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현장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기념상>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는 지난 1919년 4월 2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영월군의 유적지이다.
빼앗긴 대한민국을 되찾아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자신들의 죽음을 각오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역사적인 독립운동사 였다.
그러한 옛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금마리 만세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전과 후의 상세한 기록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찾기 위해 주천면사무소에 문의하였더니 서류 케비넷에서 한권의 파일을 보여주었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독립운동사 기록물 사본,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 사본, 금마리 독립운동 기념상 건립 관련 회의 기록 등을 열람할 수 있었다.
▲단기 4292년 10월 1일 발행 3.1운동 비사, ▲1971년 12월 27일 발행 독립운동사 제1권 ~ 10권 중 제2권 3.1운동사(상), ▲1972년 8월 발행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1집~14집 중 제5집 3.1운동 재판기록, ▲1987년 2월 10일 원본복사 국회도서관 보관 한국민족운동사 중 3.1운동편, ▲1991년 8월 15일 발행 강원도 항일 독립운동사(Ⅰ), ▲1992년 8월 15일 발행 강원도 항일 독립운동사(Ⅲ). 등 이었으나, 모두 복사본이라 당시에 복사 기계기술의 부족으로 글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 많았다. 대충 건너뛰면서 앞뒤를 꿔어 맞추는 정도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복사본에서는 1919년 3월부터 1920년까지 금마리와 관계된 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 문서들 이었던바 오늘날에 전해지면서 당시의 상황전말이 조금씩 변해버린 부분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원본은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보관은 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월등한 기계기술로 원본과 동일하게 할 수 도 있는 오늘의 시대에 다시 확보해야만 한다고 본다.
또한, 당시에 함께했던 개인의 사진, 마을풍경 사진, 가정별로 회갑이나 칠순잔치 혹은 혼례 당시에 촬영되었던 사진들.. 그 속에는 금마리의 옛 모습들이 분명 들어 있을 것이다.
또, 2007년 3월 1일자로 지난 5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폐교된 금마초등학교의 운영기록 문서나 졸업생들의 앨범이나 그 학생들이 쓴 일기라든지 작문이라든지 여러 기록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발굴하고 한자리에 모아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 알려야하고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교훈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록과 유물 유적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는바, '금마리 역사박물관' 이라고 하던지,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기념관' 이라고 하던지 간에, 현재 금마리 마을의 중심에 있으면서 주민 모두가 이 학교를 졸업한 구 금마초등학교를 활용했으면 한다.
또, 한가지, 영월문화원이 발행한 향토지 제22집 내성의 맥에 박충훈 선생이 발표한 기고문에 의하면, 조선시대 문종 때 강원도 중부내륙을 총괄하는 염초도회소가 있었다고 밝힌바 있으니, 조선시대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역사의 현장인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이다.
유족은 육성 증언으로, 역사학자는 찾아낸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언론매체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책자 속에 글자로만 존재하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관청은 행정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현실로 실행시키고, 국민은 지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수시로 방문하고 하는 모든 것들,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현재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는 그 모두가, 이 고장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과거가 있어야만 오늘이 존재하듯 대대손손 역사를 알게 해야만 오늘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곧 고장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구 금마초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