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는 국내에서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 <원령공주>를 ‘내셔널리즘(nationalism)1)’의 시각에서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본인이 본 <원령공주>와 우리가 본 <원령공주>는 다른 것이다. 영화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이해가 달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원령공주>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 것이라면, 일본인이 본 것은 자국 중심의 '역사관’이다.
일본에서 <원령공주>가 흥행한 요인이자, 우리가 절대 놓쳐선 안 될 <원령공주>의 ‘네오 내셔널리즘(neo nationalism)’대해 살펴보자.
<원령공주>는 1997년 일본의 여름시즌 영화 흥행계를 평정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영화계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융단폭격 당한다. 1975년 사상 처음으로 외화에 시장점유율을 역전 당한 후, 현재까지 외화우위 시대 속에 일본영화 점유율은 30~40% 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1997년의 경우 연간 관람객수가 1억4천만 명으로 증가하여 일본영화 점유율이 40%대로 회복된다. 미야자키 에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상식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초메가톤급 히트의 영향이었다.
일본 국민 10명 중에 1명 본 <원령공주>. 23억 5천만 엔을 들여 만든 <원령공주>의 흥행수익은 3000억 엔에 이르고, 결국엔 일본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 자리에 오른다. 무엇이 일본국민을 그렇게 광적으로 극장에 가게 했는가!
영상업계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 결과적으로 양질의 작품 만들면 대히트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제작비만으로 <원령공주>의 대흥행을 설명할 순 없다. 같은 시즌 개봉된-막대한 제작비로 오락성을 극대화한-미국산 블록버스터들인 <잃어버린 세계>, <배트맨&로빈>, <헤라클레스>, <데이라잇> 등을 제치고 대히트를 구가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지는 원령공주가 얼마나 세련된 화면의 작품인가가 아닌 무슨 내용의 작품이냐에 있다.
여기서 <원령공주>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원령공주>의 무대는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혼란기의 무로마치 시대로서 죽음의 저주를 받은 용감한 소년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고대 이민족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시타카', 갑자기 마을을 습격해 온 다타리다미(저주신)를 퇴치한 아시타카는 그의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이끌려 가듯 연이어 사건의 와중에 휘말리고 만다. '아시타카'는 야마이누(산개)에 의해서 자라난 원령공주(모모노케히메)인 '산'과의 만남을 이루면서 사랑이 싹트고 분노한 신들과 인간과의 처철한 싸움에 휘말린다.
다타리가미를 무찌른 탓으로 오른팔에 죽음의 저주를 받은 아시타가는 에미시족 은신처의 무당 히사마로부터 서쪽으로 가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반자인 야크루(말과의 짐승)를 타고 서쪽을 향해 떠난다. 도중에 그는 이누가미(개신) 모로에게 습격을 당하고, 산골짜기에서 추락한 로코 등의 도움을 받아 제철공장 다타라장에 들리게 된다.
거기서 '아시타카'는 여자 두령 '에보시'와 만나 그녀들이 사철을 얻기 위해 시시가미의 숲을 파괴해, 나고신이라는 늑대신을 다타리가미(저주신)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밤중에 산이라는 소녀가 산개와 함께 다타라장(제철소)을 습격한다. 견신 모로노기미에 의해 자라난 '산'(원령공주)은 숲을 파괴하는 에보시를 증오한다. 아시타가는 에보시와 산의 싸움을 막으려다가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산을 등에 업고 다타리장을 탈출한다.
그런 아시타카를 산은 일단 죽이려고 하지만, 아시타카에게서 다른 인간들과 다른 선한 마음을 느꼈는지 그를 시시가미에게 맡긴다. 그리고 숲속에서 나타난 시시가미는 아시타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마침내 500세 노령의 늑대신 오코도누시가 숲을 파괴하는 인간들과의 싸움에 결판을 내기 위해 늑대신을 데리고 시시가미 숲으로 달려온다. 한편 악당의 무리를 이끈 에보시파 지코보는 불로불사의 힘을 지닌 시시가미의 목을 노리고 에보시와 결탁하여 그 준비에 착수한다.
아시타카는 어떻게든 인간들과 신들과의 싸움을 저지하려고 끼어들지만 싸움은 시작되고 만다. 산도 야마이누들과 오코도누시에 가세하지만 지코보들은 숲속의 신들을 죽이고 시시가미의 목을 잘라 손에 넣는다. 목을 잃어버린 시시가미는 자연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이는 디다로라보치로 모습을 바꾸어 인간들을 습격하기 시작하고, 아시타카와 산은 도망치는 지코보를 잡아 디다라보치에게 목을 되돌려준다.
그러자 디다라보치는 사라지고 숲의 일부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시시가미가 죽은 숲을 보면서 한탄하는 산에게 아시타카는 함께 살아가자고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그 때 아시타카의 저주받은 오른팔은 저주로부터 풀려나 새로운 삶의 길을 찾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령공주>는 ‘조엽수립 문화론(照葉樹林 文化論)2)’의 탈을 쓰고,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을 옹호한 것이다.
우리는 미야자키 감독의 <원령공주>를 감독의 다른 작품 <내 이웃의 토토로>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 이웃의 토토로>는 일본 영화 흥행 100위 안에 들지도 못했다. 따라서 일본영화 역대 흥행 1위라는 <원령공주>에 대한 일본인의 광적인 지지를 '조엽수림 문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일본의 ‘네오 내셔널리즘’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후지오카 노부가츠, 니시오 간지, 코바야시 요시노리 등으로 대표되는 ‘네오 내셔널리스트’들은 ‘일본인의 과거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직시하려는 태도’를 ‘자학사관’, ‘도쿄재판 사관’, ‘암흑 사관’으로 규정하고, 특히 1990년 대 들어와 활발히 전개된 ‘종군 위안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전쟁 피해자들의 고발과 비판에 대해 극히 반동적인 거부 태도를 취하였다. 즉,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본격적인 부정론은 획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문, 잡지, 만화 등의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여 ‘국민 정사(正史) 회복’을 대규모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긴키대학 교수인 오오코시 아이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97년 후반기에 히트한 ‘원령공주’라는 애니메이션 대작과 카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다. 두 작품 모두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분노의 폭발로 상처받은 ‘선량한 일본인’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속이 깊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란 그것으로 ‘결코 마음을 풀 수 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얼마나 잔인하고 무책임한 것인지를 이 두 작품은 드러내 보이고 있다.3)
<원령공주>를 일본의 근대역사의 전철 없이 본다면, 그것은 환경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령공주>의 본질은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에 대한 가해자의 자위적인 해석이다. <원령공주>는 이미지나 관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착시 같은 장난처럼 착각이 통용되고, 속임수가 난무하는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를 보자.
<원령공주>의 무대를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혼란기인 무로마치 시대가 아닌, 역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산업혁명기로 보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텐진조약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한다. 원래 일본은 철강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국의 요동반도에서 철강을 가져다 쓴다.
<원령공주>에서 제철공장 다타라장의 우두머리 에보시는 공장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 숲을 황폐화시킨다. 일본이 자국내의 혼란진정과 대륙지배야욕을 위해 아시아(숲)를 도륙하는 타당성이 주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일본의 산업혁명,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 발전한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5대 열강에 든다. 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아니라, 전쟁 그것이 목적이었다.
모로노가미(암캐)의 손에 자란 원령공주는 현재의 일본내 진보적 지식인들로-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보여진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들도 결국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사장연대 조직의 리더인 지코보는 외세(外勢)로 보여진다. 일본은 외세에 이용당하고, 이용하며 산업혁명기를 거친다.
주인공 아시타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 없이 저주를 받은 현재의 일본인이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타카는 사슴신에 의해 저주가 풀린다. 깨끗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숲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제철소로 돌격해 가는 멧돼지떼는-그러다 신기술로 무장한 에보시 일당에게 무참히 죽는 그들은-누구일까. 불쌍한 그들은 우리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해준 사슴신 시시가미가 은유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누가 일본을 용서해줬단 말인가. 그것은 시간일까? 아니면 이제 지워질만하다는 일본인의 바램일까? 그 무엇이든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일본인은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역사의식뿐만 아니라, <원령공주>의 흥행기록도 우리는 눈 여겨 봐야한다. ‘전쟁책임’과 ‘전후보상’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지 못한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를 위시하여 ‘타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원령공주>가 제공한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미국의 <아마겟돈>이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지 미국’이라는 미국우월주의로 문화 폭격을 가했다면, 일본의 <원령공주>는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는 식의 가해자의 궤변으로 역사를 가리고 있다.
처음 <원령공주>를 보고 지극히 철학적인 만화영화라고 감탄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에게 조소를 보낼 수 밖에 없지만...이 말을 미야자키 감독에게 해주고 싶다. 당신이 만든 <원령공주>가 낳을 수 많은 ‘저주신’을 생각해 봤냐고. 그것을 간과할 용기가 있었다면, 그 용기로 ‘역사’를 직시(直視)하라고 말이다.
참고
1)내셔널리즘(nationalism) : 국가주의, 산업 국영주의, 민족주의, 애국심, 독립[자치]주의(특히 아일랜드의 자지주의)-단일 민족국가에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혼용된다.
2)조엽수립문화론 : "태고의 지구에는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상록의 조엽수림 벨트가 있었고, 각지에서 그 수립에서 의지하여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학설로, 이 조엽수림은 온난 습윤지대에만 발생하는데 인간이 파괴하여도 수십 년 후에는 다시 복원되어 인간을 감싸줌으로써 자연은 인간보다 더 관용을 베푼다는 데 착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자연과 인간이 사이좋게 사귀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노력하였다"(김시우 ‘이것이 일본영화다’ : 1998, 서울 아선미디어, pp24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