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사진)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를 격파해 영국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 겸 장군이다.
워털루 전투는 벨기에 브뤼셀 남쪽 13km 지점 가로·세로 10km·4km 넓이의 전투장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과 프러시아 블뤼허 장군 휘하의 연합군이 싸워 나폴레옹군을 굴복시킨 전투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패배함으로써 1792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180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진 23년간의 긴 전쟁이 막을 내렸다.
워털루 전투 도중 나폴레옹의 엘바 섬 유배로 11개월 간 휴전이 있었으나 그가 권력에 복귀한 후 2차 전투에서 최종 패배했다.
웰링턴은 영국·프러시아·네덜란드·벨기에·러시아 등 연합군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프랑스를 유럽 제국으로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을 꺾고 그를 권력에서 영구 추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국 영웅이 됐다.
웰링턴은 나폴레옹과의 워털루 전투를 치르기 오래 전부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가 겸 군인으로서의 명성은 군사적 혁신과 현대전쟁 전략·기술에 통달했기 때문이 아니다. 영국 제국과 전체 유럽에서 군사지도자로서의 그의 명성과 성공은 독창적 기동전과 포사격 지원, 그리고 지형지물의 효율적 이용을 결합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국 역사상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 사건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굴복시킨 승리였다.
웰링턴은 1769년 5월1일 더블린에서 영락한 영국과 아일랜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학교인 이튼 학교를 다닐 때 사람들에게 장래성 면에서 그리 뚜렷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가족들과 학교 선생님들은 어릴 때 평소 느림보였던 그를 바보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 바 있어 자기 적성을 알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웰링턴은 군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발휘, 유명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마침내 앵거에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관례에 따라 16세 되던 해 소위 임관증을 돈을 주고 사서 제73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웰링턴은 군인으로서 능력이 아니라 계속 높은 계급을 사들여 진급을 거듭했다. 그는 25세 때 33보병연대를 중령 계급장을 달고 지휘했다. 그는 군에 들어간 지 10년이 지났지만 단 한번도 전투를 해보지 못했다. 그는 10년 동안 군인이면서도 당시 관례대로 아일랜드 의회의원으로서 사회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웰링턴은 1793~95년 3년간 네덜란드와의 전쟁 때 비로소 적군이 발사하는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웰링턴의 상사들이 비록 적과의 일련의 전투를 어설프게 조직하고 치졸하게 지휘했지만 그는 이때 용감하고 유능한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요크 공작을 비롯해 상사들의 부적절한 지휘와 불필요한 병력손실이 지겨워 일선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한때 새로운 직업을 물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가 없자 그는 군대로 복귀한 후 연대를 이끌고 인도로 건너갔다. 웰링턴은 이때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쏟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가 평소 즐기던 술과 도박을 끊은 것도 이런 결심과 연관된 것이다.
웰링턴은 인도에서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했다. 그의 이런 고속승진은 부분적으로는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그의 형 리처드가 밀어준 덕택도 있었다. 리처드는 웰링턴을 계속해서 직책과 책임이 높은 자리로 끌어올렸다. 웰링턴은 이런 족벌적 시혜 덕택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인도의 격렬한 저항운동을 효과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지휘관으로서 합당한 능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웰링턴은 1799년 세링가파탐에서 미소르 술탄(왕)과 싸워 그를 패배시켰다. 4년 후에는 7000명의 병력과 22문의 대포만 가지고 아사예에서 100문의 포 지원을 받은 4만 명의 마하라타스 인도 대군과 싸워 이겼다.
그는 45세 때 스페인에서 귀국, 전국적인 환영과 영예를 한몸에 받았다. 그에게는 황금과 드넓은 봉토와 웰링턴 공작 작위라는 물질과 명예의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유럽 평화 정착…존경받는 군사지도자 |
|

|
웰링턴은 1805년 영국으로 돌아와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그는 1807년 8월29일 사단장으로 덴마크와의 짧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웰링턴은 중장으로 1만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폴레옹의 포르투갈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포르투갈로 건너갔다.
웰링턴은 탈라베라 드 라 레나(1809), 살라망카(1812), 빅토리아(1813) 전투 등에서 나폴레옹군에 연전연승했다. 그는 1814년 툴루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군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내쫓았다.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뒤따라 파리로 입성하려 할 때 나폴레옹의 폐위 소식이 전해졌다.
웰링턴은 포르투갈·스페인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했다. 가장 성공적인 전술은 방위선과 공격선을 중심으로 전진·후퇴를 되풀이하면서 초토화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손실병력 보충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데다 불필요한 사상자를 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사전에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집행했다.
웰링턴의 전술은 적을 먼저 공격하지 않고 적이 아군을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전술을 썼다. 특히 적군을 식량보급을 할 수 없도록 이미 초토화된 농촌지역으로 유인해 무찌르곤 했다. 그는 안전한 항구에 통신부대를 배치하고 이 부대를 통해 효과적으로 병참과 신병을 보충받았다.
웰링턴은 유럽 정복자(나폴레옹)를 정복한 위대한 군인으로 칭송받으면서 나폴레옹의 유럽제국 영토를 재분배하기 위해 소집된 1815년 빈 회의에 영국을 대표해 참석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빈 회의가 끝나기 전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 2차 전투를 재개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회의장을 초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영국과 연합국에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뉴스였다.
웰링턴이 회의 도중 연합군 지휘를 다시 맡으려고 출발준비를 하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가 그에게 말했다. “이 세계를 구출해야 할 임무가 웰링턴 공작에게 또다시 맡겨졌다.”
“나폴레옹이 어지럽혀 놓은 세상을 다시 구해내라”는 지상명령은 바로 웰링턴이 완수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였다. 웰링턴은 2차 접전 때 병력 수에서 압도되고 나폴레옹의 진격로도 미처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평소처럼 근방에서 유일하게 높은 지대로 가장 방위하기 좋은 지형을 골랐다.
웰링턴은 1815년 6월18일 프러시아 야전군 원수 게프하르트 레베레흐트 폰 블뤼허 장군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어 중부 벨기에 평원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과 웰링턴 두 사람에게 최후의 전투였다. 이 전투 후 나폴레옹은 2차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보내졌고 웰링턴은 명성과 재부의 축복 아래 정계를 주름잡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군과 영국군·프러시아군을 비롯한 연합군과의 용호상박의 혈전이었다. 한 번 패전의 공포가 눈깜짝할 사이 나폴레옹군을 감전된 듯 휩쓸자 공황심리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군은 영국군과 프러시아군의 맹렬한 추격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워털루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웰링턴이 승리하지만 이 전투에서 쌍방 희생자도 많았다. 영국군은 1만5000명, 프러시아군은 7000명, 프랑스군은 3만2000명, 그리고 적어도 7000명이 포로가 됐다.
웰링턴은 워털루 승전 후 ‘철혈공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귀국 후 30여 년간 영국 내각과 의회에서 정치가로 활약했으며 1828년 총리로 임명되고 1842년 영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기도 했다. 웰링턴은 1846년 공직에서 은퇴한다. 그는 1852년 9월14일 83세를 일기로 캔트시 월머 성에서 숨을 거둔 후 성대한 의식을 거쳐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됐다.
웰링턴의 업적은 유럽 평화를 잠정적으로나마 정착시키고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 기간을 연장해 주었다.
그는 오늘날 또 한 사람의 영웅 말버러 장군과 함께 영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