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역 곽공 묘갈명(監役郭公墓碣銘)
경종 계묘년(1723, 경종 3), 흉악한 무리가 득세한지라 화가 사문(斯文)에 미쳐서, 우암(尤菴) 노선생이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출향되니 사나운 불길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선비 몇 명이 성상께 원통함을 호소하는 방도를 생각하였지만 소수(疏首)의 적임자를 고르기 어려워하다가 모두 진사 곽진위(郭鎭緯)에게 청하였다.
곽진위는 부친이 살아 계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의 부친 희적(熙績)은 원래 성품이 강개하고 사론(士論)을 좋아하였는데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상소에서 조종(祖宗)이 배양한 선비의 기세를 볼 수 있으니, 네가 가지 않는다면 이 노부가 스스로 감당하겠다.”
하였다.
진위는 마침내 제생들을 이끌고 궐문에서 호소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곧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 이별을 앞두고 어떠한 기미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자 사림(士林)이 장하게 여겼다. 공은 초명이 필적(弼績)으로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자는 계화(季和)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다.
신라 때 시중 상(祥)부터 처음 족보에 보인다.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국조에 들어와서는 명망 있는 분들이 많았다. 증조 휘 희태(希泰)는 문과에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 휘 지흠(之欽)은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부친 휘 창징(昌徵)은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모친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도정 초로(楚老)의 따님이고 구원(九畹) 춘원(春元)의 손녀인데 현종(顯宗) 기유년(1669, 현종 10) 정월 10일 공을 낳았다. 지금 성상 원년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 1)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되었는데 이해 8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형제 가운데 가장 어려서 부모가 공을 매우 아꼈지만 교만하거나 나태한 태도가 전혀 없었다. 부친이 병이 들자 칼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리니 남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고, 모친을 봉양할 적에는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모셨으며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했을 때 공은 연로했는데도 예법을 더욱 공고하게 지켰다.
공은 지론(持論)이 엄정하였는데 그의 둘째 형 만적(萬績)은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떤 일을 시행하려다가 너의 강직한 말이 두려워 그만둔 게 여러 번이다.”
하였다.
만적이 대각에 들어갔을 때 상소를 올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없애고 관직을 추삭한 일이 억울하다고 아뢰었는데, 이때 공은 마침 부친의 묘에 가있어서 돌아와서야 이 소식을 듣고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둘째 형과 대화하면서, 윤선거의 심사가 발각되었으니 선정(先正)이라는 칭호를 함부로 붙일 수 없고, 또 이전 조정의 병신년(丙申年,1716, 숙종 42) 처분은 기사년(己巳年/1689년 숙종 15에 일어난 기사환국을 말함)에 현인들을 죽인 일과 감히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통렬히 논하였다.
둘째 형은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옆에 있었다면 내 어찌 이런 상소를 올렸겠는가. 이제 후회한 들 아무런 소용이 없구나.”
하였다.
공은 형이 하는 일마다 면려하면서도 화락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숙부 경한공(景寒公) 휘 시징(始徵)은 우암 문하의 고제(高弟)였는데, 일찍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을 때 노선생의〈풍설음(風雪吟)〉에 화운하였다.
선생이 출향된 이후로 공은 분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그 시에 다시 화운하고 짤막한 서문을 지어 기록하였다. 나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들과 교유하는 일이 적었는데 공은 이따금 나를 찾아왔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번번이 훌쩍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 말을 들으면 충정으로 인한 분개한 마음이 격렬했으니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바른 도리로 가르친 것이 위태로운 화가 닥쳤을 때에 더욱 드러남이 마땅하다.
공의 부인 공인(恭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통덕랑 인식(寅烒)의 따님이고, 조부는 이조 판서 경휘(慶徽)이며 외조부는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이다. 공에게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시누이와는 화목하게 지냈으며 종들을 엄하게 부리면서도 은혜로운 마음이 있었다.
공의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인이 몸소 살림을 경영하여 남편이 가난함을 알지 못하게 하니 친척들이 그 덕에 감복하였다. 공보다 14년 일찍 신묘년(1711, 숙종37)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3세였다. 처음에는 금천(金川)에 안장하였다가 공의 상례 때 대흥(大興)의 도곡(陶谷)에 안장하여 공인을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5남을 두었으니 진위(鎭緯)가 장남으로 현감을 지냈고, 그 아래로 진강(鎭綱), 진경(鎭經), 진순(鎭純), 진서(鎭緖)가 있다. 사위는 봉사 정석태(鄭錫台), 사인 김첨(金燂)이다. 측실 소생은 진소(鎭紹)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언의가 정직하여 / 言議正直
빈천해도 그 뜻을 조금도 꺾을 수 없었네 / 不以貧賤而少挫其志
공가 같은 이 / 若公者
군자의 부류라 할 만하구나 / 其可謂君子類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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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감역 곽공 묘갈 :
저자가 곽희적(郭熙績, 1669~1725)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