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중의 하나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머물러 정체 되어 있는 것을 거부한다. 다만 현대인들의 안주(安住) 습성은 생계라는 울타리와 사회가 가두어놓은 여러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오랜 시간 길들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시 인간의 생활 양식은 유목의 생활에 더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습성을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유(私有)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사유가 없었던들 인간에게 정착이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룩해 놓은 이 거대한 사유의 탑이 우리에게 반드시 풍요로움과 안락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울타리로써 개개인을 얽매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또한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어보고자 여행을 꿈꾸고, 예상치 못했던 일탈(逸脫)을 통해 보다 본질적인 자신을 느끼는 계기를 가지기도 한다. 여행이란 그동안 집안에서 보아왔던 창(窓)의 세계를 직접 뛰어들어 호흡하는 것이다. 이미 브라운관에 익숙해지고, 물과 공기조차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아직까지 이런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 있다는 것은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열과 나는 그래서 이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땅을 디디고 선다는 것은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편리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우리는 동력의 힘을 받지않고 떠나기로 했다. 자전거를 준비하고, 취사도구와 텐트를 준비하는 과정 모두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아무튼 산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예기치 못했던 모든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있지 않은가...
여행 1일차 ( 8월 11일 월요일 )
전날 준비했던 모든 여장을 최종 점검했다. 자전거의 성능시험도 마무리 되었고, 세열이 09시경에 도착하여 짐을 재분배하고 결속이 끝났을 시간은 09시 30분 경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밑반찬을 얻고 아직 구입하지 못한 물품은 가는 도중의 휴식시간에 준비하기로 했다. 10시 정각. 드디어 대장정(大長征)의 첫 페달이 힘차게 돌아갔다. 그 순간의 설레임을 어떤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것인가. 하늘은 푸르고 더운 공기마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맞 부?H치게 될 미지의 사건들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여행을 즐겁게 하는 요소 였으리라. 첫 기착지(基着地)는 안산 이었다. 안산에 있는 외삼촌 댁에서 카세트를 찾고 점심도 해결할 요량으로 점심시간에 맞춰 안산에 진입하기로 했다. 광명시와 시흥시를 거쳐 안산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고된 길이었다. 서울과 광명시를 빠져 나가기까지 매연과 자동차에 시달린 기억은 끔찍했으며 역시 서울은 자전거를 탈만한 공간이 못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부에서는 교통사정 개선과 대기오염 완화를 위해 자전거 이용을 적극 권장한다고 하지만, 과연 위정자 중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대책이 없고 구호만 요란한 정책. 그것은 무능력을 소리높혀 이야기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도시계획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책임을 시민들에게 전가(轉嫁)시키는 구태의연한 악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혐의 역시 지울 수가 없었다. 서울과 광명을 지나 351번 지방도에 오르면서부터 조금은 숨통이 틔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도로를 타고 속력을 내다가 42번 국도로 갈아타고 안산에 진입한 시간은 12시 경. 애초의 일정대로라면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하고 오랬동안 적조했던 외숙댁에 인사도 드릴 요량이었으나 엉뚱하게도 길을 잃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다시 모든것을 제대로 되돌리고 점심식사를 마쳤을때는 16시가 다 되어 있었고, 결국 불가피하게 오늘 당진까지 간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화성 부근까지를 금일의 이동 기지점으로 수정했다. 자전거를 오랫만에 장시간 탄 탓으로 세열과 나 모두 사타구니가 아프기 시작했고, 세열은 피부가 약한 탓인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이정도 고통은 미리 예상했던 일이다. 첫날부터 아프다고 지지부진(遲遲不進)한다면 앞으로의 일정에 닥친 일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42번 국도를 타고 안산을 벗어나 39번 국도로 옮겨 탔다. 비봉을 거쳐 팔단 초입에 들어서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화성 온천지구가 있었고, 동방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에서 야영하기로 하고 39번 국도를 벗어나 332번 지방도로 들어섰다. 지방도로 들어서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지나온 39번 국도는 우리가 여행했던 가장 끔찍한 도로였다. 서해안에서 곳곳에 벌어지는 간척사업 때문에 덤프 트럭이 쉴새없이 줄을 이었고, 가뜩이나 좁은 도로에서 횡포와도 가까운 덤프 트럭들은 아찔한 순간을 여럿 만들어 냈다. 화성 온천지구에 들어섰을 때는 기진맥진했다. 날이 이미 저물고 있었고, 물을 구할 곳이 없어 19시경에 저녁을 음식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먹은 저녁식사는 허기진 우리의 식성에 의해 김치 조각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비워졌고, 힘을 얻은 우리는 야영할 장소를 찾아 저수지로 이동했다. 그러나 저수지는 야영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세열의 제안에 따라 야간 이동을 하기로 결심. 332번 지방도를 따라 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국도가 아닌 지방도에서 야간에 길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고, 모기떼와 싸워 가며 결국은 이름모를 도로에서 발견한 버들못이라는 저수지에서 텐트를 펼 수 있었다. 이때의 시간이 20시 30분. 결산을 마치고 잠에 든 시간이 22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첫날의 미숙함 때문인지 몸이 많이 지쳤다. 게다가 안산에서의 4시간 가까운 지체가 무엇보다 뼈아픈 손실이었다. 금일 결산에서 우리는 여행계획을 수정했고, 세열은 여행도중 환경오염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역설했다. 재활용품을 철저히 분리하고, 1회용품을 지양하며, 담배를 피울 때 캔에 재를 떨지 말 것등 여러가지 환경지침을 나에게 통보했다. 얼치기 환경공학도 때문에 피곤한 여행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今日의 感想>에 세열은 "모기와 함께 자지 말자" 라는 말을 남겼고, 나는 "오르막길은 길고, 내리막길은 짧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거리는 오전 서울 - 안산 구간이 약 30 km, 오후 안산 - 화성 구간이 약 30 km 로 금일 이동량은 60 km. 오전 평균시속 약 15 km/h, 오후 평균시속 약 10 km/h 였다.
여행 2일차 ( 8월 12일 화요일 )
어제의 피로를 딛고 06시에 불꽃처럼 기상했다. 사실은 일부러 일어난 것이라기 보다는 자다보니 너무 추워서 텐트 후라이를 뜯어 덮고 자다가 깬 것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아침은 희망차다. 멀리 해가 살포시 떠오르고 저수지의 수면이 반짝이기 시작하니 모든 것은 희망으로 충만해 보였다. 아침을 준비하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라면과 밥을 끓이고 김치와 함께 든든히 밥을 먹었다. 여행은 밥힘이다. 무엇보다 든든히 먹어 두어야 한다는 것을 어제 절실히 깨달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茶)까지 한잔 먹는 여유를 누리고서 우리는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08시 30분 332번 지방도를 타고 조암으로 향했다. 아침의 지방도는 참 상쾌했다. 얕은 구릉마다 포도밭의 포도알들이 빛나 보였고, 비스듬히 가로누운 언덕들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속에 감춘 생명력을 한껏 뿜어냈기 시작했다. 건강한 자연 앞에서 모든 허무란 그것 자체가 허무함이다. 어찌 보면 도시의 생활 자체가 우리에게 허무와 독기를 가져다 주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침의 신선함도 잠깐. 10시가 넘어가자 강렬한 태양이 또다시 우리를 혹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불행의 시작이 이때 부터였다. 아산 지방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공사 때문에 길이 지도와 맞지 않았고, 지방도의 표지체계 또한 헷갈려 많은 시간을 길을 찾고, 되돌아 나오는데 허비해야만 했다. 도로표지판 하나 제대로 맞지않는 도로가 바로 엊그제 까지 국민소득 1만불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우리의 모습 이었다. 유리는 우리의 경제적 성과를 전 세계에 소리높여 자랑하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에 비쳐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나는 눈에 선하다. 우리가 이룩한 이 경제 부흥은 외국의 채권과 자본, 그리고 우리 선대의 강도높은 노동착취로 얼룩진, 다시말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룰간 '졸부'의 형태에 다름 아니다. 마치 생활 양식이나 기타 도덕, 사회적 합리는 무시한 채 경제적인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런 야만스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숙해야 한다. 345번 지방도 위에서 기아산업 아산만 공장을 지났다. 온통 이쪽 주민들은 기아산업 살리기에 총력인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거대 기업. 자본의 힘이란 사유 조직인 기업이 수많은 사람의 생계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중세 봉건사회의 소작농노제(小作農奴制)를 생각했다. 형태만 다를 뿐이었다. 기업이라는 농장에 의존해서 우리는 계약 관계에 있는 공노(工奴)에 다름 아니다. 기아산업을 지나 11시경에 우리는 남양방조제에 도착했다. 거대한 둑으로 쌓아놓은 긴 방죽을 보며 인간이 이렇게 자연 앞에서 오만해도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세열의 말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갈수록 갯벌의 중요성이 부각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만 이처럼 대단위 간척(干拓)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간척사업을 금지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갯벌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고 하는데 우리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자 환경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갯벌을 너무 쉽게 파괴하고 있다. 천혜의 갯벌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갯벌은 이미 현재까지만으로도 상당부분 죽어 들었는데도 세계1위, 2위 방조제가 우리나라라는 것을 자랑하는 무식한 위정자(爲政者)들의 용감무쌍함에 기가 찰 노릇이다. 갯벌은 하천에서 유입된 부영양화 된 엄청난 해수의 자정작용에 의해 엄청난 양의 산소를 생산하고, ( 단위면적당 산소 생산량이 열대 우림보다 더 많다고 한다. ) 갯벌 자체의 생산량만 보더라도 갯벌이 100이라면 삼림은 54, 농경지는 16밖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갯벌을 막아 농경지및 공장 부지를 만들고 있으니 이보다 더 바보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했다. 게다가 해안선의 파괴, 시화호의 경우와 같은 대형 오염 사고를 일으키는 간척 사업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며 통탄하는 모습을 보며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익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이 범죄인지 모르며 살아가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처럼 간척사업이 활발한 이유는 간척한 땅은 간척한 사람의 소유가 되는 현 제도 때문이다. 대형 자본을 앞세워 간척사업을 벌이기만 하면 그보다 몇배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땅이 간척한 사람의 소유가 되니 거대한 자본의 논리앞에서는 환경이나 원주민들의 생계따위는 몇푼의 보상금으로 해결되는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다. 삶의 질이란 물질의 풍요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남양 방조제를 떠나 12시 경에는 아산 방조제, 12시 30분 경에는 삽교 방조제를 지났다. 가두어진 물을 보며 푸른 대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썩어가는 물이 감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삽교 방조제를 지나 당진으로 향하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태양은 계속해서 작열(灼熱)했고, 숨이 턱턱 막히는 속에 계속되는 언덕을 넘어야만 했다. 점심을 거른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39번 국도, 34번 국도 32번국도, 615번 지방도로 이어지는 충남의 도로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32번 국도 상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또다른 두 팀을 만났다. 세명이 한조로 이동하는 팀들이었는데 한팀은 난지도 해수욕장, 한팀은 태안반도로 간다고 했고, 수원과 부천에서 출발한 팀들이었다. 그들이 신선해 보였다. 편한 것에 길들여 있는 젊은 세대에 아직도 삶의 만만치 않음을 체험하는 길을 떠나는 젊음이 있다는 것은 젊다는 이유하나로 가지는 희망이 아닐까.
고생 고생해가며 당진읍에 도착한 것이 16시경이었다. 하지만 당진에서도 고모댁이 있는 교로리까지는 아직 60리길이라 했으니 아직도 적지 않은 여정이 앞에 남아 있었다. 고개길을 넘으며, 숨이 턱에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의 군생활을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교로리를 몇km 앞에 남겨놓지 않은 곳에서 세열과 나는 더운김이 식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 누워 버렸다.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바다가 보이고 멀리 대호 방조제가 보이는 교로리 고모댁에 도착한 때는 18시 30분이었다. 도착하자 마자 고모님의 반가운 영접을 받으며, 샤워를 하고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역시 밥의 힘은 대단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릴줄 알았지만 밥 한그릇에 우리 둘다 불꽃처럼 살아났다. 결국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밥을 거른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시 30분경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갯가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작은 갯가. 바로 앞에 국화도가 보였고, 폐선들이 갯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멀리 오징어를 잡는 배들의 불빛이 환하게 보였다. 섬과 섬 사이로 떨어지는 노을이 어느때 보다 아련한 감상을 자아내는 밤이었다.
집에 돌아와 모기장을 치고 결산을 하고 23시경에 취침했다. 오늘은 이동거리에 비해 극도의 피곤을 넘은 날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길을 헤맸고, 지형상의 제약이 심했고, 한낮의 땡볕과, 배고픔을 이겨야 했다. 여러가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여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몸관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일부터는 몇가지 원칙을 정했다. 반드시 밥은 거르지 말고, 한낮의 12시 - 2시 정도까지의 시간은 피하는 대신 필요할 경우 야간 이동을 하는 것이 낫겠고, 일정한 간격의 휴식이 있어야 보다 원활한 이동을 보장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도상(圖上)의 길이라도 현지민(現地民)의 검증을 얻어가며 이동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 今日의 感想 >에 세열은 "밥은 꼭 먹어야 한다" 고 했고, 문식은 "나는 덤프트럭이 정말 싫다"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거리는 화성 - 당진 교로리 까지 90 km 정도 점심 휴식을 거치지 않고 이동했고 평균 시속은 9 km/h 정도였다.
여행 3일차 ( 8월 13일 수요일 )
집에서 자는 잠은 피로를 말끔히 풀었다. 08시까지 푹 늦잠을 잔 후에 아침식사를 하고 09시30분에 출발했다. 오늘 오전중에 중간 기지점으로 서산 시온감리교회까지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계시는 함준영 목사님과 김명신 선생님을 보기도 하고 그곳에서 점심식사후 휴식을 취하고 나오기로 하였다. 대호 방조제를 지나고 29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605번 지방도로 빠져 고남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어제만큼 계속되는 언덕이 없어 편했다. 처음 가보는 시온 감리교회는 내 상상과 아주 흡사했고, 목사님과 사모님역시 내 상상과 동일했다. 멀리 보이는 우리를 언덕위 교회 뜰에서 보고 손 흔들어 주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아주 신선했다. 12시 30분경 시온 감리교회에 도착해서 사모님이 대접하는 화채를 시원하게 마시며 지난 일들에 대해 담소(談笑)했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고, 그 기억속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많은 이들이 그때와 달라져 있었지만 기억속의 그들은 모두 푸른 젊음들이었고, 빛나는 정신들이었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 꺼내 보아도 팔딱팔딱 뛰는 등푸른 생선들처럼 신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든 기억은 즐거움으로 미화되고, 모든 사람은 - 악인들조차도 - 선한 지인(知人)들로 채색되는 것이다. 그들의 환대를 받고, 그들의 아들 의 앙탈을 보며, 웃어가며, 아주 융숭한 점심대접도 받았다. 아구찜으로 포식한 후 우리는 아쉬움을 뒤에 묻고 16시30분 시온교회를 출발했다. 617번 지방도와 605번 지방도를 이어 32번 국도를 이용, 태안까지 도착했다. 길은 평탄했고, 조금 덥기는 했지만 전날에 비해 아주 쉽게 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장 태안반도로 진입했다. 서해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태안반도. 태안 반도의 길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반도 자체가 국립공원이었고, 길쭉한 반도를 따라 길이 종(從)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간간이 바다도 보며 시원한 도로를 달렸다. 603번 지방도는 포장상태도 양호했다. 태안 반도는 다음에도 또 와보고 싶을만큼 절경(絶景)이 많았다. 복잡하지도 않았고, 해수욕장 뿐 아니라 자연 휴양림, 해송(海松)들이 어우러진 멋진 공간이 많았다. 서해의 낙조(落照)를 바라보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조차 미처 다 느끼지 못하고서 외국의 문물에, 풍경에 감탄하는 자 들이여, 경계할지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안면도 까지 가는 일이 다소 무리였으나 오후에 충분히 쉰것을 감안, 달빛을 받으며 야간 이동을 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를 이동중에 자장면으로 해결했다. 이곳 주인의 인심이 아주 좋았다. 서울서 왔다니까 힘들었겠다고 하면서 식사의 양도 많이 주는 것은 물론 자전거 타이어 바람 채우는 일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무척 감사해 하면서 계속 전진했다. 안면읍을 거쳐 고남으로 향하는 중 22시 경에 화물차를 탄 아저씨들의 도움을 얻어 약 2km정도 차도 얻어 타가면서 23시경 고남리에 도착했다. 이곳 고남에서도 또 한번 친절어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파출소에서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일들이 어우러져 이곳, 태안 반도의 인상이 아주 좋게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행의 묘미(妙味)는 또한 이런 예상치 못한 인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도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베풀었다면, 그것은 에너지와 같이 소멸되지 않고 보존된다. 반드시 상대방으로부터 동일하게 보상받지 못할 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고, 결과로 나타나는 수치에만 지나칠 정도로 집착을 한다. 반드시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 믿으며, 두꺼운 방어벽으로 자신을, 자신의 재화(財貨)를 방어하려 한다. 하지만 인정이며, 덕(德)이라는 것은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에너지와 같이 형태만 바뀔뿐 순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 사회가 보다 많은 인정으로 보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 보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고남에서는 마땅히 야영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은 늦은 밤이긴 하지만 영목항 까지 가기로 했다. 영목항에 도착한 시간은 23시30분이었다. 아주 작은 포구였다. 항(航)이라 부르기가 뭐할 정도로 몇 안되는 집과 배가 전부였다. 낚시꾼 몇몇만이 그 시간의 인적(人跡)의 다였다. 근처 적당한 곳에 텐트를 쳤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엄습해 왔다. 물이 귀한 곳이라 부탁하기가 상당히 미안 스럽기는 했지만 작은 선술집에서 물을 좀 쓰기를 청했다. 여고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씨의 말없는 안내가 먼 조선시대 아낙의 모습처럽 수줍게 느껴졌다. 멀리 보령시의 야경이 바다건너 이곳까지 비치고 있었다. 달이 밝았고, 아련한 향수(鄕愁)가 온 몸을 감싸왔다.
모기떼와 싸우며 텐트를 치고 잘 준비를 하니 어느덧 다음날 01시가 가까워 있었다. 빨리 결산을 마치고 잠들어야만 했다. 금일 결산은 주로 감상이 대부분이었다. 서산 시온교회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했고, 태안반도에서 받은 친절에 감사했으며, 이밖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명일 대천까지의 배편을 알아보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엽서를 사서 쓰자는 이야기도 했다. < 今日의 感想 >에서 세열은 "사람은 뛰어나지만 자연은 위대하다"라는 말을 남겼고, 문식은 "人事가 萬事"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량은 오전 당진 교로리 - 서산 고남리 까지 40 km, 오후 서산 고남리 - 태안 영목항 까지 73 km 도합 113 km를 이동했으며, 평균시속은 오전 13 km/h, 오후 12 km/h 였다.
여행 4일차 ( 8월 14일 목요일 )
영목항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 나는 것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결국 뒤척 뒤척이다가 07시 경에나 일어나게 되었다. 아침을 대충 해서 끓여먹고, 배편을 알아보러 나갔다. 06시 30분 배는 이미 떠난 뒤였고, 할 수 없이 12시30분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여기 저기 전화나 하면서 긴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불과 30분, 길어봐야 10 km 거리의 뱃길인데도 운임(運賃)이 비쌌다. 사람 운임비는 그렇다 하거니와 자전거 운임비가 거의 사람에 맞먹는 비용이었다. 13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대천항에 입항 했다. 어제의 피로가 겹친 탓인지 배멀미가 심하게 났다. 대천 해수욕장까지의 불과 2 km 정도를 오는데도 어지럽고 영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천 에서 공주로 갈 것인지, 전주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쯤 해수욕도 할겸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텐트를 치고 해수욕도 하고 오후를 보내고 나니 모처럼 맞이하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탁 트인 바다도 그렇고, 생각보다 깨끗한 바닷물에 몸도 담그고, 세열과 함께 물놀이도 하면서 지친 몸의 피로를 풀었다. 무엇보다 시원한 눈맛이 좋았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는 수평선의 광활(廣活)함. 날이 저물도록 바다를 보았다.
동경(憧憬)이라는 것은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다. 동경은 곧 가능성의 시작이고, 그것은 희망(希望)이라는 이름을 잉태한다. 나는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동경이 무었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동경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쟁취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것은 모든 발전의 원동력 이었다. 문득 容雲 선배가 생각이 났다. 내가 한참 깊은 절망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에게 동경의 기쁨과 그 동경을 희망으로 바꾸는 자세를 보여준 사람. 나는 왜 그리 젊은 나이에 그런 어두운 생각을 꿈꾸며 살았던가. 하지만 용운 선배가 나에게 가르쳐준 말은 나에게 희망이 되었다. 젊어서의 절망이 없는 삶은 안주(安住)를 할 수 밖에 없는 삶 이라고. 절망의 깊이만큼 희망의 높이를 가질 수 있고, 희망의 높이만큼 개척의 영역이 보이는 법이라는 것을.
옆 텐트의 사람들과 인정을 주고 받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받으면 다시 주고 싶은 그런 마음. 그것은 여행하는 길에 있는 모든 이들의 동질감이다. 우리는 그들의 경계하는 몸짓 때문에 베풀고 싶을 친절도 제대로 베풀지 못했지만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얼마간 대화도 나누고 여행자 끼리의 동질감을 얻기도 했다. 다음날 그들의 카메라를 고쳐준 덕에 우리는 분에 넘치는 댓가를 받기도 했다. 쌀이 떨어지고, 가스도 떨어지고, 세제도 없었는데 그들이 모두 주고 갔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필요한 것만 주었는 지 신기할 정도로. 어제의 그 이야기를 생각했다. "人情 保存의 法則"
저녁을 해먹고, 저녁에 맥주와 소주를 사서 한잔씩 기울이며 세열과 오래도록 담소했다. 정작 여행을 떠나기는 했어도 바쁜 일정과 피곤함 때문에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밤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달빛은 수면위에서 예쁘게 반짝이고, 물이 많이 들어와 귓전에서 때리는 파도소리가 정감을 더해 주었고, 술보다는 이야기에 취해 오랜동안 사는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살아왔던 이야기는 밤과 함께 깊어갔다. 한동안 살풋 잠이 들었다가 모기와 파도소리에 다시 잠이 깨어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르다가 다음날 01시 경에 잠이 들었다.
결산을 하지 못해 다음날 아침에 결산을 하게 되었다. < 今日의 感想 >에서 세열은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동네 사람을 만난 일 때문이었는지 " 세상은 참으로 좁은 것이다." 라는 말을, 문식은 "내가 무엇인가 베풀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 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량은 영목항 - 대천해수욕장 12 km 였다.
여행 5일차 ( 8월 15일 금요일 )
아침과 오전을 모두 해수욕장에서 보냈다. 해수욕장에서 남은 일정을 그냥 놀다 가자는 유혹(誘惑)이 있었지만 우리는 끝까지 가야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오후 땡볕은 피하고 출발하기로 하고 점심식사후 15시 30분 군산을 목표지로 정하고 출발했다. 길을 처음부터 잘못들어 되돌아 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피로가 풀린 탓인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남포 방조제를 지나 21번 국도를 타고 웅천과 비인을 거쳐 서천을 경유, 장항으로 들어갔다. 장항선 철길을 따라 가는 길이 좋았다. 장항에서는 배를 타고 금강하구를 건너 군산 시내로 들어갔다. 17시 경에 도착한 웅천에는 유난히 석재상이 많았다. 돌을 깎는 모습들이 군데 군데서 보였고, 돌을 매끈히 깎아놓은 모습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석수쟁이라... 같은 조각이라도 그 재질에 따라 그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석고나 나누에 비해 돌조각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자칫하면 많은 공을 들인 조각이 정질 한 번에 귀퉁이가 깨어져 나가기도 하고, 전제의 조화를 깨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태어난 돌조각은 다른 어떤 재료도 가지지 못하는 신비스러움을 지니게 된다. 우리 선조가 유독 돌을 조각의 재료로 많이 사용한 것은 비단 우리 땅이 화강암을 많이 품고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 조상이 가지는 그 끈끈한 미덕, 절제와 인고의 미(美)가 그 속에 배어 있으리라. 21번 국도를 타고 가는 도중에 자전거 하이킹 하는 40대 아저씨를 만났다. 짐으로 봐서 단거리 여행인듯 했지만 그 나이에 그렇듯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앞지르는것이 미안해서 인사를 하며 지나쳤는데 커다란 웃음으로 마주 인사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19시 30분경에 도착한 장항은 생각보다 작은 곳이었다. 장항선의 종착역이고 금강을 사이에 끼고 군산과 맞닿아 있는 장항은 괜시리 마음이 설레는 도시였다. 20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군데군데 철시(撤市)하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고 자정이 넘도록 불야성(不夜城)인 서울을 생각할 때 조금 의아스럽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도시였다. 일제시대에 최대의 번성을 누렸던 군산 - 장항은 세월의 영욕에 따라 이렇게 모습이 바뀌었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20시 15분에 페리호를 타고 군산으로 넘어가는 중에 한 아저씨와 얘기하는 중에 이곳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 시대에 미곡(米穀)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 그래서 아직 일본식 적산가옥이 많다는 이야기와, 고은의 "만인보"의 출발점. 조정래 "아리랑"의 고향. 그리고 채만식의 "탁류"의 배경이 되는 이곳. 한때의 영광과 그만큼의 몰락. 그리고 최근에 문제시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료되면 수많은 공업 단지와 더불어 중국으로의 수출 전진기지가 될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아마도 몇년이 또 지나면 군산은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 아저씨와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큼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단 호감이 들었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듯이 보여, 무엇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로 평가 하지 않고 그사람의 배경과, 학식과 그 주변 배경으로 그 사람을 평가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여행에서조차 그런 것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나 자신 스스로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군산시는 을씨년스런 느낌이었다. 장항과 마찬가지로 어두웠고, 많은 상점들이 철시해 있었다. 군산시를 좀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군산대학교 앞은 서울의 여느 대학가 앞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나가보니 한 골목은 패션 거리 인듯 브랜드있는 옷 가게 들과 패션 용품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지방 도시에서 이만큼의 휘황한 거리는 또한 드물게 본 탓인지 아까 항구쪽의 을씨년스러움과 너무도 크게 대비가 되었다. 군산역으로 향하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사창가(私娼街)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도중 언듯 스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정지되어 있는 모습인듯, 영화에서의 스타카토 기법인듯 망막속에서 슬프게 각인되었다. 다른때 같으면 호기심어린 눈에 농(弄)이라도 몇마디 지껄였겠지만 그때의 감흥은 애수(哀愁)였다. 그들은 먼 일제 시대 일인들에게 농락당하고 유린되었던 먼 우리의 조상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자본에 농락당하는 것만이 달라졌을뿐. 세상에서 많은 것을 팔고 살지만 웃음을 팔고 사는 것만큼 처참한 것이 있을까? 현대라는 시대는 자신의 감정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군산역 앞에서 심한 허기를 느꼈다. 하지만 시장은 거의 철수한 후 였고, 산뜻하고 밝은 패스트 푸드점에 들어가기에는 우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산역 앞에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면했고, 또 하루에 지친 몸을 뉘일 곳을 찾아 26번 국도를 따라 나갔다. 26번 국도와 29번 국도의 분기점 쯤에서 개정초등학교를 발견, 이곳에서 야영하기로 하고 자리를 폈다. 방학내 방치해 둔 탓인지 풀이 무성했고,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곳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이렇게 또 하루를 접게 되었다. 오늘의 결산은 특이한 것이 없었다. < 今日의 感想 > 에서 세열은 "모기가 싫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고, 문식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량은 오후에만 대천해수욕장 - 군산시 53 km, 평균시속 9.5 km/h 였다.
여행 6일차 ( 8월 16일 토요일 )
일어나 보니 08시가 가까워 있었다. 이렇게 늦잠을 잔 예가 없었건만 오늘은 꽤나 늦었다. 아침을 거르고 출발하기로 했다. 바로 이동준비를 마치고 08시 30분에 오늘의 목적지 고창으로 출발했다. 29번 국도를 타고 먼저 오전에 부안까지 가기로 했다. 전라 북도의 길은 아주 편했다. 거의 모든 길이 평지였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은 그야말로 둥글둥글한 똑같은 모습이다. 고산 준령도, 광활한 대지와 협곡도 없지만 이 "똑같은 "풍경은 자세히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또한 그렇게 애정어린 것일 수 없었다. 비슷비슷한 들과 산이라 하지만 어느 곳도 똑같은 곳은 한 군데도 없었고, 그 풍경 자체는 우리에게 얼마나 풍요로운 정감과 안식을 주는가. 그 곳 주민들의 걸죽한 입담과 인심, 그리고 토산물들로 인해 우리의 고향은 결코 질리지 않는 안식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리라. 이런 저런 감상과 함께 김제 평야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멀리 성급하게 패어가는 이삭이 눈에 들어왔다. 09시 30분쯤 만경 근처에서 빵과 콜라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부지런히 달린 끝에 오전중에 부안에 당도할 수 있었다. 12시 20분에 부안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국밥 한그릇 씩을 비웠다. 모처럼 밥다운 밥을 먹는 것 같아 깨끗이 비웠고, 역시 전라도 음식이 가장 먹은 것 같이 먹는다고 입을 모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이글대는 땡볕을 다시 나설 기분이 나지 않았다. 다방에서 쉬어가기로 하고, 근처의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한 낮의 해를 피했다.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세열과 또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던진 "시간"이라는 화두(話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물질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와 세열은 현 미국에서 일고 있는 "신과학운동(神科學運動)"에 대해 소개했고, 나는 미래에 대한 소견을 피력(披瀝) 했다. 점차 개인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 것이라고. 과학 기술의 발달은 모든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될 것이며 이제 미래의 인류는 자신이 무엇엔가 규제받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모든 방면에 있어 규제 받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개인의 범죄가 힘들어 지지만 그대신 이제는 본격적인 집단의 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또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고통은 어찌보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통이 없는 세상. 그것은 가장 끔찍한 세상이리라고. 세열은 "악연(惡緣)도 선연(善緣)으로"라는 이야기로 禪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해가 한풀 꺾였고, 우리는 또 다시 길을 재촉했다. 23번 국도를 타고 3시간여를 달린 끝에 농민봉기와 지석고분군으로 유명한 고부를 거쳐 고창으로 들어섰다. 나의 외가인 고창은 언제 보아도 정겨웠다. 고창 읍내에서 모양성과 판소리의 대가인 신재효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신재효 선생의 생가는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집 안에는 판소리 테잎을 틀어 놓았는지 소리가 흘러 나왔고, 예의 유적지들면 붙어있을 법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없는 것이 좋았다. 툇마루에 앉아보기도 하고 방안도 구경을 하고 나올 수 있어 살아있는 생가를 본 느낌이었다. 고수 외가댁에 도착한 것은 18시 30분 경이었다. 외할머니의 따뜻한 밥을 세그릇이나 비우고 우리는 또 하루를 접을 수 있었다. 어제는 내내 달리면서 김장훈의 "노래만 불렀지"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었는데, 오늘은 法正스님의 "無所有"라는 책이 내내 생각이 났다.
금일 역시 결산은 특이한 것이 없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내일 목포까지의 마지막여정에서 끝까지 건강히 최선을 다하자는 말로 오늘의 인사를 대신했다. < 今日의 感想 >에서 세열은 "이젠 별로 힘들것이 없다." 라는 말을 했고, 문식은 "이제는 끝이 보인다. 언제나 끝이란 두렵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금일의 이동량은 오전 군산 - 부안 까지 32 km, 오후 부안 - 고창 고수면 까지의45 km, 도합 77 km 였고, 오전 평균시속 10 km/h, 오후 평균시속 13 km/h 였다.
여행 7일차 ( 8월 17일 일요일 )
오늘은 많은 길을 가야한다.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어제 빨아놓은 빨래가 채 마르지 않아 자전거 뒤에 매달고 우리는 길을 나섰다. 그나마 나는 반바지여서 괜찮다 했지만 세열은 속옷을 매달고 집을 나섰으니 참으로 강심장 이었다. 내가 뭐라 하니 "오십보 백보"라고 하는 녀석의 웃음이 능글 맞아 보였다. 08시 30분 고수 외할머니 댁을 출발하여 첫번째 기점 영광으로 출발했다. 날은 여전히 쨍쨍했지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아주 좋은 날씨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 10시 어간에 도착한 영광은 많이 들어본 지명과는 다르게 아주 작은 소읍(小邑)이었다. 굴비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짭조름한 갯내가 나기도 했다. 그리 평탄한 길은 아니었지만 세열과 나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오전중에 많은 길을 가기로 했다. 목포에서 쓸 가용한 시간을 많이 남겨야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광에서 함평으로 향하는 길에서 또 한사람의 도보 여행자를 만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고생을 많이 한듯 싶었다. 꾀죄죄함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반갑게 인사하니 그사람역시 수줍은 웃음을 만면(滿面)에 가득 띄운다. 여행자는 모두 동지의식을 가지게 되는듯 하다. 무엇인가를 벗고자 떠나는 것이라면, 그 가벼워진 마음이 뭐든지 여유롭게 하는 것일까? 12시 30분께 함평에 도착했다. 함평에 도착하여 점심을 분식으로 해결했다. 신나게 먹고 오후의 해를 피할 궁리를 하다가 근처 큰 나무의 그늘에서 자리를 펴고 누워버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가 싶더니 어느덧 1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목포까지는 불과 30여 km. 여유있는 일정이었지만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목포에 도착하고 싶었다. 무안을 지날 때는 무안군이 참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태 거쳐 온 어느 군보다 깨끗하고 보기 좋은 도로와 가로수를 가지고 있었다. 무안에서는 또 한명의 자전거 여행자를 만날 수 있었다. 길을 떠나보니 이렇게 많은 이들이 우리 국토를 누비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7시 30분 우리는 드디어 종착지인 목포시 팻말앞에 설 수 있었다. 우리는 기쁘게 손을 마주 부딪혔고, 기념 촬영을 했다. 드디어 먼 여행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고생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뿌듯한 자부심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목포시 외각에서 30여분을 더 달려 목포 중심부로 들어섰다. 세열과 함께 오늘 귀경(歸京)하는 것과 내일 귀경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오늘 밤차를 타고 귀경하는 것으로 정하고 차표를 구입한 후 자전거를 소화물(小貨物)로 이송했다. 여태 1300여리에 달하는 길을 같이 달려와 준 자전거를 보내버리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울러 홀가분한 마음 역시 크기도 했다. 세열과 나는 이 꾀죄죄한 몰골부터 바꾸어 보기로 하고 근처 목욕탕에서 목욕부터 했다. 깨끗이 씻고 나니 개운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햇빛에 그을은 모습을 보니 가히 처참했다. 세열의 어깨는 허물이 다 벗어져 군데군데 얼룩이 졌고, 나는 밤에 보면 이와 눈동자만 보일 정도로 새까매 졌다. 그래도 씻으니 조금은 사람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씻으니 허기가 밀려 왔다. 분식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남은 시간을 만화방에서 해결했다. 요즈음 이슈가 되고 있는 이현세 씨의 "천국의 신화"를 보았는데, 내 스스로는 대단한 작가의 역량이 보이는 걸작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나름의 잣대로 구속까지 하는 우리나라의 처지가 한심해 보였다. 제도라는 것은 어차피 예술과 사상을 따라가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칼자루를 쥔 폭군의 역할 그에 다름 아니다. 어용(御用) 문화 예술제나 잔뜩 개최하면 무엇 하는가. 창작 의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제 멋대로 칼자루를 들고 날뛰는 이 현실에서. 창작의욕 고취는 애시당초 글러 먹었다 해도 이 사회는 뭐든지 "관제(官制)"라는 딱지가 붙은 것만이 예술이고, 집회이며, 논리였으니까.
만화방을 나서니 열차 시각이 거의 다 되었다. 우리가 일주일을 이곳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목포를 불과 몇 시간만에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면 좀더 많은 곳을 둘러보고 포항까지도 갈 생각이 있었지만 세열의 수강신청 날짜가 임박해 서둘러 ?i기듯이 마무리 해야 하는 것도 조금은 서운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정해놓은 봉우리를 넘었고,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가슴속에 뿌듯함으로 남았다. 서울로 향하는 5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서서 내내 이 여행의 의의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분명히 이 여행은 우리의 가슴에 남긴 것이 있었다. 금일의 이동량은 오전 고창 - 함평까지의 50 km, 오후에 함평 - 목포까지의 34 km 였으며 평균시속 오전 13 km/h, 오후 11 km/h 였다
그렇게 5시간이 흘러가고, 영등포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 37분.
우리는 이렇게 이 여행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後記
모든 여행이란 떠날 때의 기대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는 법이다. 떠날 때의 기대를 50%만 채우고 돌아와도 그 여행은 성공한 여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것은 말로 말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충분히 힘들었고, 많은 것을 느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들은 내안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새에 육화(肉化)되어 내 안에 머무를 것이다. 모든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신이 내려준 언어라는 것 이외에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보이는 것만을 믿고, 따르지만 우리가 자연에 속해 있을 때 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과 글을 넘어 우리에게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끝까지 우리의 여행의 동반자였던 오세열 군에게 깊은 감사를. 그리고 여행중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았던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우의를. 무엇보다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이 여행 끝까지 함께했던 내 자신에게 영광을. '97 서해안 기행을 마치며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에 대한 한없는 찬사를.
1997. 8. 20. 吉山 咸文植 書.
斷想
# 우리는 끊임없이 일상(日常)을 떠나기를 희구(希求)하지만 반드시 일상으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일상을 떠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으로 복귀할때의 마음가짐. 그리고 이전과 그 이후의 달라진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극복인 것이다.
( 첫째 날. 8 . 11. 화성에서 )
# 자연은 잉여(剩餘)를 용납치 않는다. 모든 잉여는 인공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뿐이다. 잉여란 곧 정지(停止)이고 정지란 개념은 자연에서 존재치 않는다. 모든 자연은 쉼없이 운동하고 있으며 정지한 모든 것은 곧 부패하기 시작함으로써 정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패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자연은 또다른 자연으로 흡수되기 마련이며, 이 영원한 생명의 서클은 끊임없이 맞물려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인공의 손길만이 정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은 생명의 원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독소를 정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 둘째 날. 8. 12. 남양 방조제에서 )
# 여행지에서 만나는, 혹은 그 과정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여행자는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혹은 몇마디 담소(談笑)를 나누기도 한다. 목적이 같다는 동질감 이외에 여행이라는 여정(旅情)이 자아내는 그 내밀(內密)한 교감. 과감히 자신의 일상을 벗어난 흥분감이 서로의 입장을 들여다보는 친밀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어차피 우리는 모두 여행자일 수 밖에 없다. 이미 모체를 박차고 나온 그 결단이 우리 모두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단단한 끈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보다 축소된 집단으로 결속시키려는 오랜 습관 때문에 같은 길을 걷는다는 동질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여행은 그런 이유 때문에 바가지 요금을 쓴 것처럼 때때로 불쾌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 넷째 날. 8. 14. 대천해수욕장에서 )
# 여행을 떠나게 되면 피아(皮我)의 구별이 극명해진다. 모호함이란 무엇인가.
( 셋째 날. 8. 13. 영목항에서 )
# 시대를 앞서가는 자.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는 이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 획일화(劃一化)된 사회에서는.
( 여섯째 날. 8. 16. 고창에서 )
# 예술의 혁명이 정치의 혁명으로 이어질 수는 있어도, 정치의 혁명이 예술의 혁명으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 일곱째 날. 8. 17. 목포에서 )
# 革命이란 차근차근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혁명이 아니다. 혁명이란 보다 급격한 急轉換, 急成長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절차와 인과에 의해서 이루어 지지만 그 결과의 종점에 다다라서는 결국 급격한 형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람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量)이 팽창해 가지만 결국은 급격한 질(質)의 변화. 곧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이것을 우리는 혁명이라 부른다. 내속에서도 역시 이번 여행을 통해 작은 혁명이 일어났으리라 믿는다.
( 여행을 마치고. 8. 20. 서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