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과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종교개혁자 칼빈의 니고데모파(Nicodemites) 비판
(이 글은 제가 총신 신대원 3학년 2학기때 선택과목으로 박건택 교수님의 “칼빈(깔뱅)의 서신과 글들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것 중에서 니고데모파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쓰는 글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세상(학교, 직장 그리고 사업체)에서 자신이 교회를 다니는 것을 숨기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들과 똑 같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도덕한 상황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숨기는 교인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의 2,000년 역사 속에서 계속 존재하여 왔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며 살아갔던 16세기에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 성경적인 가르침과 부도덕함에 대항하여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붙인 것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어 유럽 곳곳에서는 종교개혁의 크나큰 흐름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입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잘못된 교리와 그에 따른 부도덕함에 항의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성경중심과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천주) 교회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고 부도덕하고 잘못된 비성경적인 로마 카톨릭(천주) 교회에서 빠져 나와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으로 돌아가고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천주) 교회의 부도덕함과 비 성경적인 가르침을 깨닫고 알고 있으면서도 프랑스에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들은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들을 니고데모파(Nicodemites)라고 비꼬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는 밤에 몰래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꾸중하셨습니다.
프랑스의 니고데모파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밤 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는 여전히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며 바리새인으로서 남았다는 사실이 자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로마 카톨릭에 남아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칼빈은 그들의 이러한 변명을 니고데모의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프랑스의 니고데모파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도록 아랫 사람들을 보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그 아랫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오지 못하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하였고 그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니고데모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언급은 니고데모가 자신을 은폐했던 모습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본문인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새 무덤에 그 시신이 놓였었는데, 이 장소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방문했습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에게 잘못 보이면 곤란에 처할 수밖에 없었으나 니고데모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드러내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무덤에 방문했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고서 니고데모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니고데모는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과감하게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이득 때문에 로마 카톨릭(천주) 교회 안에 머물러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은밀히 지내면서 자신들은 니고데모와 같다고 합리화하는 자들을 니고데모파라고 칼빈은 비꼬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세상(직장, 학교, 사업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고 있지만 세상이 주는 쾌락과 자신들의 위치와 입지, 그리고 이득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니고데모파의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내어야 하며,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자신들을 드러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도덕함을 즐기거나 혹은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이 교회를 다니는 것을 숨기거나 세상이 주는 이득 때문에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