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다.
몇 일간의 숨 막히던 황사가 물러가고 맞이 한 아침 공기는 조금은 의심스럽지만 너무도 산뜻하다.
오늘로 동아 대회가 끝난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는 내 생활의 징검다리가 되어 버린 봄 가을에 있는 마라톤 대회,
이제 그 하나가 지나갔다.
아니, 벌써 하나를 넘겼다.
그 많은 기다림과 설레임도 이젠 멀리 가 버린 황사처럼 먼 기억으로 넘어갔다.
뛰러 갈까, 등산 갈까.
일요일 오전이면 늘 하는 고민이다.
이 번 겨울은 작년 겨울에 비해 너무도 눈이 안 왔다.
그러니 눈 오면 가려 했던 산행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매주 다녔던 전 년에 비해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중 빠트리지 않고 가던 철원도 이 번 겨울에는 못 가봤다.
많은 망설임 없이 쉽게 결정 났다.
그래 철원에 가자.
버스는 중량천 변을 따라 나 있는 동부간선도로로 달렸다.
천 변으로 나 있는 자전거 도로에는 벌써 많은 시민들이 나와 달리고, 자전거 타고, 인라이닝을 하고 있었다.
달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부럽고 등산 가는 것이지만 우두커니 버스에 앉아있는 내 자신이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했다.
작년에는 이 곳에 자전거 도로가 안 나서인지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라톤 붐이라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마땅하게 뛸 곳이 없던 강북 시민들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뜀터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언젠가 코스 답사코져 와봐서 알았지만, 시에서인지 구청에서인지 상당히 정성 드려 만든 코스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왠지 멀게만 느껴졌던 관청의 종사자들이 이젠 이웃처럼 많이 가깝게 느껴졌다.
노원구 구간은 지금 한창 공사 중이였다.
뒤 늦게 하는 공사인 만큼 잘 만들겠다는 구청의 다부진 의지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던 그 공사였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기대가 되어진다.
시외버스 기사 아저씨의 입담은 정말 재미있다.
곧 알게 되었지만, 비슷한 연대의 나이라서 그런지 마치 오래된 친구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 스스럼 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군대 얘기, 자가용이 너무 많다는 얘기, 담배 얘기, 술 이야기, 등산 얘기, 축구 얘기 등 서로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에 서로 즐거웠다.
두 번 더 왕복해야 그 날 일과가 끝난다는 기사 아저씨와는 나의 목적지인 신철원 터미날에서 헤어졌다.
철원.
군 시절 이 곳을 얼마나 싫어 했었나 생각해 보았다.
모두들 그랬겠지만, 나도 제대하면 이 쪽 방향으로 오줌 안 눈다고 마음 먹었고, 제대하는 날 출발하는 버스 창문 밖으로 다시는 이 더러운 곳에 안 온다면서 침까지 뱉었다.
맨 전술 훈련에, 백키로 행군, 꾸벅꾸벅 졸면서 걷던 야간 행군, 지독하게 추운 겨울날 야외 생활했던 혹한기 훈련, 지긋지긋한 재설 작업, 한가하면 집 생각난다고 행한 각종 작업들.
유별나게 구속 받기 싫어 하는 성질 때문에 말썽도 많이 피웠고 그 만큼 고생도 많이 했다.
거의 몸부림치다시피 살았던 3년 동안의 어린 시절.
이젠 다 어디 갔는지, 하염 없이 바라보았던 그 주변 풍경만 남아있다.
그 주변만 남아있는 곳이 이 곳 철원이다.
그렇게 싫어 했던 이 곳 철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해 마다 온다.
마치 의식처럼 안 찾아오면 그냥 죄스럽다.
이 산야에 묻어 버린 어린 날의 나 자신에 대한 죄 때문일까.
일단 만두국을 시켰다.
주인 아저씨가 주방에다 만두국이 되느냐고 물어보고 해드린다 했다.
주방 음식구에 얼굴을 살짝 내민 주인 어머니의 얼굴을 뵙고 인사를 했지만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다.
올 해도 건강하시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식당 아저씨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옆 방에는 면회 온 듯한 아버지와 군인 한 명이 식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흔하게 보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식당도 꽤 오랫동안 했다.
거의 20년 동안 변한게 별로 없다. 굳이 있다면 술광고 포스터 정도 뿐이다.
만두국이 나왔고, 공기 밥 추가 했고, 군인과 아버지는 계산하고 나갔지만, 그 들의 대화는 등 뒤로 계속 들렸다.
아마 얼마간의 용돈을 군대에도 월급 나온다는 아들에게 찔러 주는 듯 싶다.
...
사갈 만두 없느냐는 물음에 겨울 철이 지나서요라는 답변에 계산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올 해가 처음으로 이 집 만두를 못 사본 해가 됐다.
이런 날씨에 사가져가본들 다 물러 터질 것이라고 안위도 해보지만, 그래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철원 군청소재지가 있는 신철원 도시이지만, 도시 한 복판에 나있는 도로 200여 미터만 지나가면 도시는 끝난다.
언젠가 조그마한 살 집 하나 사려고 알아보았다가는 서울의 집값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생활 방식이고 뭐고 서울과 지방과의 차이가 없어진 것 같다.
군데군데 서울처럼 pc방도 있고,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내내 같은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년 전에는 서울 생활과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여기 철원만이 아니라, 이제는 부산이고 광주고 대구고 지방마다 그 지방의 고유 특색이 거의 없어진 듯 싶다.
통닭집이고 호프집이고 거의가 전국 프렌차이저 점으로 운영되어서인지 어딜가나 똑같고 그게 그거다..
누군가의 말처럼 무 개성 시대는 이미 와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라톤을 해서인지 군청 담벼락에 붙어있는 철 지난 마라톤 포스터가 한 눈에 들어왔다.
‘3.1절 철원군민 마라톤 대회’
순간 어떤 죄책감을 느꼈다.
작년인가에 이 곳 철원에서 논두렁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다는 안내문이 서울마라톤 싸이트에 올라온 것이 생각나서이다.
당시, 너무도 무분별하게 올라오는 각종 대회 개최 안내문에 너무도 짜증이 났고, 안내문 자제 해달라고 글 올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여기 철원 마라톤은 딱 한 번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짜증이 났던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글을 올리는 타 대회 안내 내용 때문이었는데 재수없게 때 맞혀 싸잡힌 이 곳은 아니였었다.
그 날 즉각 삭제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로는 올라온 것을 못 봤다.
이렇게 조용히 치뤘구나.
한 번쯤은 알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과 함께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화도 좀 났다.
도시의 마지막 건물을 지나 내리막을 내려오자마자 벌판이 시작됐다.
사방 탁 트여진 시원한 시야가 눈에 들어오자, 답답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멀리 명성산의 궁예봉, 뒤 돌아 보이는 금학산, 고남산, 그리고 북쪽으로 포대고지 그 뒤는 북한이다.
참 너무도 보고 싶었던 산하가 눈에 들어오니 정말 반가웠다.
삼부연 폭포로 가는 길은 그 시작이 내리막이어서인지 그냥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몇 겹의 산으로 둘러싸여 도무지 길이 없을 듯 싶은 오르막 길은 성벽 같은 산새를 굽이굽이 돌아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있다.
거의 절벽 계곡 사이로 나 있는 물길과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바로 정면에 놓인 절벽에 마주치게 된다.
물길은 그 절벽 왼쪽 어깨로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도로는 그 절벽을 뚫고 터널로 이어져 있다.
이 삼부연 폭포는 햇빛이 안 들어서인지 언제나 서늘함이 감돈다.
폭포가 주는 서늘함도 있겠지만, 이 곳 땅 기운이 주는 살벌함이 더 큰 듯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
겨울이라 수량이 적어서 조용히 내려오지만, 언젠가 여름에 처음 왔을 때 무시무시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보고는 그만 기절할 뻔까지 했었다.
마치 살아있는 어떤 괴물이 잡아먹을 듯이 덤벼드는 공포를 쉽게 잊지 못한 적도 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폭포 관람 시설도 설치되어 있어도 이 곳에서 오래 있지는 않는다.
이내 벼랑을 뚫고 나 있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더한 냉기를 느끼는데 실제 기온은 바깥보다 더 차다.
이 터널 공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사실 매연 때문에 지나는 자동차가 싫기는 하지만, 이 터널을 지나갈 때에는 그래도 곁에 자동차가 지나가길 바라며 지나갔다.
터널을 다 나오자 자동차 한 대가 막 들어갔다.
터널 지나서의 풍경은 너무도 고요하고 순하다. 그리고 햇빛도 있다.
산들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그 때문인지 물도 조용하게 흐른다.
터널 하나 사이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길은 외통 길이라 거의 자동차 왕래가 없다.
무거운 차들이 안 다녀서인지 아스팔트도 처음 깔았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이 깨끗해 보였다.
몇 해 전인가 철원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렸을 때 유실된 다리는 새로이 멋지게 놓여져 있었다.
낙석 철망들도 새롭게 설치되어져 있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난 이 길을 너무도 좋아한다.
계속 이어지는 발걸음은 신철원 시민들의 상수원 목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에 이르렀다.
기억 속에서는 아스라이 보였던 저수지 맞은편의 건물이 이 번에는 상당히 가깝게 보여지는 것에 새삼 놀랬다.
상당히 큰 저수지인지 알았는데, 이 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전부 한 40가구나 될까.
마을 확성기에서는 산불조심 켐페인 방송이 반복되고 있었다.
용화동이라는 이 마을을 끝으로 아스팔트 길도 내가 가는 방향으로는 끝이 나있었다.
군 포 사격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곳이라서인지 접근금지 경고판이 계속 보였다.
이 곳은 포 사격만이 아니라 비행기 폭격 훈련도 함께하는 곳이라 상당히 위험한 곳이다.
허나 일요일 날은 훈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얻는 소득도 없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곳만큼은 일반인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군 훈련 지역인지라 비상 도로망이 잘 만들어져 있고, 관리 또한 지속적으로 하는 지역이다.
군사 지역이라 자연적으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고, 일요일이라 훈련도 없으니 이 산 전체에 나 혼자 덜렁일 때가 일쑤였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나 혼자만은 아니였다.
입구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산불관리원이였고, 그가 하는 일은 나같은 사람을 붙잡는 것이였다.
뗑깡을 썼다, 산 불 나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큰 소리도 쳤고, 애원도 했다.
쉽게 산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들어서인지, 제발 산불조심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풀어주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잣나무 숲 사이를 지나자 세찬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다.
나무 사이를 비벼가는 바람소리가 몹시 기분 나빴다.
대개 산에서의 이런 바람은 역으로 한 번 더 불게 되어있어, 모자를 꼭 눌러썼다.
그리고 언제 불어오나 하나, 둘 셈을 세자마자 곧바로 불어왔다.
마치 모자 벗기기 장난치는 것 같았고, 이 게임에선 내가 이긴 것 같아, 나도 씩 웃었다.
봄 날씨는 이렇듯 알 수가 없다.
햇빛이 비추다가도 이내 구름이 끼고, 잔잔하다가도 가끔씩 무서운 바람도 분다.
그래도 모진 한 겨울을 이겨낸 이 바람 속엔 어떤 향기가 스며있고, 이것을 우리는 봄의 향기라고 부르는가 보다.
분명히 이제까지의 겨울바람과는 온도 뿐만이 아니라 냄새가 달랐다.
비포장길을 벗어나 얼마간의 좁은 산행을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인 중봉우리에 올라섰다.
옆으로 주능선이 가로져 있으나 앞 뒤로는 먼 곳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였다.
아무래도 주봉까지 오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을 듯 싶었다.
이 날 오르는 산행은 여기까지 였다.
히야~, 조용하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명증 이라고 머리 속에서 늘 우는 귀뚜라미 소리 이외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 차게 올라와서인지 멀컹멀컹 거리는 맥박 소리만이 이 정막 속에 울리는 소리 전부였다.
의심스러워 재차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옛날 표준연구소의 무음향실에 들어섰던 경험이 생각났다.
온통 사방에 세모 모양의 스폰지를 붙여놓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빠져나가는 듯한 알 수 없는 기분을 경험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너무도 조용했다.
이 정막을 지구 도는 소리라고 했던가.
우리는 너무도 많은 소음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냉장고 소리, 보일라 순환모타 소리, 컴퓨터 냉각팬 도는 소리, 이웃집 양변기 내리는 소리, 예열 시키려고 미리 건 자동차 시동 소리, 배추장수 소리, 계란장수 소리, 꽁치장수 소리, 아파트 소독 안내 방송 소리, 잃어 버린 개 찾는다는 소리, 밥 먹었느냐는 헨드폰 소리, 머리 어디서 싸게 한다는 통화 소리, 기호 몇 번 찍어달라는 확성기 소리...
다 어떤 목적이 있는 소리다.
그 목적은 바로 어떤 이익이다.
그 이익은 누군가의 것이다.
그 누군가의 이익의 목적으로 나는 것이 소리이다.
그 누군가가 아닌 사람에게 이 소리는 곤욕스러운 소음뿐이다.
어쩌지도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여 산다.
나 역시도 그렇고.
나 역시 어떤 소리를 내고 있지 않는가 않았는가 반문해 보았다.
풀어진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어 소리없이 다 마셨다.
평소 같으면 빈 물병은 빠작 공기를 빼고 뚜껑 막아 납작하게 만들어 배낭에 넣어지만 그 날은 병마개만 조이고 넣었다.
방카인지 군 시설물 위에 걸쳐 앉아 먼 산들을 둘러보았다.
바보 같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둘러 본 사방 정 한 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이젠 이런 생각들도 지겹다 느꼈다.
잠시 더 멍하니 있다가 내려가자 마음 먹고, 얼마 후 내려갔다.
이동까지 6키로미터 라는 안내판을 지나치자 포터 화물차가 내 앞에 섰다.
이동까지 나갈 것이면 타라고 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탔다.
서울 비원 앞 무슨동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인데, 7~8년 전 지금 내 나이 때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자식들은 다 유학 보내고, 관광버스 한 대로 그럭저럭 먹고 산다고도 했다.
여기서 생활하다 서울에 볼일 보러 나가면 공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도 하며, 술집 유흥가가 없어서 그렇지 그것만 괜찮으면 여기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동 지난 다음 버스 정류장에 세워주셨다.
서로 명함이 없는 관계로 한 번 더 연이 주어지면 만날 것이라며 헤어졌다.
식사 후 표를 끊고 춥지도 않은 날씨라 밖에서 버스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한 일행이 왔다.
나이 든 여자와 젊은 여자와 그리고 여자 애기 전부 3명이다.
이내 젊은 여자가 표 끊기 위해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포장 오징어를 손에 쥔 여자 아기가 저도 들어가겠다고 유리 문을 미는 것이였다.
상당히 작은 여자 아기였다.
어떻게 저렇게 작을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작은 아기였지만 서 있는 모습은 이상스럽게 당당했다.
연실 포장 오징어를 뜯고 먹으려 하지만 두 여자 어른이 차 타면 먹을 것이라고 달래주었다.
저 정도 키의 아기면 대개가 업혀 있을 성 싶은데 서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꼭 서 있는 인형 같았다. 사실 곰인형 만 했다.
한참 후 버스가 왔다.
늘 맨 마지막에 버스를 타는 습관이 있는데, 그 날 따라 그 일행보다 내가 먼저 탔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었다.
버스는 거의 빈 상태였으나 앞 자리는 다 찼다.
나는 버스 문 쪽 2번째 칸에 앉았고 곧 잠 잘 태세였다.
여자 아기는 들려서 버스에 올려 놓이자 앞자리 승객이 받아 안았다.
나이 든 여자는 가득 찬 쇼핑-백 두 개와 빵빵한 가방을 메고 힘들게 올라왔다.
그제서야 그 일행들에게 짐이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이어 나이 든 여자는 짐들을 운전기사 쪽 2번째 칸 의자에 부렸고 여자 아기를 받아 그 옆에 앉았다.
그때까지 젊은 여자는 열린 버스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연실 아기에게 안녕이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곧 버스 문은 닫히고 버스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이든 여자 앞에 아기는 앞 보고 안겨 있으며 어느새 인가 손에는 짤라진 오징어를 쥐고 있었다.
아기 이름을 부르며 이모랑, 삼춘이랑, 할아버지랑 보고 싶지 하면서 지금 거기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지만, 아기는 오징어 빨기에 만 여념이 없었다.
바로 옆 자리에 있는지라 가까이서 보게 된 아기는 너무도 착하게 생겼다.
눈 끝은 처져서 더 없이 순하게 생겼다.
머리는 한 번이라도 이쁘게 다듬어 본 흔적 없이 자란 상태 그대로 였지만 너무도 청순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선하게 생긴 모습이 있는지 사뭇 내가 놀랬다.
의자를 뒤로 살짝 제치고 반쯤 기울인 자세에서 아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윙크해 주었다.
이제 자야겠다 마음 먹고 눈 감고 있자 나이 든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가 아야야 해서 아기는 이모랑, 삼춘이랑, 우리하고 살아야 한다며 좋겠지하고 아기에게 묻는 것이다.
눈 번쩍 뜨고 아기와 여자를 다시 보았다.
아기는 오징어 빨기를 멈추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서는 ‘엄마 아퍼’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이다.
이 여자는 이 아기의 외할머니이고, 아까 그 젊은 여자는 이 아기의 엄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가정문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아기 엄마는 애기를 돌볼 형편이 못되어 친정 엄마에게 맡기는 것이고, 저 많은 짐은 이 아기의 옷 보따리 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왜 이 아기 엄마가 버스 문 닫힐 때까지 안 떠날려 했는지, 그리고 왜 이 아기가 표 끊으러 들어간 엄마 곁에 가겠다고 유리 문을 밀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순간 목이 매였다.
더 이상 여기 옆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계속되는 아기의 질문에 서너 번 그렇다고 답변한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아기는 계속 물었다. ‘엄마 아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말만 되풀이 한다.
슬그머니 옆에 있던 배낭을 들고, 아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에게는 아기 참 천사같네요 말하고 뒷자리로 옮겼다.
여기서는 눈물 좀 흘려도 들킬 일이 없을 듯 싶었다.
저렇게 착하게 생기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려구, 그렇게 착하게 생겼어...
착한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이 너무도 서럽고 슬펐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도 서러웠다.
목장갑이 젖었다.
일동에서 요란스럽게 치장한 중년 주부 3명이 올라탔다.
그 중 한 명은 큰 목소리로 통화상의 오빠라는 사람과 통화 하면서 올라탔다.
첫댓글 배고프다. 중간정도 읽다가 시간나면 다시 읽기로 했다. 마우스 휠 28번은 돌려야 할 것 같다. 토요일날 만날 수 있도록 몸 건강하고.
허견도 그곳에서 군생활 했나 보네? 나도 그 근처 탱크부대에 근무했었지.....쩝
몇년전 대성산옆 이름모를 산을 12시간 탄것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그때 길도 잊어 해가 진후에야 내려왔다 울트라 하는것 만큼 멋있게 다녀왔군!
밥먹고 나서 마지막까지 다 읽었다. 나도 슬프다. 왜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건지. 한 숨이 나온다. 아니 숨이 꽉 막히는 것 같다. 그래도 살자. 사는 날 까지.
지난 번 번개 때 홀로 산행을 즐긴다드만 이 산행기 어디를 봐도 동행 얘기는 안 나오누만. 나는 연년생으로 아들만 둘인데 큰놈이 아파 돌도 안지난 작은 놈을 입원 할 때마다 친가에 처가에 외삼촌 집에 맞기고 올 때 마다 눈물을 흘렸었는데 옛날 생각나게 하누만.
야, 창수야, 우째 지내노? 함 보자. 여수 한 번 더 온나? 니 글은 너무 길어서 다 못읽었다. 미안.
에휴~~ 이글 읽어보구 놀자판 내글 올릴걸....
내 처가집이 그곳이다 신철원 중학교 옆
여수 함 가야지. 지리산 백무동에서 올라가 중산리로 내려와 삼천포로 빠졌다가 여수로 함 가야지. 함 보자.
다음 산행기는 프롤로그, 등산, 하산, 에필로그 이렇게 4부작으로 올려라. 탈의실 짓는데 몇 해 걸리남? 2부는 언제 나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