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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세계> 2011년 6월호
서양에 부는 차 바람:
차(茶)와 커피(豆)의 길항사
고 영 섭
1. 먹고 마시는 것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먹고 살며 무엇을 마시고 살아갈까. 우리는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신다. 음식은 씹어서 먹고 음료는 들이켜 마신다. 직립 전후의 사람들은 주로 나무의 열매를 따서 씹어 먹었다. 정착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풀의 열매도 따서 씹어 먹었다. 풀의 열매는 쌀(보리)과 밀(옥수수) 및 감자와 콩 등이 주류였다. 육지의 사람들은 풀의 열매를 주로 섭취했다. 물가의 사람들은 틈틈이 고기와 생선을 먹었다. 점차 농경과 유목을 하면서 그들은 쌀(보리)과 밀로 만든 음식과 치즈와 차를 주로 먹고 마셨다.
사람들은 자연을 향해 해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였다. 생산된 쌀(보리)로는 밥과 떡과 술을 만들었고, 밀로는 국수와 파스타와 빵을 만들었다. 소나 야크의 젖으로는 치즈를 만들었고, 치즈를 끊인 물에 찻잎을 넣은 차를 마셨다. 쌀(보리)과 밀(옥수수)은 유럽과 아메리카로 건너가 다양한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아메리카인들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처럼 빵과 파스타 및 치즈와 버터를 주로 먹었다. 아울러 고기와 생선과 채소를 곁들여 먹었다. 그리하여 인류 초기 문화의 중심에는 제식과 축제의 매개물인 ‘씹어서 먹는’ 음식인 밥과 빵들 및 ‘들이켜 마시는’ 음료인 차와 술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밥을 먹고 난 뒤에 숭늉과 냉수 및 차를 마셨다. 반면 서양에서는 빵을 먹고 난 뒤에 우유나 쥬스 그리고 맥주(커피)를 마셨다. 밥에서 나온 숭늉과 우물에서 나온 냉수와 달리 차는 ‘수행문화’와 ‘대화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동시에 소(양)에서 나온 우유와 과일에서 나온 쥬스(와인)와 달리 커피는 ‘소비문화’와 ‘대중문화’의 기호가 되었다. 이들 대부분의 음식과 음료들은 동물과 식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동물성을 주로 섭취하는 이들과 식물성을 주로 섭취하는 이들 사이엔 커다란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이처럼 어느 것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 문화의 구심과 원심이 생겨났다.
최근 차의 문화를 주도해 왔던 한국 불교계의 선방의 문화 지형이 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한동안 선방은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1)의 ‘끽다거’와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의 ‘호떡’을 매개한 차선일미(茶禪一味)의 선풍(禪風)을 통해 우리의 사상계와 문화계를 주도해 왔다. 그런데 차를 매개하여 사상계와 문화계를 주도하며 고급문화를 생산해 왔던 불교계 선방(禪房)이 요즈음 서양 문화의 기호로 상징되는 커피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고 한다. 동양 ‘정신’(精神)의 아이콘으로 상징되는 ‘차’를 통해 사상계를 주도했던 불교계가 서양 ‘기호’(嗜好)의 아이콘으로 상징되는 커피에 몰입하는 현상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불교계 선방이 동시대의 사상계와 문화계의 주도자라는 자긍심을 버리고 스스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를 추수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방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가난한 선방에서 도인이 나온다”는 옛 금언을 그리워하는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2. 정신(精神)과 기호(嗜好)
정신문화든 대중문화든 그 문화 속에는 일정한 지향이 담겨있다. 정신문화는 정신의 지속성을 저변에 깔고 있다. 반면 대중문화는 소비의 일회성을 바탕에 담고 있다. 선의 정신 혹은 차의 마음은 화두 혹은 차에 담긴 색(色)과 향(香)과 미(美)의 지속적인 고양을 통해 수행자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차의 마음 혹은 차의 정신을 환기시키는 대표적인 예는 선종의 ‘차선일미’(茶禪一味) 가풍이다. 동아시아 선종사를 돌아다보면 차 한 잔을 마시는 가운데에서도 선의 정신과 차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2004년 중국 저장성 여요현(餘姚縣)의 전라산(田螺山) 하모도(河姆渡)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6,000∼7,000년 전의 차나무 뿌리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집단 거주지 안에서 재배된 ‘산차(山茶)’의 뿌리였다. 이 차나무의 발견으로 인류는 육천 여 년 전부터 차와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차를 마셔 왔다.
차의 비조인 신농씨에 의하면 ‘차’는 본디 약초였다. ‘차’자에는 이 ‘약’자의 초두(艸=草) 밑에 풀들의 상형이 빠진 자리에 ‘사람’(人)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차나무의 잎이 ‘약초 중의 약초’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동이족(東夷族)의 시조로 알려진 그는 4,700여 년 전에 백성을 교화시켜 농업을 일으켰기에 ‘신농씨’(神農氏)라 불렸다. 또 그는 불의 사용법을 가르쳐 ‘화덕왕’(火德王) 또는 ‘염제’(炎帝)라고도 불렸다. ‘농사의 신’이란 이름처럼 그는 약초에도 달인이었다. 신농씨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풀들 중 하루에 100가지가 넘는 초목 잎을 씹어 맛을 보고 직접 독초(약성)를 가린 뒤 약을 만들어 백성들을 치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독초를 먹고 중독이 되었다. 우연히 향긋한 냄새가 나는 차나무 잎을 먹었더니 배가 편해지고 독성이 풀어져 몸이 나았다. 때문에 그는 이 나무를 ‘사’(査, 풀명자나무)라고 불렀다. 이후 이 차나무는 약용(藥用)으로 쓰였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다성인 육우(陸羽, 733~804)는 차의 약리적 가치에 대한 깊은 인식 속에서 『다경』(茶經)을 지었다. 그는 “만일 열이 나서 갈증이 생기거나 고민이 있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눈이 깔깔하거나, 사지가 번거롭거나, 뼈마디가 쑤시면 네댓 모금만 마셔도 제호(醍醐) 감로(甘露)와 더불어 손색이 없다. 또한 차를 음료로 삼은 것은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어 주공에 이르러서 널리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차는 이러한 약리적 가치를 넘어 ‘도’(道)와 ‘예’(藝) 혹은 ‘심’(心)과 ‘신’(神)과 결합하여 정신적인 가치로 승화되어 왔다. 여기에서 ‘차심’(茶心)과 ‘차신’(茶神) 혹은 ‘다예’(茶藝)와 ‘다도’(茶道)의 개념이 생겨났다.
또 육우는 『다경』에서 “차는 혼자 마시면 탈속하고[一人神], 두 사람이면 한적하여 좋고[二人勝], 서너 명이면 즐기고[三四人趣], 대여섯 명이면 들뜨며[五六人泛], 일곱 여덟 명이면 베풀고[七八人施], 그것을 넘으면 또한 잡(雜)스럽다”고 했다. 이에 대해 초의(草衣)는 풀이하기를 “혼자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 하니 신비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면 ‘승’(勝)하다 하여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서너 사람이 모여 마시면 그냥 차가 좋아서 마시는 것이고, 대여섯 이상이 모여 마시면 평범한 음료수를 베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초의의 말처럼 혼자 마시는 차인의 ‘차 정신’[茶神] 혹은 ‘차 마음’[茶心]은 곧 수행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차가 커피와 같은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님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차는 오랫동안 문화콘텐츠를 축적해 오면서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확보해 왔기 때문이다.
3. 차 마시는 마음(茶心)과 정신(茶神)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어 수행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불교의 선가(禪家)에서는 도를 닦는 주요 기제로서 차를 활용해 왔다. 중국 당·송 대 이후 선가에서는 ‘선과 차는 둘이 아니다’는 인식 아래 ‘차선일미’(茶禪一味) 혹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이 널리 전해졌다. 선 수행에 있어 차는 필요조건이었으며, 차 수련에 있어 선은 충분조건이었다. 때문에 차를 마시고 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선을 하면서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송대의 선사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은 일본인 제자에게 ‘차선일미’(茶禪一味)의 구절을 써 주었다. 이후 우리는 ‘선’과 ‘차’ 혹은 ‘차’와 ‘선’을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선종사의 기린아인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8~788)의 삼대 고족인 서당 지장(西藏 智藏, 735~814)과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와 남전 보원(南泉 普願, 748~834)은 남종선의 독자적 가풍을 열었다. 경(經)은 서당에게로, 선(禪)은 백장에게로 돌아갔고, 차는 남전(南泉)을 거쳐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1)과 신라의 철감 도윤(澈鑒 道允, 798~868)에게 돌아갔다. 특히 조주는 관음원(현 伯林禪寺)에서 ‘끽다거’(喫茶去) 공안을 통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차 한 잔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게 했다. 그의 ‘끽다거’는 이후 ‘다선일미’와 ‘다선일여’ 등의 가풍으로 계승되면서 선과 차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경계가 선이 지향하는 무분별(無分別), 무집착(無執着), 무소유(無所有)의 경계와 합치된 진경으로 살아났다. 철감 도윤 역시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 세력의 서남해 영향권 안에 있는 무주 일대의 쌍봉난야(雙峰蘭若)에 머무르면서 선풍과 차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렇게 선풍과 차풍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선과 차가 동일한 흥취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근원적인 통로는 곧 선의 세계[禪境]와 차의 세계[茶境]가 추구하는 정신적인 경계였다. 조주는 원주(院主)가 막 분별의 고해에 떨어질 찰라에 ‘차나 한 잔 들게!’란 지혜의 언어로 그를 구제해 내고 있다. 선에서는 일체의 생각과 분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은 일체의 의혹과 근심을 씻어내고, 일체의 망상을 털어내고, 진실하고 순박하게 당하(當下, 當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전광석화처럼 펼쳐지는 일문일답의 순간 속에서 장차 잃을지도 모를 마음을 일깨웠던 것이다.
조주는 일찍이 “만일 근기를 따라서 사람을 제접한다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생기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를 가지고서 사람을 제접할 따름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분사’는 현재 진행 중인 것이며 활발발(活鱍鱍)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자기 마음[自心現量]이며 연기된 제법의 진실한 모습[諸法實相]인 절대의 마음을 일컫는다. 조주는 이러한 절대적인 경지와 일상적인 경지를 빈틈없이 차 한 잔으로 연계시켰다. 이것이 다선일미의 진제이며 다도 정신의 원천이다. 이러한 ‘차신’(茶神) 혹은 ‘차심’(茶心)에 커피를 마시는 ‘두심’(豆心) 혹은 ‘두신’(豆神)이 필적할 수 있을까.
4. 차의 바다(體)와 커피의 파도(用)
문화가 삶의 형식이자 태도라면 삶은 문화를 통해 표출된다. 차의 문화(體)와 커피의 문화(用)의 구도 아래 우리는 이 두 아이콘을 통해 음료의 몸체(體)와 몸짓(用)을 형성해 오고 있다. 알다시피 미국 독립의 결정적 계기는 ‘차’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찍이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이 식민지 미국에 과도한 차세를 부과하면서부터 차의 역사는 새롭게 쓰여졌다. 당시 영국은 중국에서 값싼 잎차를 사들여 홍차로 만든 뒤 식민지 미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다. 과도한 차세(茶稅)와 부당한 정책들을 견디지 못한 젊은 미국 청년들은 영국 홍차를 보스톤 앞바다에 폐기하였다.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 12. 16)이다. 영국은 식민지 미국에 그 배상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대표 없이 세금을 낼 수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버텼다. 영국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급기야는 영미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전쟁에서 진 영국은 식민지 미국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독립(1776. 7. 4)하였다. 이후 미국은 차 보다는 가까운 남미에서 대량 공급되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와 커피로 상징되는 나라가 되어갔다.
중국 개항의 결정적 동기가 된 아편 전쟁도 사실은 ‘차’의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진 영국은 중국에서 값싼 잎차를 사 가서 만든 비싼 홍차를 더 이상 미국시장에 팔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영국은 인도의 아편을 수입해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 정부와 영국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 진 청나라는 전쟁 보상금으로 홍콩과 마카오를 영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현재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차를 매개하여 독립하였고 차를 대신한 아편 때문에 개항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서 역사의 한복판에는 ‘차’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스톤 티 사건’ 이후 영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홍차 대신 커피를 주로 마셔왔다. 하지만 커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양인들이 최근 불교의 선(젠)문화를 통해 동양의 차 문화에 다시 젖어들고 있다. 서양인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삶의 곳곳에서 선(젠)과 차를 만나고 있다.
미국의 수도이자 행정도시인 워싱턴(Teaism Restaurant, Teaism Shop)과 세계의 수도이자 금융도시인 뉴욕(Tea Gschwubendner, The Russian Tea Room)의 한복판에는 ‘찻집’과 ‘차 레스토랑’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교육도시인 보스톤의 하버드 대학 앞과 주변에는 찻집들(茶道분점, 茶道본점, 원불교 茶園, 대만 불광산사 茶園)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의 문만 열면 세계 각국인들이 찾아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점심을 먹으며 자신의 과제물들을 준비하고 있다. 워싱턴 한복판에 붙어있는 ‘티이즘’(Teaism)이란 용어는 ‘차를 이념으로 하는’ 가게(티이즘 샾)와 음식점(티이즘 레스토랑)의 상표이다. 가게의 브랜드를 ‘티이즘’이라고 붙일만큼 미국인들은 차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보스턴 티 사건’의 무대이자 뉴잉글랜드 지역의 중심인 보스톤은 한국차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보스톤 웨이크필드 문수사(文殊寺)에는 차문화 운동을 통해 우리 차의 르네상스를 연 다승(茶僧)이자 선승(禪僧)인 도범(道梵) 스님이 주석하며 차와 불교사상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도 1학기 하버드대 제임스 랍슨 교수(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의 <선(젠)> 수업에 참여한 약 100여명의 학생들 중 약 2/3가량이 명상의 경험이 있을 만큼 불교와 선(차)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지난 20세기 내내 자기모멸의 터널을 지나며 자신의 가치에 대해 무지했다. 35년 동안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우리는 겨우 타력에 의해 해방을 맞이했으나 곧이어 다시 미국과 소련(중국)에 의해 남북으로 쪼개진 채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전통과 자긍심을 돌아볼 여유를 지니지 못한 채 회의하며 살아왔다. 때문에 자기 것을 버리고 남들의 유행을 추수하였고, 동양의 정신문화를 버리고 서양의 대중문화를 닮으려고 애를 썼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남들 혹은 서양인들이 우리 것(고려불화, 고려청자, 이도다완, 전통사찰체험, 선차, 한식 등)의 가치를 발견하고 다가오자 겨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부끄러운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다. 동양의 상징인 ‘차’와 서양의 심볼인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이들 둘은 동양의 정신(수행)문화와 서양의 소비(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음료의 라이벌인 ‘차(잎)’와 ‘커피(콩)’의 두 아이콘은 지금도 세계인들의 몸과 마음속에서 길항하고 있다. 중국 운남성의 푸얼 차밭이 커피 밭으로 변해가는 현실과 서양에 부는 차바람을 동시에 바라보며 우리는 어느 쪽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