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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 - 로마 공화정이 시작되고 성문법 제정을 위해 그리스에 시찰단을 보내다!
로마의 7대 왕인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범하니 그녀는 자기 시종을 보내 전쟁에 나간 아버지 루크레티우스와 남편 콜라티누스
를 불러서 사실을 말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한 후에 은장도를 가슴에 찔러 자결합니다.
1. 집정관 루키우스 브루투스
자결한 루크레티우스의 남편인 콜라티누스는 친구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아내
루크레티아의 유해를 '포로 로마노' 의 연설대 위에 안치하고는 타르퀴니우스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하자... 민중은 커다란 함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합니다.
그러고는 민중은 타르퀴니우스왕에 대항하기 위해 민병대를 결성하는데....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왕도 변고를 알고 돌아왔지만 성문은 굳게 닫힌채
열리지 않았으며 타르퀴니우스왕는 별수 없이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를 찾아갑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 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레 민회에서 1년
임기제 2명의 집정관을 뽑으니 이후 450년간 이어질 공화정(Res Publica Romana)
의 시작으로...... 성경 마카베오기 에는 "로마인들은 대항하는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지만 의지하는 이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라고 적었습니다.
또 로마인들은 아무도 왕관을 쓰지 않고, 위엄있게 보이려고 자주색 천을 두르지 않았으며
원로원을 세워 삼백이십명의 의원들이 날마다 백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논의하여
잘 다스리게 하였으며 또 해마다 한 사람을 뽑아 백성을 다스리고 온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으니 모두 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들 가운데에는 시기나 질투가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공화정 로마를 “자유를 얻은 로마인이 평화시와 전시에 어떻게 살았는
가를 이야기 할 것이니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고 로마사 2권 서두에 적었습니다.
외삼촌 타르퀴니우 왕을 추방한후 브루투스는 ‘포로 로마노' 에 모인 시민들에게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으며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으며
초대 집정관 으로는 브루투스 와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습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성인 “브루투스”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아니고 “바보” 를
뜻하는 별명으로 폭군으로 전횡을 휘두르는 타르퀴니우스왕 치세에 바보로 멸시당하면서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린 결과 마침내 권력을 지게 된 것인데 그래도 왕의 외조카이니
왕가에 대한 정보는 많았을 것으로 보니 개혁은 신흥세력 보다는 구세력속에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로물루스시대에 100명이던 원로원은 7대왕 타르퀴니우스 시대에 200명이었는데 브루투스는 신흥
세력을 임명해 300명으로 늘렸으니 1년 임기로 교체되는 집정관에는 유력 가문의 가부장
집단인 원로원 밖에 없었으니..... 나라를 다스릴 권위와 권력도 원로원이라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공화정 로마에서 연설할 때는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에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
라고 불렀으니...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 라는 뜻으로 이는 브루투스의
개혁으로 100명이나 되는 신참자들이 새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관용구 입니다.
2. 선왕 타르퀴니우스와 전쟁
로마 유력가문의 젊은이들에게는 새 제도가 불만이었으니 왕정 때는 왕의 기분에 따라 자신도 원로원
의원이 될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죽을 때 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젊은이들은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친척집에 은밀히 모여 추방된 왕을 다시 불러들이기로 결의했는데 노예 하나가 집정관에게 밀고합니다.
국가 반역자중에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포함되었으니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추방하자고 제안
하는데 다른 집정관 콜라티누스 뺨에 눈물이 흐르자 추방형으로 결정났다고 생각했지만, 브루투스
는 경비병들에게 “앞으로의 일은 그대들의 몫이다” 라고 말하자 두 아들은 옷을 벗기고는 채찍질
을 당한후 도끼에 목이 잘렸는데.... 브루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똑바로 응시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햇던 다른 집정관 콜라티누스는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에
겨디지 못하고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 가족과 함께 이웃나라로 망명했는데....
로마에서는 자진해서 망명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공석인 집정관에는 선왕 타르퀴니우스와 혈연 관계가 없는 발레리우스가 선출되었습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는 왕위에 복귀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으니 12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원병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로마와 거리가 가까운
타르퀴니아와 베이 두 도시국가가 이에 응했으니 타르퀴니우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접근하자 로마는 기병대는 브루투수가 이끌고 보병대는 발레리우스가 지휘합니다.
양군은 로마에서 하룻길 거리에서 마주쳤는데 숲 사이 좁은 평지가 있었으니 에트루리아군 기병대는
타르퀴니우스의 장남 아룬테스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사촌간인 브루투스와 일대일로 맞붙었는데
분노와 환멸의 싸움이었으니.... 둘은 창을 상대방 가슴에 꽂은후 공중제비를 돌아 말에서 낙마합니다.
두 군대는 대장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돌진했으니 전투는 뒤늦게 온 보병대끼리도 벌어졌으니
발레리우스와 타르퀴니우스왕이 이끌었는데 전투는 해가 질 때 까지도 결판이 나지 않아
양군은 부득이 자기 진영으로 후퇴했는데 기묘한 소문이 퍼지니 로마군 보다 에트리아군
전사자가 한명 더 많고 전투는 로마군 승리로 끝난다는.. 그것은 신의 목소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에트루리아군은 전장에서 사라져버렸고..... 로마군은 브루투스의 유해와 함께
귀환하자 모든 로마 여인들은 자기 아버지가 죽었을 대처럼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는데,
브루투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던 로마인들은 다른 집정관 발레리우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으니 우선 그가 "네 마리의 백마" 를 몰아 개선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 집정관 발레아우스
개선식은 로물루스 이래 로마의 전통이었지만 네 마리 백마를 몬건 발레리우스가 처음이었고 그가 엄청난
부자인지라 가능했겟지만 시민들은 그가 왕족 취향을 드러낸 것으로 의심했으며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웅장한 그의 집은 마치 왕궁처럼 보였으며 게다가 나머지 집정관 자리를
빨리 메우지않고 미적거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시민들은 그가 왕위를 노린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발레리우스는 재빨리 일꾼들을 동원해 하룻반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숴버렸으며 땅값이
싼 로마 성벽근처에 소박한 집을 지어 문을 항상 열어두어 시민들이 자기가 어찌 사는지
살필수 있도록 했고, 왕이 관리했던 국고를 재정관이 관리하도록 하는등 시민들에게 평판
이 좋을법한 법률을 제정하니 갈채를 보내는데.... 새집정관은 루크레티아의 아버지가 뽑힙니다.
또 로마 시민의 항소권을 규정한 법을 제정했으니 시민들은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도 민회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왕위를 노린자의 생명과 재산은 신들의 것이 된다라는 법률도
제정했으니 이제 피해자가 왕위를 노렸다는 증거만 있으면 죽이더라도 가해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훗날 브루투스등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기에 이릅니다.
발레리우스는 시민들이 좋아할 법률을 제정하니 “푸블리콜라” 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공공(푸블리카) 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집정관에 재선되었지만 로마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왕정시대
에는 대규모 개발사업에 상공인인 에트루리아인들이 대거 참가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제는 농업과
목축업만 알던 로마인들이 주도하니 기술과 경제력을 가진 에트루리아인들이 유출되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이탈로 인한 국력의 저하는 인근 라틴족들에 대한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졌으니...
로마와 군사동맹관계였던 라틴족들은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바뀐 때문에 지금까지는 군사를
내고 통합 지휘는 로마왕이 했지만.... 이제 일개 집정관 따위의 지휘를 받아야 했으니 라틴부족
들의 왕들은 일개 시민에 불과했던 로마 집정관의 지휘를 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프랑스인들이 대혁명을 일으켜서 왕을 죽이고 공화정이 되자 영국,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사아의 왕들이 자기나라에 저런 혁명이 번질까 두려우니 군대를 몰고 사방에서
프랑스로 쳐들어 왔듯.... 에트루리아는 물론이고 어제의 동맹인 라틴 도시국가들도 로마의
지휘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로마를 침공하기 시작하니 공화정을 수립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이집트에서는 일개 왕이 아닌 신의 아들인 파라오가 되어야 했던
것이라.... 이런 이유로 라틴 부족들은 로마 동맹국에서 적대국으로 바뀌었으며 국력이 떨어진
로마는 라틴족을 비롯 이웃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좀처럼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며....
공화정이 된 결과 에트루리아 12개 도시국가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린게 아프기 시작합니다.
전투에서 양군의 군사장비 차이는 확연했으니 에트루리아 전사들이 모두 화려한 장비를
뽐내는 반면에 로마군은 장비는 기껏 구리와 가죽이 고작이었으며 에트루리아는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왕으로 앉히겠다는 대의명분이 있었으니... 그를 폭군으로
여긴건 로마 시민들 뿐이었고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를 신뢰할만한 동맹자로 여겼습니다.
푸블리콜라 브루투스는 소금을 국가전매로 바꾸어 국세를 늘리자 너도나도 상인에 뛰어들자 경제력
에 기술력이 좋아지니 이들 신흥계급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신을 믿는
다른 라틴부족에게 싸울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고 설득한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무려 5천명
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하니......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에게 원로원 의석을 줍니다.
4. 에트루리아 클루시움의 왕 포르센나
타르퀴니아와 베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패했던 타르퀴니우스 왕은 클루시움(키우시)
으로 도망쳤으니 클루시움의 포르센나왕은 로마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친정하자 로마인들 중에는
왕정으로 되돌아 가자는 분위기도 생겼는데 신속히 남진해 테베레강 서안 자니콜로요새를 점령합니다.
전투는 테베레강에서 벌어졌으니 에트루리아가 다리를 확보하려고 하자 이를 막아낸 로마군은 다리
를 불태웠으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포르센나왕은 일곱언덕을 둘러싼 로마성벽앞에 진을 칩니다.
로마가 포위된지라 남쪽에서 강을 통해 로마로 올라오던 밀의 수송이 끊겨버리자 발레리우스는
로마에 탈출하는 것으로 위장한 양치기들이 소떼와 양떼를 몰고 강에서 가장 먼 에스퀼리
누스 성문을 통해 박으로 나가니 에트루리아군은 앞다투어 진지를 버리고 가축떼를 쫓아갑니다.
그러자 푸블리콜라 부루투스는 한 부대는 에스퀼리누스 성문에서 공격해 나가고 다른
부대는 북쪽 콜리나 성문에서 출격했으며 다른 집정관 루크레티우스는 남쪽 네비아
성문으로 나가고 발레리우스는 남동쪽 카페나성문으로 나가니.... 가축을 쫃던
에트루리아군은 공격을 받고 당황하는 가운데 포르센나가 입은 손실을 막심했습니다.
하지만 포위는 풀리지 않고 성내에 식량이 떨어지자 무티우스라는 젊은이는 로마를 구하려면
포르세나왕을 죽이는 수 박에 없다고 생각하고 집정고나의 허락을 얻은후 단도 하나만을
지니고는 강을 헤엄쳐 건너 급료를 주고 있는 왕에게 접근했으나 누가 왕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시골 사람인 로마 병사의 눈에는 화려한 값비싼 옷을 입은 여러 사람 모두가 왕인 것처럼 보였던
것인데 돈을 주고 있는자를 살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왕의 비서라.... 왕에게 끌려간
무티우스는 로마의 젊은이들이 왕을 죽이고자 하니 이후에도 계속 건너올 것이라고 선언
하고는 배후를 캐려고 하자 불타는 횃불을 오른손에다 눌러 살 타는 냄새가 주위에 자욱합니다.
질겁한 왕이 감동하는 말을 하고는 그를 석방하니 이후“왼손잡이 무티우스”라고 불리는데... 그후
왕이 로마에 화평을 제의하면서 타르퀴니우스를 왕으로 복귀시키고 자견에 점령한 베이 영토
를 반환하라고 하자 로마는 2번째 요구만 받아들이니 화평이 이루어지고... 에트루리아군은
클루시움으로 귀환했으며 기원전 503년에 발레리우스가 죽자 그 많던 재산도 다 없어진지라
장례식 비용을 로마 시민들이 조금식 추렴해서 치루었으며 로마 여인들은 1년 상복을 입었습니다.
로마가 건국된지 300년이 지난 기원전 5세기 초 무렵에 로마 면적은 테베레강 주변과 하구까지로
협소했으니.....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인 타란토와 시라쿠사는 로마의 네배 정도
규모였으며 아테네는 10배이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카르타고 와는 비교할수 조차 없었습니다.
5. 성문법 제정을 위해 그리스에 시찰단 파견
공화정이 되자 원로원 계급이 집정관등 선출직을 독점하니 평민의 불만이 쌓이자 기원전 5세기 중엽
에 로마는 처음으로 성문법을 만들게 되는데, 기존의 불문법은 소수의 지배게급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 민중의 권리 획득은 자고로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이왕
만들 거 선진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참고하자는 생각에 그리스에 시찰단을 보냅니다.
이는 일본 에도막부가 1860년에 미국 사절단을, 1862년과 1863년에 제1,2차 유럽 사절단을
보냈고, 1868년 무진전쟁을 통해 에도 막부를 무느뜨리고 메이지유신을 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입안하고 주관해 1871년에 유신의 주역 46명이 미국과 유럽 12개국
을 2년간 시찰하며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돌면서 유학생 43명을 남긴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는 1881년에 조선이 일본에 박정양과 엄세영 · 조병직 · 민종묵 · 조준영 · 심상학
· 어윤중 · 홍영식 · 이원회 · 이헌영과 김옥균등 11명의 신사 유람단을
보내 4개월간 도쿄와 오사카에서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 조폐 및 제사(製絲)· 잠업(蠶業) 등을 시찰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본에서는 1868년 조슈번등 존왕양이론자들이 무진전쟁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와 싸우며 메이지유신
을 일으키던 1869년 4월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토 히로부미는 철도 건설을 결정하고 영국인 에드먼드
모렐의 도움을 받아 추진하다가 그가 1871년 30살로 결핵으로 죽자 이토와 함께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자가 되어 1872년 10월 도쿄 신바시-요코하마 구간 29km 의 철도를 개통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28년 후인 1897년 3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에게 경인철도사업을 맡겨 기공했는데 1898년에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자 5월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 가 양도받아 1899년 9월에 완공시키니, 일본
보다 27년이나 늦은데다가 일본은 오쿠마와 이토가 계획하고 이노우에가 직접 철도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자신들이 직접 첫 철도를 건설하면서 기술을 축적해 이후 스스로 일본내
철도를 건설한데 비해.... 조선은 미국인과 일본인에 철도 건설을 전적으로 맡겼으니,
외국인이 철도를 건설한지라 조선인 중 철도 기술을 익힌자가 없으니 다음 철도도 일본인
이 건설한게 두나라의 차이로.... 이런 것들이 쌓여서 훗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선진국 그리스를 찾아간 로마 시찰단은 원로원 의원 3명으로
1년간 아테네를 위주로 하고 스파르타를 둘러 보았는데 아테네는 솔론의 개혁이 있었다면 스파르타
는 리쿠르고스의 개혁이 있었으니.... 로마는 시찰단의 보고를 토대로 “12표법(表法)" 을 제정하게 됩니다.
6. 그리스 문명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 지중해 크레타섬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는 이집트와 가까웠기
때문이라 여겨지는데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미노스왕이 창설한 함대 덕분에 주변 항해가
안전해지니 부근 섬에 둥지를 튼 해적들을 소탕하고 부유해져서 석조 주택을 지었다고 합니다.
크레타문명(미노스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1700년 부터 기원전 1500년으로 기원전
1350년경에 급속히 쇠퇴했으니 대지진 때문인지 아님 그리스 본토 세력의 침공
때문인지 불분명한데 이 시기에 우아하고 화려했던 크레타의 수도 크레노스가
파괴되었으며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로 그 영화가 드러났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에서 문명이 일어나니 미케네문명이라고 불리는데, 호메로스
의 서사시 “일리어드” 와 ‘“오디세이“ 를 보면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테살리아의 왕 아킬레우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등 아카이아인
이라고 불렸던 그리스 군은 소아시아 트로이에 원정해 10년 세월 포위공방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트로이 함락으로 기세를 올린 미케네문명은 50년 뒤인 1200년경에 멸망하는 것이니....
10년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먼 외국에 가서 전쟁에 열중했으니 국고를 탕진하고 국내질서
는 흐트려졌으며 국력도 쇠퇴해 외래민족의 침략에 쉽게 정복당해 멸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0년 전쟁후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한 아가멤논은 욕실에서 왕비와 왕비의 정부
에게 살해당했으며 호메로스는 멸망당한 트로이쪽 신들의 분노탓으로 말하는데
침략자는 “도리아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에 독일의 슐리만은 트로이
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해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허구가 아닌 역사임을 입증했습니다.
침략자인 도리아인들의 문명 파괴가 워낙 철저했던 까닭에 이후 400년 동안 그리스에는 문명
이라고 할만 한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니 이른바 “문명의 암흑시대” 인데 기원전 800년
경에 그리스는 새로운 문명이 발아하니 “폴리스” 라고 불리는 도시국가들이 윤곽을 드러냅니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청동기였던데 비해 침략자인 도리아인들은 철기 무기를 갖고 있었으니
도리아인이 건설한 도시가 스파르타이고 침략을 피해 도망친 아카이아인들이
건설한 도시는 아테네로 도시국가들은 인구가 늘어나자 해외로 식민에 나서
흑해와 지중해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에 수많은 식민도시들을 건설합니다.
그리스는 테살리아를 제외하면 농경지가 없으니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경이나 목축이 아닌 생산성이 높은 상공업을 시작한 것이니.... 기원전 776년
에는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렸으니 4년에 한번씩 도시국가들 끼리의
전투를 그만두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에 모여 체육경기를 치룬 것입니다.
제 1 회 식민 활동은 기원전 9세기 말 부터 기원전 8세기초 까지 로도스섬을 지나서
소아시아 서부 해안지대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오니아지방이라고 불리는데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역사의 헤로도토스, 의학의 히포크라테스에 서사시인 호메로스도
이 지방 출신이니 그리스 본토 보다 이오니아에서 먼저 그리스 문명이 꽃핀 것입니다.
2차 식민활동은 반세기가 지난 8세기 중엽에 들아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와 나폴리,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그리고 스페인 동부 해안지대와 마요르카에 그리고 이오니아
의 그리스 식민도시들도 다시 키프로스와 흑해 지방으로 식민활동이 이어졌으니 이들에
대항할 나라는 페니카아인들이 이주해 건설한 카르타고 뿐이었는데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와 식민도시들은 모국과 식민도시가 그리스와는 달리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반면에 스파르타인이 세운 타렌토(타렌툼)와 아테네인이 세운 새로운 도시인 나폴리(네오폴리스) 와
코린트인이 세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는 식민도시 건설 이후 본국과는 단절했는지 스파르타나
아테네, 코린트적인 면은 전혀 찾아볼수 없는데.... 시라쿠사는 플라톤이 자주 방문했으며 훗날
로마군의 침략할 때 아르키메데스가 수성전에서 지렛대를 활용하는 등 중요한 매우 역할을 했습니다.
7. 아테네
아테네를 수도로 하는 아티카 지방은 바위 투성이인 그리스에서는 상대저긍로 경작지가
조금은 있으며 천연의 항구인 피레우스항도 있어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도시니
침략자 도리아인의 지배를 면한지라 아카이아인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했다고
여겨지는데 크레타섬의 폭군 미노스를 타도한 테세우스를 건국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8세기 들어 귀족정으로 바뀌었으며 귀족인 9명의 통령이 1년 임기
로 행정과 군사와 제사를 담당하고 그 밖의 귀족으로 구성된 장로회의가 이들을 보좌했으며
자유 시민으로 이루어진 민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없었는데 기원전 7세기에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둔 귀족 계급에 대해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게급의 대두로 문제가 생깁니다.
경제력을 가진 자유 시민계층은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데 대해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빚에 시달릴
때가 많았던 소규모 자작농들도 이에 동조하자 “데모스” 라고 불린 시민들은 기원전 620년 무렵 법률
의 성문화로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귀족은 불문법 시대에 제멋대로 휘두르던 사법권을 잃었습니다.
대토지 소유자로 명문귀족 출신인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귀족들로부터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권한을 인정
받은후 “솔론의 개혁” 을 단행했으니.... 우선 자작농을 빚더미에서 구하기 위한 정책을 법제화 했으니
빚을 갚지못한 사람이 채권자의 노예가 되던 기존 제도를 폐지했으니 고대사회 최초의 인권존중 사례입니다.
“데모스”의 급진파들은 모든 사유지를 지주로부터 몰수해 국유화한후 똑같이 분배하자고 주장했지만
온건한 자유주의자 였던 솔론은 그것을 거부하고는 “시민들에게는 타당한 명예를 주었다, 그들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고 새로운 권리를 덧붙이지도 않고!” 라고 말했으며 인구조사를 실시한후
권리는 부동산에 비례한다고 규정햇으니 출신 계급에 따라 참정권이 좌우되던 제도는 사라집니다.
왕정은 한사람의 군주가 다스리니 “모나르키아”이고 귀족정은 소수의 엘리트가 국정을 담당하기에
“아리스토크라티아” 이며 권력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는 솔론의 제도는 인구조사에 바탕
을 두는지라 “티모크라티아” 라고 부르니 훗날 데모크라시(민주주의, 민주정) 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솔론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테네 시민을 제1계급, 제2계급, 제3계급으로 구분하고 무산자
인 시민은 제4계급이라 했는데 1,2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자기 돈으로 군비와 군장을
갖추어 기병으로 참전해야 했고 제3계급은 역시 자기 돈으로 군장을 갖추어 중무장
보병으로 참가하며 제4계급은 경무장 보병이나 함대 승무원으로 병역에 종사하도록 했습니다.
정부 요직은 제1,2 계급이 차지하며 제3 게급은 행정 관료를 맡고 제4계급은 선거권은 갖되
피선거권은 갖지 못했으니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를 귀족정에서 탈피시켜 폴리스라는
민주적인 도시국가로 탈바꿈 시켰으니 프랑스 혁명 이전에 “평등” 은 '모든 시민이
서로 평등' 한게 아니라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평등" 을 의미했으니 차별은 당연시 했습니다.
아테네인이 대거 이주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은 통상을 통해 아테네 보다 먼저 부유해져
번영을 누렸는데, 아테네인들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솔론의
체제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니 그가 은퇴하자말자 불만이 터져나왔고 누가
통제할수 없어 무정부 상태 즉, “아나르키아”가 되니 결국 독재정치 “티라니아” 로 변합니다.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수습해 줄수만 있다면 독재라도 좋다는 것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솔론처럼 명문
귀족 출신인데 자기가 속한 귀족계급이 아닌 민주파라고 불린 신흥 상공 계급에 권력 기반을 두었으니
상공업자들은 경제발전에 민감한지라 그러자면 정치안정이 필수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페이시스토라스가 독재정치를 시작한 것은 기원전 561년이었으나 반대세력이 통일전선을 구축해 그를
추방해 버렸는데 15년후 546년에 페이시스토라스는 무력을 사용해 아테네로 복귀했고 20년동안
독재정치를 계속했으며 이 기간 아테네는 평화와 질서에 경제적으로도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당시 지중해 세게 도자기 무역을 주도하던 코린트나 사모스, 밀레토스, 로도스 대신에 훌륭한 아티카
도자기가 주름을 잡게 되었으며 아테네군사력의 주축을 해군에 두고 지중해의 중요한
섬들과 펠로폰네소스반도에 기지를 세웠으며 살라미스와 델로스는 다시 아테네의 지배
아래로 들어왔고 또 다른 큰 도시국가나 리디아왕국 및 페르시아와는 우호관게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10년에 아테네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페이시스토라스 사후 아들이
물려받은 독재정을 타도했는데.... 앞장선 클레이스테네스는 상공업자들의 세력이 커진 현실을
인정해 귀족정을 부활하지 않고 아티카를 3구역으로 나누었으니 아테네와 항구 피레우스
는 제1지역, 해안지대는 제2지역, 내륙은 제3지역으로 다시 각 10개의 소구역으로 나눕니다.
소구역은 다시 인구 밀도에 따라 “데모”로 나누니 오늘날 구에 해당하는 데모는 160개 내외였으니 개혁
이후 자기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에 소속 데모를 붙인게 정식 이름이 되었으니 소크라테스는 알로페케
데모의 소프로니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가 되니 기존에 소속 가문과 씨족 이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
으니 민주적이라고 불리는데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해 귀족권력의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그 다음 민회의 권한을 강화했는데 20세 이상 시민은 누구나 참석할 권리가
있으며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졌고 한해 몇차례 소집을 통해 전쟁을 할 것이냐, 강화를 맺을
것이냐, 타국과 정치동맹에서 정부 관리 선출등 모든게 민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니
데모스(민중) 에 의한 정치체제 라는 뜻에서 “데모크라티에” 즉 민주주의(민주정) 입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이 정한 4계급은 그대로 두었는데 다만 토지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업종에 관계없이 수입을 기준으로 했으니 상공업자의 발언권이 강해졌고
정부 기구로 5백인 회의를 창설해 각 구에서 30세 이상 시민중에 추첨으로
뽑았으며 정무를 담당하고 의장은 한달에 몇 번 열리는 회의에서 추첨으로 정합니다.
또 1년 임기로 9명으로 구성되었던 정부 곤리를 10명으로 늘리고 “스트라테고” 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 국가 전략담당관에는 해마다 민회에서 서출하니 내각이고 그 외 “도편 추방제” 를 도입했으니
독재정치를 피하기 위함인데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10년간 추방하는데 시민이 3~4만명이고
1만명 내외가 참석하니 6천개의 도자기 파편이 필요했다고 하며 재산이나 시민권은 유지됐다고 합니다.
아리스티테스는 도편추방제로 추방되었는데 3년도 되지않아 다시 불려왔으니 페르시아
가 침략한 때문으로 귀국후 총사령관인 테미스토클레스와 협력해 아테네가 앞장서서
싸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도 추방되는데 이 제도는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니...... 위에서 보듯 국익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시민인 외국인(주로 그리스 다른 도시국가)과 노예와 여자와 20세 미만 청소년
은 참정권이 없었으며 부모 가운데 한사람은 아테테인이어야 시민권이 주어
졌으며 페리클레스시대에 이르면 부모 모두 아테네인이어야 한다고 배타적으로 바뀝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이라도 조국의 법이라며 사약을 마시고 죽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망쳤는데
이는 그가 아테네 태생이 아니기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로마는 다른 길을 택했으니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 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라고
말했으며 또 로마는 팽생 노예인 그리스와는 달리 “해방노예”제도를 만들어 로마시민권을 주었습니다.
8. 스파르타
아테네를 비롯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민주정치 체제를 채택한 반면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위치한 스파르타는 기원전 1200년경 침략해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선주민
을 정복하고 세운 국가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확실하게 분리되었으며 정복자
의 자손인 스파르타인 성인 남자는 1만명 남짓했으니 그 가족들만이 자유시민 이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모여사는 저 1만명의 직업은 모두 다 “군인” 이었으며 참정권도 이들만이 가졌고
두 번째 계급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로 정복자를 따라온 타지방 사람들이며
자유민이지만 시민권이 없으니 참정권도 없었지만 병사로 참전하는 병역의 의무는 주어졌습니다.
세 번째 신분은 “헬로트”라고 부르는 농노였으니 도리아인들이 침략해 오기 전에 스파르타에
살고 잇었던 사람들로 그리스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었으나 철기를 지닌 도리아인들에게
정복당해 노예는 아니었지만 농노 신분으로 사유재산권이나 참정권 및 재판권등
시민이 누리는 권리는 없이 시민의 개인 농장에서 농업에만 종사했고 결혼만 가능했습니다.
헬로트들에게는 병역의 의무조차 없었다고 하는데 1,2,3계급의 비율은 1대 7대 16정도로 스파르타인
한명이 23명을 다스렸다는 얘기인데.... 24분지 1에 불과한 스파르타인은 무력을 유지해야 하니
전원 군인에 종사해야 했고 농노 신분에 묶인 헬로트들은 항상 불온한 처지니 감시와 통제가 불가피
했는데 남자 1만명도 노인이거나 전투 부상으로 불구도 있으니 실제로는 5천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인 1만이 민회에 참석해 투표권을 가지려면 30세기 되어야 하며 민회에서 선출된 60세 이상으로
구성된 28명의 장로회가 있었으니 두명의 왕을 포함해 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은 스파르타의
두 명문가에서 맡았고 두 구주가 함께 다스리니 “모나르키아” 가 아니라 “디아르키아" 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리스 국가들이 아테네를 따라 민주정치체제로 갈때 스파르타는 기원전 7세기에 이루어진 리쿠르고스
의 개혁으로 저 정치체제는 더욱 확고해 졌으며 더욱 군국주의로 치달았는데 아기는 태어나자 마자
장로들의 시험을 거쳐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 것 같으면 버려지거나(죽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었습니다.
건강한 전사로 자랄 것 같다는 판단을 받은 아이는 6살까지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지만 7살이
되면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스무살부터 병역이 시작되고 60세가 될 때
까지 현역으로 복무했으며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30세 까지는 신혼 생활 대신에 기숙사
단체 생활을 했으며 30세에 지붕이 있는 집에서 처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 되었습니다.
30세까지 기숙사 생활은 지붕이 있는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땅 바닥에 텐트를 치고 단체 야영
생활을하는 것인데 국정 참여와 병역을 제외하면 스파르타에서는 남녀가 완전히 평등했으니
여자도 건강하고 튼튼한 체격을 만드는데 필요한 식사를 하는게 의무였으며 건강한 자식을
낳기 위해 단것이나 술, 그리고 미식(美食)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체육교육도 남자와
똑같이 받고 경기대회에서 성과를 시험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결혼에서 유리했습니다.
훈련을 할때나 경기대회에서는 4년마다 열리던 올림피아 경기처럼 여자도 남자처럼 완전 나체가 되어야
했으니 리쿠르고스는 (옷으로 신체를) 감추면 오히려 묘한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했으며 스파르타에서
는 성생활 조차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전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에 불과했으니 독신자는 백안시
되고 과부는 재혼이 장려되었으니 여인은 건강한 자식을 낳는 것과 베짜기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도 소년 시절에는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만 배울뿐 고상한 내용의 책을 읽거나 수준높은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좋지않게 생각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과묵한 사람을
“라코니코‘라고 하니 스파르타 지방 이름이 라코니아였으니 곧 스파르타인 이라는 뜻입니다.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토론을 시작해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할 때 까지 놓아주지 않았던
아테네인에 비해 스파르타인은 독서에 탐닉하거나 의문을 품거나 깊이 생각(사색)하는 것 까지도 좋아
하지 않았으니 수다스러운 사람을 경멸했고 회의에서도 간결하게 요점만 간추려 말하는게 장려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쇠로 만든 철화만 쓰기로 하는데 그러면 타국인들이
스파르타와 교역하기를 꺼리게 되니 검소하고 성실하며 강건한 생활을 선호하는
스파르타에 화려하거나 귀금속 그리고 사치품의 유입을 막이 위함으로 보이며
소박한 것들은 외국과 교역하지 않더래도 자체 생산으로 충당할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농업에 종사하는 헬로트는 수확무르이 절반만 스파르타인 주인에게 주니 그리 유복한 편은 아닌데
철화를 쓰면 저축할 마음도 사라지고 생활수준이 낮지만 똑 같이 낮으니 서로 질투할
마음도 생기지 않고 부유한 자가 없으니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에 계급투쟁이 일어날
염려도 없으며 권력투쟁이 빈번했던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오래 안정이 유지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까지 알려진 그리스 정예부대는 곧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군단을 의미했으니 철학도
과학도 문학과 건축에 조각등 예술이라고는 남기지 못한 스파르타는 군사력만은 제일
이었는데 가상적국 아테네가 융성해지자 불안한 마음에 타국 침략을 시작해 기원전
6세기 말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러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 군사동맹에 참여하는 조건으로는 공물을 바칠 필요는 없고 대신에 스파르타가 전쟁을 할 때
병력을 제공하고 또 민주정치가 아니라 귀족정치를 채택하라는 것인데 그리스에는 폴리스가
150개나 있었지만 기원전 500년경 무렵에는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두 도시만이 두각을 나타냈지만 페르시아가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지라 충돌은 미루게 됩니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가 2만 5천으로 침공해 에우보이아를 파괴했으나 1만 아테네군
은 마라톤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했고 10년 후인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
는 30만 대군과 1천척 함대로 그리스를 침공해 아테네를 점령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해 철수하니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을 만들어 전 그리스의 패권국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