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반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동화시키고자 문화말살정책을 강화했고 이에
조선일보는 그 문화를 지키려 맞대응했다. 조선의
학술문화를 발굴 선양 보급하는 조선학(朝鮮學) 운동을 비롯해
한글 보급운동,향토물산 장려운동 등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조국애를 대중가요를 통해 심으려는 애향가(愛鄕歌)
가사 현상모집을 했다. 이때 입상한 가사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 목포가
고향인 18세의 무명가수 이난영이 부른 이 노래
는 억눌린 채 잠재된 민족의 공감대에 불을 댕겨 발매되자마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당황한 총독부는 발매 금지시키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를 했다. 이 노래의 가사 가운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가 조사의 초점이었다.
노적봉은 유달산의 별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적 섬멸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산이다.
곧 삼백년 원한이란 300년 전
풍신수길(豊臣秀吉)의조선침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대목이 암암리에
민족공감의 고리 구실을 한 것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원한’이 아니라 남녀사랑을 상징하는
‘원앙’이라고 변명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삼백년 원한 품’은 ‘三柏淵 願顔風’ 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게 바꿔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곡절이 담긴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노래가
아니라 민족 저항의 표출이었다.
민족가수로 아로새겨진 이난영은
작곡가요 악극단을 거느린 대중가요의 대부였던
김 해 송과 결혼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의 납북으로
생이별, 자녀에게 노래를 가르쳐김시스터즈로
미국에 가 활동하게 했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시신은 파주 광탄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다.그 이듬해에 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져 그녀가 읊었던
저항정서만은 귀향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연고 없는 땅에서 방황해왔다.
그 고독한 영혼을 40년 만에야
태어난 고향이요 노래의 고향이기도 한
목포로 이장해서 고향을 찾았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라는
노래비 속의 구절을
‘당신이 흘린 눈물은 보석입니다’로
바꿔 새겨야 할 판이다.
2005년 9월 22일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서
동영상 보기
박시춘의 반주에 맞추어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이난영의
모습입니다. 음악을 끄시고 동영상을
전체화면으로 보셔요,
인난영 ! 1930년대초부터
1950년대까지 최고의 가수 반열에 올랐던
이난영은 1934년 목포의 눈물로 선풍을 일으킨
이래 일생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고 그의 딸 김씨스터즈는 해방후 가장
먼저 등장한 보칼 그룹이 되었습니다.
이난영이1965년 4월 11일, 세상을
뜬 이래 오랫동안 타향땅 파주에 머물던 혼을
2003년에 목포에 있는 그의 생가에 소공원을 조성하고
작년 (2006년) 3월 고향인들의 주선으로 고향 목포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이난영 공원을 조성하고
그해 4월 11일부터 문을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