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틀었더니 축구 경기 결과가 보도되고 있다. 2004 아시안 네이션스 컵에서 우즈베키스탄이 이라크를 1:0으로 이기고 투르크메니스탄은 사우디아라비아와 2:2로 비겼다고 한다.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부터 고리끼 문학 대학(Литературный Институт имени А. М. Горького)에서 수업을 시작한다. 앞으로 약 2주간 오전에 3~4시간은 이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학교로 가는 길은 무척 험난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데 하필 이 때가 출근 시간인 것이다. 서울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러시아에서, 아니 내 전 생애를 통틀어 이런 지하철 인파는 처음인 것 같다. 지하철 타는 것도 아슬아슬하고, 겨우 지하철에 탔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리 끼이고 저리 끼이고 말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것도 골칫덩어리다. 인적 드문 내 고향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다.
9시가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한다. 우리는 선생님을 소개받는다. 우리의 선생님은 Нина Илларионовна Корнеева(니나 일라리오노브나 꼬르네예바). 우리 할머니 뻘이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갓난아기같다.
우리는 2주간 생활하게 될 교실로 안내된다. 거대한 강의실을 기대했건만 꿈은 1초만에 깨져버리고 만다. 교실이 얼마나 비좁은지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교실보다도 훨씬 좁다. 설마 여기가 대학 강의실은 아니겠지.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고 선생님은 곧바로 수업을 시작하신다. 앗참, 선생님은 자기 집 전화번호 적어주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늘 수업 텍스트는 "Какие мы?"이다. 선생님은 몇몇 단어들을 손수 칠판에 적으신다. 그런데 아앗, 칠판 지우개는 보이질 않고 수건으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칠판을 수건으로 지우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깨끗이 청소할 때 빼고.
잠깐 교실을 둘러본다. 게르쩬의 초상화가 보이고 아이뜨마또프에 관한 책도 놓여 있다. 칭기즈 아이뜨마또프……. 끼르기스딴 출신의 작가. 지금은 벨기에 주재 끼르기스딴 대사. 한국에서 이미 그의 몇몇 작품을 읽은 바 있다. 아이뜨마또프가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나는 니나 선생님께 오늘 배운 텍스트 복사를 부탁한다. 버릇없게도, 선생님께서 다녀오실 줄로 알았는데… 선생님은 나를 앞장세우신다. 지깐뜨에 가서 복사를 부탁한다. 다른 여자 분이 복사를 해주시는데 총 3장이다. 우리 수업에는 4명이 참여하는데. 니나 선생님께 슬쩍 얘기했더니 1장은 두 명이서 나눠 가지라며 그냥 가자고 하신다. 또 부탁하면 그 사람이 귀찮으니까. 복사해 준 사람이 윗사람인 모양이다.
낮 12시. 첫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맥도날드로 향한다. 거기서 점심식사를 주문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한국에서 패스트푸드점을 거의 이용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몇 번 이용한 경험으로는,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그 때 받아가는 식이었던 것 같다. 대도시는 어떤 식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게 없다. 그 자리에서 주문하면 음식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음식이 다 나오면 식판을 들고 줄을 빠져나간다. 그제서야 뒷사람이 주문을 시작한다. 운이 나쁘면 앞에 두 세 사람만 서 있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맥도날드에서 우연히도 한국 사람 세 명을 만났다. 한국 사람일까 아닐까, 처음엔 서로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온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뭣 때문에 왔는지, 아니면 여기에 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반갑다.
그런데 맥도날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아주 달콤한게 정말 맛있다. 난 한국에서도 이런 아이스크림을 맛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맥도날드에서의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낮 1시쯤 우리는 시장으로 향한다. 근처 Пушкинская(뿌쉬낀스까야)역에서 Чеховская(체합스까야)역으로 갈아탄 다음, 곧장 Петровско-Разумовская(뻬뜨롭스까-라주몹스까야)역까지 간다.
Петровско-Разумовская(뻬뜨롭스까-라주몹스까야)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Ярмарка(야르마르까-도깨비 시장)는 그저께 신발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 박 선생님과 함께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온다. 먼저번보다 더 극성이다. 한국에서 왔냐며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많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지나친다. 그럼 그들은 뭔가 아쉬워 더 붙잡으려는 눈치다.
물론 모두가 우리의 국적을 알아맞추는 것은 아니다. 중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오늘은 베트남에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 중 하나인 끼르기스딴에서 왔냐고 말을 건네는 사람도 보인다. 어쨌든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내국인과 외국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가격이 딱히 정해져 있는 백화점이 아니라 시장이기 때문에 가격은 얼마든지 흥정이 가능하다. 나 역시 그동안 눈여겨 봐왔던 티셔츠를 하나 샀다. 겉에 С.С.С.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티셔츠.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약자이다. 소련의 상징, 낫과 망치도 그려져 있다.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종종 이 티셔츠를 입고 있는 걸 봐왔다.
이 외에도 예쁜 옷이나 신발이 상당히 많다. 자꾸만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다. 유명 스포츠 선수 유니폼도 많이 걸려 있다.
시장은 상당히 활기차 있다. 중산층 이하로 보이는 상인들도 삶에 지쳐 불만으로 가득한 표정이라기보다는 다들 밝은 표정들을 띄고 있다. 여기저기 물건 값을 흥정하려는 시민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고향 마을에서 느낀 정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오후 2시 20분. 우리는 의류 시장 견학을 마치고 Тимирязевская(찌미랴젭스까야) 역 근처의 식료품 시장으로 향한다. 호기심많은 할머니, 우리에게 끼따이(중국)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까례야(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런 나라도 있느냐 하는 표정이다.
여기저기서 과일의 싱그러운 향기가 코를 찌른다. 보기만 해도 탐스럽다.
여기도 역시 좀전의 의류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활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하나라도 더 깎아보려 애교를 부리는 사람들, 앞을 서성대는 우리에게 장사 방해하지 말라고 굳은 표정을 보이는 사람들……. 이게 인생이 아니고 무엇일까.
낮 3시 30분이 되어 우리는 숙소로 돌아온다. 짐이 많은 관계로 오늘은 지하철역에서 기숙사까지 Троллейбус(트롤리버스)를 탄다. 버스 안에 사람이 상당히 많다. 물론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만큼은 아니지만.
난 오늘 특별한 초대를 받았다. 초대라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자진해서 간다고 한 것이지만. 조성연 선생님께서 다른 분들과 만나 음악회를 가기로 약속했는데 거기 나도 동행하게 되었다.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쉴 겨를도 없이 5시가 되어 곧장 기숙사를 나선다. Дмитровская(드미뜨롭스까야)역에서 Менделеевская(멘델레옙스까야)역까지, 거기서 Новослободская(나바슬라봇스까야)역으로 갈아탄 다음 깔쪼 선을 타고 다시 Павелецкая(빠벨레쯔까야)역까지. 도시의 중심을 순환하는 깔쪼 선은 각 역마다 독특한 개성과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우리는 Павелецкая(빠벨레쯔까야) 역사 내에서 건국대 충주캠퍼스의 비딸리 교수님과 충북대의 올가 교수님, 그리고 한국 여대생 두 명과 만나 음악회로 향한다.
음악회는 저녁 7시 30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음악회의 테마는 Душа России(러시아의 정신). 러시아 민속 음악 공연이다.
음악회가 열린 장소는 Моско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Дом Музыки(마스꼽스끼 메쥐두나로드늬 돔 무즤끼). 강 위로 멋있는 다리도 보이고 여기저기 버티고 서있는 건물들은 상당히 세련되었다. 도로도 무진장 넓다. 우리 나라 서울로 따지면 강남 정도.
음악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홀에서 뷔페 식으로 돌아다니며 이 음식 저 음식을 간단히 먹는 시간이 있다. Сушка(쑤쉬까)라고 하는 도넛처럼 생긴 자그마한 과자가 상당히 맛있다. Пряники(쁘랴니끼)라는 달콤한 명절 과자도 있다. 그런데 음료수에 대한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 물과 오렌지 쥬스……. 나도 너무 목이 말라 그 경쟁에 끼어들었다.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이 음료수만 나오면 다들 본능을 드러내고야 만다.
아하, 남자는 모자를 벗는 게 에티켓이라고 한다. 난 얼른 모자를 벗는다.
이제 드디어 음악회가 시작된다.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전통 춤을 추기도 하고…….
악기 연주는 정말 멋있다. 친숙한 발랄라이까 연주 순서도 있다. 다른 악기들도 소리가 얼마나 이쁜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예쁜 소리를 내는 구슬이 떼굴떼굴 굴러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노래는 세 명이서 번갈아가며 부르는데 가창 실력이 뛰어난 건 당연한 일. 특히 O Sole mio(오 솔레 미오―오 나의 태양)를 부르고 난 뒤 엄청난 함성과 환호, 박수가 이어진다. 추측하건대, 많은 관객들이 이탈리아 출신인 듯 싶다. 그 중에 내 앞줄에 앉아 있는 어떤 여자는 공연 순서가 끝날 때마다 정열적인 목소리로 "브라보!"를 외치곤 한다.
전통 춤을 보면서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인간이 저렇게 한다는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하나의 서커스를 보는 것 같다. 아름답다. 의상은 계속 바뀌는데 한결같이 예쁘다.
이번 음악회의 티켓 값은 600루블. 우리 돈으로 약 2만 4천원. 각 지방색이 짙었던 훌륭한 음악회.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진지한 음악회 속에서도 관객들을 웃긴 장면이 하나 있다. 저녁 8시 30분 쯤 한 남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하더니 "Перерыв!"라고 외친다. 휴식 시간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또다시 진지한 발걸음으로 퇴장한다. 모든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 웃음보를 터뜨린다. 공연장 밖 홀에서는 인형, 스카프 등을 팔고 있다.
음악회 공연이 끝나고 일행과 함께 Кинотеатр(영화관) 내에 있는 Кафе(까페)에서 콜라와 피자를 먹는다. 영화관이 상당히 현대적이고 거대하다. 입이 딱 벌어져 닫히질 않는다. 난 한국에서도 영화관에는 거의 가보지 않았다. 잠깐 들어갔다고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만 소도시 수준의 영화관이 전부였다.
일행들과 헤어지고 조 선생님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졸음이 쏟아진다. 지하철 안에선 어떤 낯선 할머니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를 향해 뭐라고 중얼중얼거리시더니 성호를 한 번 그으시고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댄다. 나는 말도 못 알아 들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만 있다. 나한테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혼잣말을 하는건가. 아니면 혹 다른 사람한테 얘기를 하는 건가?
뜨롤리버스를 타고 기숙사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일단 박 선생님께 우리의 도착을 알린다. 그동안 우리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밤 늦게 외국인인 우리가, 그것도 여자와 청소년 둘이서 모스크바를 쏘아 다녔으니.
오늘은 정말 많은 것을 보았다. 앗차, 거대한 삼성 광고판도 많이 눈에 띄었다. 삼성 모델 중의 하나가 Елена Дементьева(엘레나 데멘티에바)이다. 러시아의 실력파 여자 테니스 선수. 요즘 러시아 여자 테니스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엘레나 데멘티에바도 그 활약에 보탬을 하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엘레나 데멘티에바는 여러 번 "큰" 대회에서 결승전에 올라놓고도 매번 러시아 동료 선수들에게 패해 항상 준우승에 머무는 것.
뜨롤리버스에는 대부분 LG가 새겨져 있다. Life"s Good. 물론 LG가 새겨져 있지 않은 버스도 있지만 LG와 함께 한국 과자가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뿌듯하던지.
앗참, 오늘 커다란 사실을 하나 배운 게 있다. 지하철 역 내부에는 Аптека(약국)와 Оптика(안경 가게) 등의 가게가 많이 있는데 처음에 난 얼떨결에 Оптика를 Аптека로 잘못보고 왜 약국에서 안경을 판매하는지 물어보고야 말았다. 처음엔 Аптека의 사투리 쯤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이런 우스운 일이……. 덕분에 하나 확실히 익혀 두었으니.
이것저것 떠올리며 침대에 눕는다. 음악회의 멋진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꿈 속에선 밝은 표정의 시민들이 시장을 누비고 있다. 모스끄바 밤 거리의 맥주병들도 보인다. 활기찬 시장과 어두운 밤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