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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의 대표 바위, 요정의 굴뚝(fairy chimney)
터키 카파도키아Cappadocia 에서의 첫날은 기암괴석의 계곡과 바위를 뚫어 만든 거주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전날 페티에Fethiye 에서 오는 야간 버스에서 하도 시달린 탓에 투어가 시작되는 9시까지 한 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수면을 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카파도키아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감을 느낄 새도 없이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바위와 기도원을 둘러보는 틈틈이 쇼핑 시간이 주어졌는데 제일 처음 들른 곳은 카페트 공장이었다. 그 이름이 'Carpedocia(카페도키아)'였는데 같이 있던 일본인 일행은 네이밍이 절묘하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실크 카페트의 원재료인 누에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시연을 하고 있는 터키 여인
그들은 우리에게 카페트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직조 시연을 관람시킨 뒤 본격적으로 판매에 들어갔다. 그러나 죠셉과 나는 살 일이 없었다. 이미 이 곳 카파도키아에 오기 전 셀축에서 구입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설명을 데면데면하게 듣고 별 관심이 없는 것을 알아챈 건지, 아니면 젊은 남자 여행자들은 카펫 구매 비율이 떨어지는지, 아뭏든 우리에게는 전담 직원조차 배치가 안되었다. 대신에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나 아줌마들 위주로 맨투맨 판매에 들어갔다. 그들은 여학생들이 돈이 없다며 안 사겠다고 하자 '그러면 값싼 킬림이라도 사라'며 종용을 했는데, 듣기에 따라서 그 말은 좀 싹수가 없게 들리기도 했다. 그들의 판매가 어찌나 적극적이었던지 견디다 못한 여학생 중의 한명이 우리에게 웃으며, "카페트 하나 사시고 저희좀 구해주세요."라며 반농담을 하기도 했다.
카페트 공장을 나와서 간 곳은 보석 공장이었다. 각종 보석들이 휘황찬란하게 진열되어 있던 그 곳 역시 터키 보석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가공하는 시연을 해준뒤 판매에 들어가는 전형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터키에서 유명한 보석은 '터키석(Turquoise)'으로서 푸른 광채가 눈부시기는 했지만, 때로는 터키석이 올드 패션하게 취급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선뜻 구입하기가 꺼려졌다. 터키 보석 판매상들의 최대의 무기는 '친근감 형성하기'였다. 그들은 한국사람들이 들어오면 한국말로, 일본사람이 들어오면 일본말로 인사를 건네고, 몇 마디 농담을 하곤 했는데 무척 호감이 갔다. 여자 판매원은 자신을 '이쁜이'라고 소개했고 남자는 스스로를 '미남'이라고 했다. 보석의 값을 물으면 갑자기 '이십'이라고 한국말을 해서 우리를 웃겼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한국어를 하는 터키인을 보면 누구나 신기하게 생각이 들기 마련일테고, 그것이 호감으로 발전해 마침내 보석을 구매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이 많은 아주머니들같으면 하나 정도 살 거 같았는데, 우리 그룹에서 특별히 구입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가이드가 다음으로 우리를 안내한 곳이 바로 도자기 공장이었다.
앞서 둘러 보았던 카페트나 보석류와는 달리 도자기는 무척 관심이 가는 품목이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멋진 기념품을 사오라는 '예술적인' 어머니의 분부가 없었다 하더라도, 기하학적인 패턴과 맑고 화려한 색상을 가진 터키 도자기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구입을 안하고는 못배길 것이었다.
간단히 터키 도자기의 역사와 제조 공정에 대해서 브리핑을 받고 들어간 방에는 소녀들이 밑그림이 그려진 접시에 색상을 칠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눈망울은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마저 잃어버린, 날개가 꺾여버린 새들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특별히 관광객들을 위해 전통방식으로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빚는 모습까지 시연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천이나 광주의 우리 도자기 장인들이 쓰는 발물레 돌리는 모습과 무척 유사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우리 팀은 마치 주인의 명령에 따라 목표물을 찾는 사냥개처럼, 뿔뿔이 흩어져 매장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접시를 석 점 정도 구입할 생각이었고, 죠셉은 머그컵을 하나 구입하고 싶어했다. 사무실에 앉아 일하다가도 터키에서 구입한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면서 터키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이 좀채로 눈에 띄지 않아 나만 구입을 하기로 했다.
내가 '알리'를 만난 것은 그 때였다. 170cm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나이는 45세 가량 되어 보이는 그는 면도한 자리가 푸르스름하고 머리가 말끔하게 정돈된, 탤런트 변희봉을 닮은 사나이였다. 나는 그와 몇 마디 나누다가 그의 불그스름한 얼굴과 알콜기가 느껴지는 숨결에서 어제 과음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가 선택한 접시를 보여주자 알리는 다짜고짜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하도 뜬금없이 질문을 던지기에 즉각 답변을 해주지는 않고 왜 그런걸 묻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며 혹시 예술쪽의 일을 하지 않냐는 것이다. 그의 거듭된 탄복에 나는 기분이 좋아지려 했지만, 순간 그의 상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나 진정한 고수였던 그는 입술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특히 내가 두 번째로 고른 물건은 투르크 시대로부터 내려온 문양으로서 오직 자신의 가게만이 보유하고 있는데 내가 골라낸 거라며 다시 한 번 안목을 치하했고, 석 점 합쳐서 원래는 300YTL(터키 리라)인데 할인 가격을 적용해서 270리라에 주겠다고 했다(1리라는 한화 약 800원). 암산을 해보니 대략 20만원이 넘는 금액. 놀란 우리가 너무 비싸다며 좀 더 깎아달라고 조르자 다시 가격은 246리라로 떨어졌다.
가격 변화의 추이 : 300 → 270 → 246
석 점 모두를 꼭 사고 싶었으나 여전히 비싸게 느껴져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점을 빼고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실랑이 끝에 두 점에 135리라를 주고 구입하기로 했다.
알리의 장사 수완이 발휘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와 죠셉은 대다수의 우리 팀이 아직 쇼핑이 끝나지 않았기에 가게 안에서 하릴없이 도자기들을 더 보고 있었다. 도자기 두 점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고 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마음이 정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알리가 말했다.
"왜 나머지 하나를 사지 않니?"
"나 돈 없어, 알리."
"니 호텔에 가면 있잖아. 가이드 시켜서 추후에 결제하라고 하면 돼."
"나 호텔에도 돈 없어."
"너 플라스틱 머니 갖고 있잖아. 우리 카드 다 돼."
그는 이 부분에서 입으로 쉭 소리를 내며 카드 긁는 시늉을 했다. 나는 집요하게 물건을 판매하려는 그의 태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인지라 이 흥정의 결말이 어디인지 확인해보고픈 욕구가 생겼다. 나는 알리의 말을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아니, 돈을 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네 물건은 좀 비싼 것 같아. 이런 물건 페티에에서도 봤었는데 거기서는 60 정도 했었다구."
알리는 내가 사지 않은 접시의 가격을 120리라로 부르고 있었다. 알리가 내 말을 맞받아 쳤다.
"이봐, 대니. 이 물건은 니가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야. 이 독특한 문양과 색깔을 봐. 이건 흉내낼 수 없는 거라구."
나는 내가 페티에의 가격을 예를 들 때 그가 '품질' 운운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알리 당신이 품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 당신은 내가 어떤 물건을 보고 왔는지 모르잖아. 내게는 다 비슷한 물건으로 보이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미 내가 두 점이나 물건을 구입했다는 사실이야."
알리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결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얼마를 원하니?"
이렇게, 정찰제가 아닌 흥정식으로 물건 값을 정하는 경우는 가격을 잘 책정해야 한다. 가격을 너무 높게 부르면 상대가 그냥 받아들여 싸지 않은 가격에 물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인수해야 하는 수가 있고, 너무 낮게 후려 쳐버리면 상대가 불쾌해하며 거래 자체가 성사가 안될 수도 있다. 얼마를 불러야하나 고민이 아닐 수가 없었다.
"80."
내가 80리라를 낼 용의가 있다고 오퍼를 던졌을 때, 알리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내가 너무 낮은 가격을 말하는 게 어이없다는 뜻인가.
" 당신이 보기에 80리라는 형편없는 가격일 수도 있겠지. 사실 나는 60리라 정도에 구입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정말 최고의 물건이라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해서 최대한 성의있게 가격을 제시한 거야."
내가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니!"
이제부터는 기 싸움이었다. 나도 질 수는 없었다.
"알리!"
그리고 서로 이름을 두어번 더 부르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이때부터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어서 우리의 흥정을 흥미롭다는듯이 관람하기 시작했다.
"너 오른 손 꺼내봐."
알리가 내 호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주머니 속의 내 현금 뭉치를 꼭 쥐고 흥정에 임하고 있었다.
"너 지금 손에 돈 쥐고 있잖아. 그걸로 사면 될거 아니야."
이것이 노련한 장삿꾼의 진정한 모습이란 말인가. 눈에 적외선 투시경을 착용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지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더욱 오기가 발동했다.
"쉭!"
나는 입으로 소리를 내며, 돈을 꼭 쥔 손을 그의 눈 바로 앞까지 한 바퀴 휘젓고는, 재빨리 주머니에 다시 집어 넣었다. 순식간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행동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알리는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니, 너 이 접시 꼭 사야된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있단 말인가, 상인이 권하는 물건을 손님이 반드시 사야만 한다는. 이 흥정은 이미 단순한 흥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더욱 흥정에 집중했다.
"알리, 나 이 물건 사면 이스탄불까지 걸어가야 해(If I buy these things, I have to walk to Istanbul)."
"그럼 여기서 같이 일하면 되잖아."
나는 순간 알리가 무슨 말을 한건지 잘 이해가 안되어 가만히 있었는데 구경꾼들이 알리가 리스닝을 잘못 했음을 지적하고 나섰다. work가 아니라 walk라고. 알리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카파도키아에서 이스탄불까지는 600여 km이다.
알리는 호락호락하게는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저만치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온 알리는 방금 사장한테 말해서 허락을 얻었으니 100리라에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가격이면 정말 'good deal'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드디어 20리라가 더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부른 가격이 80이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더 깎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들어온 우리의 뚱녀 가이드가 아직 안 끝났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온다. 출발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난감한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10리라 정도만 더 깎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지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더이상 흥정을 못하게 되다니. 이대로 딜을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저 접시는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나. 내가 속으로 엄청 갈등을 하고 있는데 조용히 옆에서 흥정을 지켜보고 있던 죠셉이 나섰다.
"내가 그 접시를 사겠소."
그가 나를 슬쩍 돌아보며 '괜찮지?'라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안 괜찮다면 어떻게 하려구. 이미 말을 꺼낸 걸. 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는 벌써 계산을 하려 카운터로 향하고 있었다. 알리는 포장 코너 쪽의 어린 직원들에게 팔을 휘저으며 빠른 터키어로 뭔가를 지시했는데, 짐작컨대 저들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빨리 포장을 해버리라는 뜻같았다.
포장을 하고 카드로 물건값을 결제하면서 죠셉이 알리에게 말했다.
"당신 참 수완좋은 사업가요."
"아니, 대니가 한 수 위요. 대니로부터 내가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소."
알리가 입가에 미소를 띄고 큰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터키를 다시 방문해서 자신의 매장을 찾아오면 그때는 차를 한 잔 꼭 대접하고 싶다고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버스가 계속 기다리고 있던 터라, 계산을 마치자마자 죠셉과 나는 쇼핑백을 나란히 들고 매장을 황급히 나서야 했다. 짧은 작별인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는데 알리와 사진 한 장 같이 찍지 못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먼지를 내면서 뙤약볕이 내리쬐는 도로를 버스가 달린다. 내내 이런 저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내가 죠셉에게 물었다.
"야, 그런데 알리는 왜 그렇게 나에게 그 도자기를 팔려고 했을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네가 물건을 알아봤다고 생각했겠지."
그랬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셈에 밝은 영악한 shopper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죠셉에게 최초가격 150리라가 100리라까지 떨어져도 파는 걸 보면 도대체 거품이 얼마나 많은 것이냐고 잠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사실 속내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알리와의 뜻하지 않은 흥정에 손에 땀을 쥘만큼 흥미로웠고, 그로 인해 터키에서 도자기를 산 일이 고스라니 추억이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죠셉이 말했다. 언젠가 내가 다시 터키를 방문해서 알리를 찾아가면 그는 반갑게 맞아 줄거라고. 그리고 그는 다시 나에게 물건을 팔려 할 거라고.
첫댓글 색감이 선명하고 화려한 사진들을 보니 기분도 좋아지네요~ 수공예 장식 접시가 많이 탐나요..
사진이 예술이네요~ 달력에서 본 사진! ㅋㅋ
도자기 공장이라고 하기엔 샵의 내부가 너무 이쁘네요... ^ ^ 흥정의 끝이 안보여 급기야 조셉님이 나서신듯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