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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제9일차 내가 머문 곳은 인구 500명에 불과한 Granon이라는 작은 마을 이었다. Najera에서 Granon까지 거리는 27km 가량 된다.
순례 길에서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물론 걷는 구간의 지형과, 기상상태 그리고 걷는 사람의 당일 몸 컨디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내가 경험 한 바로는 지형이 평이 하고 기상에 큰 이변이 없는 날에도 하루 30km를 걷기가 쉽지 않았다. 30km를 걷는데 평균 8시간쯤 소요 되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조깅하는 속도로 5키로미터를 천천히 달리는데 30분 정도 걸리고 산책하는 속도로 걸으면 한 시간 남짓 소요된다. 그러나 최소 10kg의 배낭을 메고 간간히 스냅사진을 찍으면서 주변 풍광을 감상하면서 걷는데 아무리 평지라도 5 키로미터 당 1시간 20분 정도 잡아야 무리가 없다. 간식을 먹는 시간, 쉬는 시간, 성당이나 수도원 등을 들려서 참관하는 시간 등을 생각하면 하루의 일정을 30Km로 잡을 경우 10시간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안전 할 것 같다.
Granon에 도착 하기 전에 Santo Domingo de la Calzada라는 마을을 거치게 된다. 순례 길에서 Domingo Garcia성인 이야기와 이 마을에서 일어난 기적의 전설을 빼놓을 수 없어 살펴보려고 한다.
Domingo Garcia는 1019년 부근 Viloria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양치기를 그만두고 수도승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수학했으나 수도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034년에 Oja강 주변 숲 속에서 은수 자로 지내게 된다. 11세기 이전에 Najera지역 숲 속은 산적들의 소굴이었다. 그는 순례자들을 위해 Oja강에 다리를 놓고 Najera에서 Redecilla에 이르는 37km구간의 숲을 정리하여 순례 길을 만들었다. Domingo는 말년에 마을에 교회를 세우는데 전념했고 1109년 그가 죽자 그가 세운 교회에 묻혔다.
순례 길의 개척자인 Domino성인의 이름을 딴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기적의 전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 함께하는 독일의 순례자 가족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이 마을 여관에서 하루 밤을 머물게 된다. 이 마을 여관 주인의 딸이 첫눈에 반하여 독일 순례자 아들에게 청혼을 하게 되었고 아들이 거절하자 여관주인의 딸이 복수의 계략을 세우게 된다. 여관주인의 딸이 친구를 시켜 교회의 은잔을 훔쳐 젊은이의 행낭 속에 넣은 후 영주에게 신고 하게 된다. 청년이 유죄로 확정되자 마을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 진다. 중세 때에는 시민들에게 죄의 대가를 경고하기 위해 교수형에 처한 죄인을 교수대에 방치하는 관습이 있었다.
남은 독일인 가족은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마치고 귀로에 Santo Domingo de la Calzada마을에 들러 아들이 처형된 현장을 찾게 된다. 놀랍게도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반기며 자신은 처형 당시 도밍고 성인이 그의 다리를 받치고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젊은이의 부모가 영주를 찾아가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침 통닭 두 마리를 구우며 자신의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영주가 당신 아들이 마치 구운 통닭같이 살아 있겠지 라고 젊은이의 부모에게 조롱했다. 영주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구운 통닭들이 날갯짓 하며 소리를 질렀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do canto la gallina depues de asada” “순례길 위에 도밍고 성인이여 이후로는 통닭 요리가 다 되면 닭이 울 겁니다”
이렇게 하여 처형된 젊은이가 누명을 벗고 부모님과 함께 다시 산티아고로가 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순례하는 사람을 아무도 함부로 해코지 하지 못한다 는 경고 메시지의 성격이 강하다.
제9일차 Granon에서 일박을 하고 내가 머문 촌장 집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함께 식사를 하던 미국인 Evans 씨가 Rabanal del camino와 Ruitelan에 있는 자신이 아는 알베르게 두 곳을 자신의 명함 뒷면에 적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어제 저녁 먹은 사과 파이가 맛있었다고 마드리드출신 요리사에게 말하자 그가 남은 파이를 정성스럽게 금 박지에 싸서 가다 간식으로 먹으라고 건네 주었다. 이것이 내가 길 위에서 받은 네번째와 다섯번째 선물이다.
나는 Evans씨 일행과 마드리드 출신 요리사에게 민속소품을 건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길 위에서 만난 낮 선 사람들의 작은 친절에서 순례자들은 큰 위로와 작은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Granon을 지나면서 첫번째 만나는 마을이 Redecilla이다. 여기서부터가 행정구역상으로 Castilla-Leon 자치주가 시작되는 지역이다. 중세 한때 까스티야와 레운 왕국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1038년 페르난도 1세가 두 왕국을 합쳐 국토회복 운동의 중심세력으로 기반을 다져 선봉에 나서게 되었다. 스페인어를 뜻하는 “에스빠뇰”은 과거 막강했던 가스띠야 왕국에서 사용했던 언어인 “까스떼야노”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페인의 공식언어가 까스떼야노 이외에 세개가 더 존재한다. 그것들은 갈리시아 지역에서 사용하는 “가예고”, 까딸루냐 지역의 “까딸란” 그리고 바스크지역에서 바스크 인들이 사용하는 “에우스께라”이다.
Castilla는 스페인어로 성(城)을 뜻한다. 까스띠야와 레온이 합쳐지기전 까스띠야 왕국의 알폰소 II세가 8-9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도들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한 지형에 많은 방어용 성을 구축하여 요새화 했다. 그 결과 스페인 전역에 약 1만개의 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까스띠야에 몰려 있다. 순례 제10일차 드디어 기독교 순 혈통주의의 본고장인 까스띠야 대지에 발을 들여 놓았다.
711년 서고트족의 내분으로 이슬람세력이 아프리카북부를 통해 스페인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스페인 땅에 살았다. 이슬람세력이 스페인에 오기 전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였다. 순 혈통주의를 주창하는 기독교도들이 이슬람세력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국토를 되찾기 위해 800년동안 이슬람세력과 전쟁을 벌이는데 이를 “국토회복전쟁(Reconquista)”이라고 한다.
스페인 통치자들은 국토회복전쟁에 참가한 기독교도에게 보상의 뜻으로 “이달고(Hidalgo)”라는 하급 귀족 작위를 부여 했다. 이들 중에는 12세기 국토 회복전쟁의 영웅인 엘 시드가 있다.
순례자에게 그날은 그날에 적합한 길동무가 생기기 마련이다. 순례 10일차 길동무는 스페인 부르고스 출신으로 지금은 불란서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Manuel이다. Manuel은 알베르게 소개등 나에게 참고가 될만한 부르고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Manuel이 중도 마을에서 머문다고 하여 그와 작별하고 나는 해발 900m 가까이 되는 고지대에 있는 villafranca Montes de Oca라는 마을까지 갔다. 거기서 San Anton Abad라는 알베르게에 등록하였다. 이 알베르게는 과거 순례자 병원을 개조한 곳으로 호텔시설에 부속되어 매우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순례 제 10일차 일정은 비교적 짧게 잡았다. 그 다음날 높은 산을 앞두고 힘을 비축해야 하고 얼마 전 왼발가락에 생긴 작은 물집을 관리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날씨가 매우 쌀쌀 했지만 슬리퍼를 신고 약 500미터 가까운 지점에 있는 빵집과 동네 매점에 들러 다음날 먹을 간식과 물집이 생긴 부위에 부착 할 Compeed라는 상표의 밴디지를 샀다.
며칠 전 길을 가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간 느낌이 들어 여러 번 신발을 벗어 이물질을 털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 알베르게로 들어와 발을 관찰 해보았더니 왼쪽 발가락에 조그만 한 물집이 자라고 있었다. 그날 즉시 바늘을 찔러 터트리고 위생 밴디지로 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싸맨 상태이다. 그 이후 환부가 악화 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아문 상태도 아니었다. 그 당시 매점이 없어 약 이틀 정도 지난 그날에야 매점에서 물집관리에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소문나 있는 compeed를 구해 환부를 보호해 주었다. 어떤 순례자는 환부에 바람이 통하지 않아 상태를 더 악화 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compeed의 효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순례 출발 당시 집에서 신고 다니던 오래된 산달을 가져 갔으나 론세스발 알베르게에서 끈이 떨어져 나가 버리게 되었다. 팜프로나에서 모자를 사면서 샌들이 없어 슬리퍼를 사게 되었다. 그 이후 슬리퍼를 신고 알베르게에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동네 가게나 외부에 있는 식당에 가기에는 매우 불편했다. 우선 슬리퍼는 그 구조상 양말을 신을 수 없어 외출 시 추운 날씨에 맨발을 노출 시키는 잔인함을 아무 죄의식 없이 자행해야만 했다. 두번째 결점은 발목과 발뒤축을 잡아 주는 끈이 없어 끌면서 다녀야 하는데 좀 떨어진 곳을 가기에 매우 부적합했다. 이른 불편에도 불구하고 순례 끝날까지 부피와 무게에 있어 상대적인 이점이 있는 슬리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고생을 사서 한 셈이다..
비록 편의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많은 이층 침대가 한방에 놓인 알베르게 이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한 깨끗한 환경이 마음에 들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침대 위에 집사람이 만들어 준 작은 꽃무늬가 있는 보라색 침대 커버를 깔아 놓으니 마치 일류 호텔에 여장을 푼 귀빈처럼 환대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순례 제 11일차 아침 일찍 출발 준비를 하는데 부부가 함께 순례중인 인상이 좋은 아이랜드 순례자가 밖에 지금 눈이 오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입고 흰 눈이 덮인 오카산 언덕(해발 1100미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라리오하 자치주의 평원에서 나는 파란 밀밭과 노란 해바라기 꽃이 연출하는 색채의 조화가 보여 주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매료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곳에서 눈 덮인 숲과 나무 사이를 걸어며 마치 구름 기둥 사이를 헤쳐나가는 외계인 같은 황홀경에 서 헤어 나지 못하고 있다.
알베르게를 출발 한지 한 시간 반쯤 지나 후안 오르테가 마을에 도착 했다. 성인 후안은 1080년 이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제서품 후 도밍고 성인과 함께 순례 길에 다리를 놓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순례자를 돕다 1163년 에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그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경당에 묻혔다. 1477년 가돌릭 신자인 이사벨라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기도한 결과 결혼 후 7년간 불임이었던 여왕이 왕자를 얻게 되었다. 여왕이 산 후안 성인에 의한 기적으로 인정한 후 많은 재물을 희사하였다. 여왕의 후원으로 성당을 증축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후안 성인이 지은 성당을 찾으면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자도 임신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지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후안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 아타푸엘카 마을을 지나면서 독일 함부르그 출신 아힘을 만났다. 아힘은 순례 제7일차 알베르게에서 잠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아힘은 산티아고를 3번이나 걸은 경험 있는 순례자이다.
그날 나는 41키로 미터를 걸어 매우 고단 한 상태였다. 아힘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부르고스 초입에서 구 시가지까지 시각적으로 가깝게 보이지만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서 위성도시외각에 있는 첫번째 바에서 30분 이상 휴식을 취했다.. 제11차 여정은 아침 7시 30분 출발하여 저녁 6시경 부르고스 시립 알베르게에 등록을 마치면서 끝이 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순례자가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열리는 순례자를 위한 축복 미사에 참여 하는 일이 다. 알베르게에서 배정된 침대로 올라가 배낭을 내려놓고 침낭을 침대 위에 깔아 놓았다. 그리고는 급히 샤워를 하고 순례자 축복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성당으로 달려갔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이 순례자를 제단 앞으로 불러 모은 후 특별히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미사를 마치고 퇴장하시는 신부님에게 한국식으로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했더니 무이비엔 ( 순례 잘하라)라고 축복해 주셨다.
부르고스는 해발 850미터나 되는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의 기원은 884년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백작이 언덕 위에 작은 성곽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11세기 피르난도 1세가 자신을 까스띠야 의 왕으로 선포하고 1035년 부르고스를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1222년 프랑스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13세기 말에 중심건물이 완성되었다. 14세기에 부속건물이 완성되었다. 성모마리아를 모신 대성당은 부르고스를 상징하는 건축불로 스페인 고딕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미사를 마치고 수퍼에 들러 조리된 파에야를 사가지고 식당으로 와 보니 라나소냐에서 만난 불가리아 아가씨 스테파니가 스페인 순례 객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합석하여 파에야를 먹고 한참 동안 머물면서 스테파니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스테파니는 다리가 아파서 앞으로 어떤 구간은 버스를 타면서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레온부터는 반드시 자력으로 걸어서 산티아고에 입성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음속으로 그녀의 소망이 꼭 이루어 지기를 기원했다.
소등시간이 임박하여 스테파니와 작별을 고하고 침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오늘의 교훈: 초대하건 초대하지 않건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다음주에 그 길에서 네가 만난 사람들 -일곱번째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