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ary (Man On Horseback, Zapata), 1920
Proletarian Mother, 1929
Mujer Sentada, 1931
Portrait Of Gloria Calero De Urueta, 1931
Proletarian Victim, 1933
Collective Suicide, 1936
Echo Of A Scream, 1937
Ethnography, 1939
The Sob, 1939
La Patrona, 1939
Nino Tarahumara, 1939
Tempestad (The Storm), 1939
Hands, 1949
Anguish (Artist's Mother), 1950
Omen (Angelica Arenal De Siqueiros), 1950
El Pedregal, 1954
El Reto, 1954
Urbanizacion En El Altiplano, 1956
Incendio Al Atardecer (Fire At Dusk), 1957
Dos Cabezas, 1957
La Conesa, 1958
Paisaje, 1961
Flores, Si, Y No?, 1962
Saltarin, 1963
Sin Titulo, 1964
El Fariseo De Hoy, 1964
Paisaje Montanoso, 1965
Crepusculo (Detalle Para El Mural De Cuernavaca), 1965
Mujer Con Nino, 1966
El Machete (Autorretrato), 1968
Paisaje Cosmico, 1968
Estudio Para El Mural La Marcha De La Humanidad, 1968
Study For The Mural 'The March Of Humanity', 1968
Mano Abierta, 1969
Paisaje Volcanico, 1969
Landscape In Blue, 1969
Paisaje Rojo (Abstraccion), 1970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2.29 ~ 1974.1.6]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는 1896년 멕시코 치와와(Chihuahua) 주에서 출생하였다. 4살 때 어머니 시케이로스가 사망하자 할아버지에게 보내져 성장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반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멕시코의 벽화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었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와 함께 멕시코 화단의 3대 거장의 한 사람이다. 시케이로스는 세 명의 멕시코 벽화 화가들 가운데서 가장 급진적이었다. 공공 건물에 벽화를 그려 국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묘사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멕시코 혁명(1910~1921) 후 자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애썼던 사회주의의 투사 ·지도자 ·예술가였다. 일생동안 마르크스주의자임을 공언했던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교육한다는 '공동체 미술'의 개념을 신봉했다. 리베라(Rivera)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벽화운동에 전념했고 화풍은 역동적인 리얼리즘이었으며, 벽화에서는 평면에서만 만족하지 않고 돌출부를 만들거나 그림물감 대신 에나멜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였다.
산 카를로스 미술 학교를 다녔으며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였던 베누스티아노 카렌자(Venustiano Carranza)가 이끄는 멕시코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이때 그는 멕시코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였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멕시코 민중에 대한 강한 인상과 의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시케이로스가 미술가로 활동하는데 매우 중요한 미술적 모티브로 작용하게 되었다. 산 카롤로스 아카데미아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멕시코 혁명 운동에 가담하여 사회주의의 투사, 지도자, 예술가가 되었다. 멕시코 사회당(Mexican Communist Party)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자로 혁명 미술을 이끄는 역할을 하였고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다.
미술 공부와 작가로서 활동을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1919∼1922) 당시 그곳에서 각광받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Cubism)의 영향을 받았고, 세잔의 인상주의 미술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전위적인 회화도 접하였으나, 민중을 위한 회화라는 그의 사회주의적 미술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프랑스에 머물면서 같은 멕시코 출신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났으며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벽화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같은 사회주의 미술가로서 활동하였던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공공 건물에 프레스코(Fresco) 벽화를 그리면서 멕시코의 민중이 겪는 고통과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리베라와 이념성의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독자적인 벽화 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멕시코에서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정치적 활동으로 여러 번 투옥되고, 추방되어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을 여행하였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벽화 작품 제작을 의뢰받아 6개월 동안 '라 아메리카 트로피칼(La Ameria Tropical, 1932)'을 제작하였다. 이후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며 여러 전시회에 출품하였고 1936년 노동절에는 시위대에 참가하였다. 1938년 에스파냐 내전에 가담하여 프란치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주도하는 파시스트와 싸웠다. 그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멕시코 전력 노동조합을 위한 벽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0년 멕시코로 피신해온 소련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암살에 가담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멕시코에서 국외로 추방되었다. 1950년에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비엔날레 전시회 멕시코 대표로 참가하여 상을 받았다. 1960년 폭동을 선동하고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3년 동안 수감되었다.
1964년 출옥하여 사회주의 정치 활동보다는 차풀테펙 성(Chapultepec Castle)의 벽화 제작에 전념하였다. 화풍은 크고 굵은 터치로 강하고 격렬한 표현을 사용하였고 다이내믹한 리얼리즘적 표현을 구사하였다. 프레스코 벽화에서는 평면에 만족하지 않고 돌출부를 만들거나 그림 물감 대신 에나멜을 사용하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기법을 구사하였다. 주요 작품은 멕시코시티의 국립 고등학교와 대학의 벽화, 그리고 라 라자(la Raza) 병원 로비의 벽화, 멕시코 암센터 벽화,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로스앤젤레스 미술 학교 및 아트 센터의 벽화 등이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 Orozco),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멕시코 화단의 3대 거장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1966년 레닌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7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