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도호부사 27世 기봉 이시성 묘표음기(淮陽都護府使騏峰李時省墓表陰記)
公의 諱는 時省이며 字는 子三이고 號는 驥峯이다.
慶州人으로 新羅太史 諱 謁平의 後孫이다.
白沙 李相國 諱 恒福은 그의 從祖가 된다.
祖父 諱 光福과 先考 諱 泰男이다. 縣監을 지냈다.
公이 萬曆 戊戌 1598년에 出生 하였다.
어려서 부터 남보다 뛰어 났었다.
나이 十二世때 白沙에게 史記를 배웠다.
얼마 뒤에 모든 책을 널리 읽어서 文章을 짖는데 힘찼다.
司馬試 發解에 세번 合格하고 大科 發解에 十二회 應試하여 네번 壯元及第 하였다.
추천으로 參奉이 되었다.
늦게 文科에 及第하여 工曹와 禮曹의 郎官 겸 春秋館 記注官을 거쳤다.
또 文官의 정시에 及第하여 淮陽府使가 되었다.
通禮院 通禮로서 通政大夫에 昇進하여 누차 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享年이 71세(歲)다.
公이 천성이 淸水하고 호탈하고 담박하였다.
가정내에 있어서의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평생을 글과 술로서 스스로 즐겨서 쌀독이 비는 일이 흔히 있었으나
마음은 안연(晏然) 하였다.
후진이 와서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부인김씨는 나의 祖父 지천공(遟川公)과 內外從간이다.
六男一女를 두었으니 命弘 命徵 命元 命瀪 命任 命彦 등이 그의 자제고
生員 宋相迪이 그의 서랑(壻郞)이다.
안 밖으로 孫子들이 五十名이나 된다.
아-!
公의 文章으로 늦게 及第하여 지위가 나타나지 못했으니
어찌 이른바 문궁(文窮)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관에서 비(绯)를 내렸고
壽는 古稀를 넘었고
또 子孫들이 번창하니
맹정요(孟貞曜)가 마침내 쓸쓸한 위관(尉官)으로 지났고
또 거기에다 아들조차 두지 못한데 비하면
과연 어느 쪽이 낳은가.
公의 孫子 集慶이 와서 글을 청하므로 이와 같이 墓表陰記를 쓴다.
追記
公이 소시에 山에 들어가서 법수전(范睢傳)을 만 번을 읽고 골짜기를 나오니
山川草木이 다 范睢傳으로 보여서 큰 책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公의 文集(騏峯集)은 明谷 崔公이 깍을 것은 깍아서 正本하였다고 한다.
완산 최석정 지음(完山 明谷 崔錫鼎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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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行僉知中樞府事淮陽都護府使慶州李公諱時省之墓表陰記
配 淑夫人 安山金氏 雙封
公諱時省字子三號麒峯其先慶州人太師謁平之後白沙李相國恒福其從祖也祖曰光福考曰泰男俱縣監公生于萬曆戊戌幼而岐嶷年十二從白沙崖磨史旣而博觀諸書爲文筆力雄拔司馬試發解子三大科發解者十二而四居魁用薦者授寢郞晩擢文科歷工曹禮曹郞兼春秋館記注官尺擢文臣庭試爲淮陽府使以通禮陞通政累拜僉知中樞卒于戊申享年七十一公天性淸疎淡白篤於內行嗜讀書平生以文酒自娛甗石屢空逌如也後生多從公間業夫人金氏與不侫祖遅川公爲中表兄妹有六男一女男命弘命徵命元命繁命任命彦女適生員宋相廸內外諸孫五十人噫以公之文晩得科而位不顯豈非所謂文窮者歟然官錫緋壽兪稀子姓且蕃其視孟貞曜卒困寒尉尺無嗣何如也公之
孫集慶來請文以爲表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崔錫鼎 撰
通訓大夫 行弘文館校理 知製敎 李敬養 書
▲회양도호부사 기봉 이시성선생 묘.
진사가 되고 음보로 참봉이 되었으나, 술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벗들과 어울려 전국 명승지를 찾아 시를 짓고 노래하며 보냈다.
늦은 나이인 53세인 1650년(효종 1)에 증광 문과 병과 18위로 급제하여
공조(工曹), 예조(禮曺) 정랑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였고,
70세인 1667년(현종 8) 통정대부에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학식이 높은 풍류시인으로서 명문(名文), 명귀(名句), 명시(名詩)가 담긴 기봉집(騏峯集)을 남겼다.
71세인 1668년 세상을 떠나 소흘읍 이동교리 기봉재 뒷산에 묘소가 자리한다.
기봉재의 협문을 나와 바로 보이는 묘가 이 시성의 아버지 이태남의 묘이다.
묘비에는 “통훈대부 행 인제 현감 경주 이공 태남 지묘,
숙인 원주원씨 쌍봉”이라 새겨 있다.
이시성 선생의 묘는 기봉재를 뒤편 산으로 조금 더 올라야 보인다.
▲회양도호부사 기봉 이시성선생 묘.비
묘비는 “통정대부 행 검지중추부사 진양도호부사 경주이공 휘 시성 지 비,
배 숙부인 안산 김씨 쌍봉”이라 새겨 있다.
이시성의 유시(遺詩)로 금강산에 양사언(楊士彦)이 암각한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을 보고 지은 아래 시와
蓬萊昔日宰淮陽(봉래석일재회양) 봉래선생이 옛날 회양부사가 되었을 때
自怡平生筆力强(자이평생필력강) 평생의 필력을 자랑했네
鳳邸鸞騰書八字(봉저란등서팔자) 난봉이 나는 듯한 여덟 글자는
龍煩虎躍閱千霜(용번호약열천상) 용호가 서진 듯 천년을 경과했네
天荒地老風雲起(천황지로풍운기) 유구한 천지에 풍운이 일고
鬼護神?劒戟張(귀호신간검극장) 귀신이 보호한 듯 검극강이 날카로 우네
令人目擊駭心?(영인목격해심상)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랍게 하고 싶네
무등산에 오른 뒤 환벽당에 들러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 한 수가 전해진다.
春和踏靑節(춘화답청절) 봄 날씨 온화한 삼월삼짇날
獨遊環壁堂(독유환벽당) 나 홀로 환벽당에서 노니네
水流人亦去(수류인역거) 물 흐르고 사람도 떠나가니
松竹老蒼蒼(송죽노창창) 세월 가도 송죽만 푸르구나
▲기봉 이시성선생 석상
1981년 이재천 포천 군수와 후손들이 가산면사무소 입구 오른쪽에 ‘기봉 이 선생 상’을 건립하였으며,
2008년 후손들이 축석령 아래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인 기봉재(騏峯齋)를 건립하였다.
▲기봉재의 외삼문인 숭조문ⓒ포천 시민기자 이화준
포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축석고개 삼거리 전에 가구 판매점들 사이로 큰 사당이 하나 보인다.
아니, 이런 곳에 사당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은 생경한 장소이다.
사당의 위치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호국로 35-14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백사 이항복의 가르침을 받은 기봉(麒峰) 이시성(李時省)을 기리는 곳이다.
사당의 외삼문인 숭조문(崇祖門)은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번영을 위한 자손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기봉(麒峰) 이시성(李時省, 1598년(선조 31)~1668년(현종 9)
1598년(선조31) 포천군 가산면 마산리(말뫼)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騏峯), 본관은 경주이다.
할아버지는 이광복(李光福)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백사 이항복(李恒福)이다.
아버지는 인제 현감을 지낸 이태남(李泰男)이고,
어머니는 찰방 원영세의 딸인 원주 원씨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밝고 마음이 활발하였으며, 글 읽기를 즐겼다.
12세때 작은 할아버지인 백사 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웠다.
재주가 뛰어나 사략(史略)을 배우고, 모든 글을 폭넓고 두루 섭렵하였으며,
글을 지으매 웅장하고 월등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