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자손과 신하를 감시하고 보호하는 조상의 유택(幽宅)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해석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 확대의 필요성 때문에 무덤영역이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방이동 고분군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합동지표조사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1975년 잠실지구 신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6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방이동 고분군에 있는 고분은 봉분의 형태가 모두 원형이고, 내부구조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가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부분이 이 형식이고 다른 하나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1기가 있다. 널길이 달린 방형 또는 장방형의 돌방무덤은 고구려 고분의 전통과 연결되는 무덤이다. 특히 제1호분은 백제 중기의 도읍지인 공주의 송산리 제5호분과 그 구조와 형식이 흡사하다. 이것은 방이동 고분의 양식이 공주 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아울러 백제 고분 양식의 전통성과 계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방이동, 가락동 지구의 '굴식 돌방무덤'과 유사한 양식이 고분구조가 5세기 중엽의 일본 북구주 지방의 고분에서 나타나고 있어 백제문화가 일본의 고대 문화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는데 방이동 고분군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제6호분에서 신라토기가 나온 것은 무덤 양식에서 신라의 영향을 고려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백제와 신라와의 교역에 의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7 . 결론
이 네 유적을 모두 돌아본 후 우리의 하남위례성 답사가 끝났다. 나는 백제를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지금까지 하남위례성의 흔적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했고, 몽촌토성도 단지 터만 남아 있는 그런 곳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몽촌토성은 복원해서 송파구의 명소가 되어있었고, 그 주변에는 백제의 고분공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특히 고구려 태왕릉이나 장군총을 사진으로만 동경해오던 나는 석촌동에서 적석총을 실제로 보게되어 가슴이 뛸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문화유산을 매일 볼 수 있는 송파구의 주민들이 매우 부러웠다. 이처럼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멀게 느껴진다. 백제에 대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 중 가장 빈약하고, 이 때문에 현행 국사 교과서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적다. 그래서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씩씩한 국가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국가로 인식하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우리가 백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기록의 빈약성도 있겠지만, 정부의 잘못된 정책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서울특별시는 '정도(定都) 600년' 행사를 거창하게 치렀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의 한양 도읍을 말할 뿐, 2000년 전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답사에서 느낀 다른 문제점은 유적의 위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안내 표지판의 부재 또는 잘못된 점이다. 우리는 처음 몽촌토성 역에서 내린 후 몽촌토성이 어디라는 안내 표지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단지 올림픽 공원이 어디에 있다는 표지판뿐이었는데, 그 공원 내에 몽촌토성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토성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풍납토성을 찾아갈 때에도 한 개의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없었다. 더구나 풍납토성은 주택이 밀집한 곳에 위치해서 더욱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은 안내 표지판이 있었으나 이 역시 고분 공원을 찾아가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사실은 한국인이 수학여행지로 자주 떠올리는 신라의 도읍지 경주와는 정말 상반된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 때문에 백제를 느껴 보러 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포기했을 것이고, 백제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정책적으로 백제의 유적들을 홍보해야 하고, 위치 정보가 전무한 사람들도 찾아갈 수 있도록 상세하고 많은 안내표지판을 설치해야 할 것이고, 서울이 도읍이 된지가 600년이 아니라 2000년이 넘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런 정책이 시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수도권에 위치한 백제의 유적들을 찾아오고, 인식이 점차 바뀐다면 백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점점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모든 소중한 유산에 대한 정부의 더 큰 관심과 국민들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바라면서 보람찼던 이번 답사의 보고서를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