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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백제말기 서자들의 좌평직에 대하여..
백제사랑 추천 0 조회 309 10.11.07 23:41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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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1.08 02:12

    첫댓글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 이것만 가지고 저 여섯명이 좌평 중에서도 우두머리 급을 했다는 해석은 좀 무리한 자의적인 해석인 거 같은데요? 그냥 같이 빌러 간 좌평이 여섯이라는 거 외에, 그 여섯명이 ' 백제의 가장 높은 좌평 6명 ' 이란 암시 표현이 있나요? 말씀하신 ' 뒷 기록에서의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한 좌평 표시 ' 라..... 저는 그 41명이 의자왕의 혈육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름은 따로 있으나 왕의 성씨를 하사받은 양자 개념의 서자였겠고, 백제 부흥군에서 다양하게 보이는 여자진을 비롯한 부흥 장수들이 그 41명 좌평의 주인공들에 속해 있었겠죠..

  • 10.11.08 02:11

    무엇보다, 계백의 경우에서 보듯 군사 통수권을 좌평이 아닌 달솔에게 맡기는 사례에서도 볼 때 상영이나 충상 역시 마찬가지로 ' 6좌평 ' 의 정원을 할애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쥐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왕권 강화를 위해 41명이라는 파격적인 숫자의 정원을 친위 세력에게 하사함으로 인해 측근 세력 양성도 하고 기존 귀족세력에겐 ' 좌평 ' 이란 관직 자체의 인플레와 약화 현상을 유도하였던 의도가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실질적으로 6좌평이 더 높은 권한을 행사하고, 정작 41좌평은 사서에 그냥 이름 한번 오르고 말 정도면, 41좌평을 애초에 그렇게 늘릴 이유가 없지요...

  • 작성자 10.11.09 00:00

    기록에도 전무한대... 여자신을 의자왕의 아들로 보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알기로는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된건 없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단지 부여씨라는 이유만으로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단정짓는건 어폐가 크다고 봅니다. 또한, 의자왕의 서자 41명역시 의자왕의 아들이 아닌 양자라고 표현한 근거 역시 도대체 뭔지 궁금합니다. 저역시 부여장님의견대로 41명의 서자들의 좌평임명이 좌평직의 권한을 축소시킨것은 맞으나, 이 서자41명이 6좌평에 준할만큼의 권력을 가지진 않았으며 좌평의 권한이나 권력이 대폭낮아지긴 했어도, 달솔과 계급이 아예 뒤바뀌는 역전현상은 없었다는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 작성자 10.11.08 23:54

    서기 660년시점에 달솔이 좌평보다 계급이 높고 권력이 쎗다면 부흥운동을 주도한 복신이 좌평이라고 칭하지 말고 달솔이라고 칭해였어야겠죠...(머, 글을 다시 읽어보니 부여장님도 이정도로까지 의견을 주장하신건 아닌것으로 사료됩다, 단지 좌평의 권한이 예전에 비해서는 축소되었다는 선이라면.. 저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여튼 부여장님과 저의 의견은 80%정도는 맞는거 같은대 20%정도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는듯 싶군요.^^

  • 10.11.09 01:29

    정작 ' 핵심이 되는 6좌평은 결국 따로 두었을 ' 거라면 41좌평을 둔 취지 자체가 무색해 지지요.... 때문에 실질적으로 어느 좌평이든 똑같이 실질적인 권한이 축소되었을 거라고 보는 겁니다. ' 좌평 6명과 함께... ' 에서의 6명의 좌평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듯 한데, 굳이 같이 교섭하러 간 6명의 좌평을 ' 좌평 중에 가장 우두머리 급으로 보아야 한다 ' 는 정황근거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리플에서 여자진을 의자왕의 아들로 보는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까? 왕족의 성씨를 하사받은 형식적 수양아들 개념으로의 서자라고 했지요~

  • 작성자 10.11.09 07:13

    그 형식적 수양아들 개념이라고 보시는 근거가 뭔지가 궁금합니다.... 백제의 경우 부여씨에서 흑치씨나 귀실씨등 다른 성씨로 갈라져 나오는 사례는 있어도, 왕이 직접 부여씨를 하사한 사례는... 뭐, 신라야 그런 경우가 몇차례 보이긴 합니다만(그래도 수양아들까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백제는 적어도 역사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백제무왕같이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워서 수양아들로 보인다고 주장하시는건 아닐테고요..

  • 10.11.09 14:17

    ' 서자 ' 의 개념을 혈육으로 이해하기엔 힘든 면이 많으니까요.... 친위 측근 세력의 양성 및 기존 좌평 권한의 희석화을 통해 신예 세력층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다수의 좌평 체제로 나아간 걸로 보는 겁니다. ' 실질적인 의미 ' 측면으로 따지면 수양아들 정도의 입지적인 비유라 보는 거지요... ' 너는 이제 내 수양아들이다. 날 아버지라 부르거라... ' 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삼국사기에 나온 ' 서자 ' 의 실질적 의미가 대략 저러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게 백제 기존 역사 기록에 보여야만 가능한 체제입니까? 엄연히 7세기 그 당시는 백제의 전무후무한 개혁 시대였다는 점도 참고해 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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