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회 카톡방의 번개산행팀이 부산 천감천문화마을과 천마산 일대로 행선지를 정하었는데, 외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코로나 감염 위험으로 행선지를 바꾸기로 하였다. 영남 알프스를 다니던차에 힘에 안차겠지만, 가까운 함안 군북의 백이산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시골정서가 묻어나는 새로 생긴 군북역사 근처 다리밑에 주차를 하고 산으로 들어서니 초입에선 경사가 완만하게 시작되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산딸기도 따며 여유있게 오르다 부부산꾼네를 만났더니, 자청해서 코스 안내에 나선다. 설명인즉 대체로 정상인 백이산은 가파르고, 숙제봉은 길이 좋지 않으니 사람들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그러나 우리들은 이름하여 산꾼들이다. 입산하여 정상을 밟지 않는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다. 드디어 휴게정자가 있는 둘레길 경계를 넘어서니, 가파른 정상으로 향하는 깔딱고개가 나타났다. 그동안 간간히 불던 바람마져도 어느듯사라지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가다보면 길의 일직선상 한축은 줄어드는 것이 세상이치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니 드디어 정상에 섰다. 정상은 사방이 툭트인 개괄지, 멀리는 하동 금오산, 의령 자굴산에다 가까이는 오봉산과 여항산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전망좋은 그곳에서 한참동안 쉬며, 야생화를 눈요기하고 사진도 찍으며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또다시 가파른 하산길 잠시, 하산과 둘레길 갈림길을 지나자 다시 숙제봉 오르막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듯 길가엔 작은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고, 들은대로 역시 길이 협소했다. 숙제봉에서 땀을 식히며 우리들의 남은 과제(숙제)를 잠시 떠올리고, 하산길은 공룡발자국이 많은 계곡 방향으로 잡았다.
몇군데 바위들 위에 거대하고 육중한 체구가 연상되는 공룡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게 언제쯤이던가? 공룡이 많이 없어진 시기를 약 6600만년전 쯤이라 하였으니, 성경에서의 인류 탄생은 대략 6,000년전...다행이도 공룡과 인간은 동시대를 살지 않았다.역사 연대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 공룡이 이 바위로 변하기전의 진흙탕에 머물렀을까? 끝없는 지각변동?!
그렇게 산을 내려와 산자락 마을에 도착하니 복분자밭이 있었고,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쉬워 했음직한 농장 주인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1,000여평 농장에는 많은 것들이 심어져 있었고, 지금 수확 가능한 것은 복분자였다. 주인은 직업적 농사꾼이 아니어서, 전부터 오래전 가격을 받는단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함께했던 회원들이 복분자를 주문했다.
도로를 따라 출발지로 돌아오며 마을의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길가의 많은 비석들...산은 높지않으나 역사가 깊고, 마지막으로 갇힌 지형이었다. 한적한 곳, 세상을 마다하고 수양산에 들어 고사리를 꺽어 연명했다던 백이 숙제 형제에 대한 중국의 고사,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남의 땅에 자라난 것을 왜 먹느냐고 한탄한 패망한 고려 충신의 시조글귀, 그리고 이 맥이 끊긴 고립지역, 그래서 아픈 사연이 깃든 백이 숙제란 산명이 붙었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래는 따로 있을 것 같다.
산은 여러 단계의 산꾼들이 와도 좋을듯 했다. 쌩초보는 둘레길을 돌고, 중급은 백이산정상까지, 나머지는 숙제봉까지 완주를 하는 것이다.
군북역으로 돌아와 다리밑 평상위에서 땀을 식혔다. 아직도 배낭에선 맛난 것들이 나왔다. 여름엔 그저 다리밑이 최고다. 이런 한적한 곳에 아파트 하나 사서 살며, 막걸리 한잔하고 이곳 평상에 누으면 한나절 세월은 잊어버릴 것 같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 하루의 산행을 마감한다. 삶은 덧없으나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삶은 현실이고, 인생은 역사이기에 그렇다.
[백이와 숙제는 고대 중국 고죽국의 왕자들이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였으며 지금의 하북성 남쪽을 근거로 동북지역을 차지한 큰 나라였다. 고죽국의 임금인 묵태씨는 3남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으나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고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잇도록 말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의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나라 밖으로 떠나버렸고 숙제도 왕위를 사양하고 떠났다. 이들은 주나라에서 서로 만나 문왕인 서백을 받들었다. 서백이 죽자 문왕의 아들 무왕이 은나라를 치기 위해 나설 때 이를 말리려다 목숨을 잃을 지경에서 태공망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백성들의 추앙을 받자 이들은 주나라 녹을 받는 일이 부끄럽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먹으며 지냈다. 이런 고사 속 인물들이 어떻게 하여 먼 이국땅 한반도의 남단인 함안에까지 호출되어 왔을까? 그리고 산봉우리로 한 자리씩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출처: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