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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의 모범을 보여준 윤형중 이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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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삶은 순리에 따르는 삶일 것이다. 수확의 계절에 소득을 취하지 않는다면 찬 서리 내리고 추운 계절에 빈한한 삶을 맞이한다.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린 자가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 또한 순리일 것이다. 열정으로 꿈을 키우고 성실로 결과를 기대하는 지극히 순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윤형중 군포사랑장학회이사장. 그는 “삿된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지나친 집착이 편협을 가져온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관조하며 평정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순리적인 삶이다”라고 말한다. 어른으로부터 성실을 배우다. 역사의 숨결이 계룡산을 휘도는 충남 공주는 그의 고향이다. 그는 전통적인 명문사대가의 4남매중 위로 누나 둘을 두고 맏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교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은 고을주민이 조부님의 땅을 밟지 않고는 들이고 산이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토지가 많은 대부호였다. 고매한 인품으로 마을에서 존경받는 집안의 어르신들을 보며 그는 예의범절을 배웠고, 집안의 많은 식솔들 각자가 맡은 일에 성심을 다 하는 것을 보며 성장했다. 또한 그에게는 언제나 바른생활지도와 시중을 드는 전담 고용도우미가 따라다녀 일찍부터 가풍을 익히는 맞춤형교육을 받았다. 그런 가정적 환경이 초등학교 때는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했다. 그는 인성지도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도덕과 윤리가 지켜지는 사회야 말로 아름다운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여겨 그 길목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학업성적도 좋은 모범생이었지만 운동하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특히 수영하기를 좋아했는데 “도련님, 안 됩니다”라는 강력한 행동 제약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나 소질계발과는 거리가 먼 학교생활이었다. 중학교시절 집안 어른께서 변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연대보증 섰다가 잘못되어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되었다. 극한 상황까지 가게 된 집안 사정은 그가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어린 시절 누렸던 풍족함은 이미 꿈에서나 있을 법한 먼 이야기가 돼버렸다. 그는 부친의 친구인 교장선생님이 교육상 자녀에게 시켰던 신문배달을, 자신의 처지를 알고 넘겨주자 신문 배달로 새벽을 열며 학교를 다녔다. 다행히 공부도 잘하고 성실했던 그는 고등학교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학생신분임에도 가계에 부담을 덜어드리는 든든한 아들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체험을 통해 깨달은 바가 많아지자 고등학교에 와서는 장래 희망도 바뀌었다. 지배계급이나 피지배계급 등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없어 학교가기 힘든 학생들이 학비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고 마음껏 꿈과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사회활동을 접하다. 세월은 그에게 더 큰 꿈을 꾸게 했고 보다 현실성 있는 야망을 갖게 했다. 공정한 사회, 불의와 정의롭지 못한 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소시민, 황금만능주의에 결탁하여 진실이 가려지는 혼탁한 곳에 정의의 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는 판사가 되고 싶어 전공학부 외에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에게 대학생활은 사회에 많은 관심과 함께 정당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농민운동을 통해 생활 개선과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되지 않는 농촌을 그리며 역동적으로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그는 조직과 리더십을 익히기 위해 RORC 학군단에 들어가 장교후보생으로 대학생활을 했다. 그 당시 ROTC는 장학제도가 있었고 지도력과 단체생활을 규칙적으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장이었다. 그는 공부와 훈련을 병행하면서 항상 상위권의 리더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고 故 김대중 대통령 후보시절 연설장에 갔다가 정보부 망원렌즈에 찍혀 혼쭐이 난적도 있다. 정보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농림부 축산국에 취업을 했다. 젊은 날의 이상과 꿈들은 직장 생활과 함께 요원해지는 듯 했다. 삶이란 자신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로서 집안을 이끌어가고, 가정경제에 책임을 져야하는 개인적인 주관이 오랫동안 직장에 머물게 했다. 그는 축협중앙회와 농협중앙회가 조직통합 된 후 줄곧 직무에 임하다 안산 지점장으로 퇴임을 했다. 삼십대 초반에 결혼과 함께 군포 당동에 생활터전을 잡았던 그는 취미생활로 테니스를 했었다. 워낙 운동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여가선용의 기회는 당연히 테니스를 즐기는 것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시간에 제약을 받아서 협회활동을 못했지만 퇴임 후에는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고, 어린 꿈나무들의 체육활동에 기여하고 싶어 협회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또한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함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자신의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어려운 이웃에 빛이 되고 싶은 충정이었다. 사실 평소 좋은 일일수록 조용히 하고 싶었던 그는 2009년 군포시에서 군포사랑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달라는 권유를 사양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의 인품과 성품을 보고 계속 추대를 하자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이사장직을 맡고 말았다. 이사장을 맡고부터는 장학금 기금조성뿐만 아니라 이사진과 관계자들 간의 우호증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어느 시의 장학회보다 모범적인 장학회로 성장시켜나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장학기금으로 수 천만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사회적 기업으로 육성하다. 그의 군포에서의 생활은 고향과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군포발전이라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동참과 실천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군포시 테니스협회 및 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테니스의 저변확대와 전국에서 군포시테니스를 부러워 할 정도로 육성시켰다. 한 예로 군포시장배 HEAD 전국동호인 테니스 대회는 군포를 알리는 최고의 대회가 되었고, 테니스 회원들에게는 사회인으로서의 역량과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다. 지역에서 20여 년간 친형제처럼 지내는 분들은 그에게 맏형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 존경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군포시를 세계에 알리고 자매도시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구성된 군포시 국제교류협의회의 수석부회장도 그에게는 군포사랑의 한 증표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기업성장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주)조은석재, (주)한튜브, (주)아이토비, (주)서울신문NTN, (주)유리얼미디어, (주)인티그램, 정인그룹 등 여러 회사를 사회중심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가 소속된 단체는 인화가 잘 되어 있다. 겸허한 마음과 타인에 대한 이타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윤 회장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평이다. 특히 그는 사람 만남에 있어 격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만남자체를 좋아하며 상대의 장점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그와 편안한 만남이 되는 것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호방한 웃음도 한 몫 한다. 그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다. 그의 모친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넓으며, 베푸는 것과 남을 즐겁게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자신의 이상향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되고 싶어 노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도 “다 내려놓고 살아라. 집착하지 마라. 다만 거짓말하지 말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이거늘 욕심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면면이 이어가는 유구한 역사 앞에 새 나라의 일꾼들을 위해 늘 양보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른다. 뭇사람들은 살면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세상에 던져진 단 한사람의 존재적 가치를 또 다른 흔적으로 남겨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도 3대가 지나면 기억조차 희미하다. 모두가 흔적에 집착하고 욕심에 기웃거린다면 결국 삶은 집착하는 것에 노예가 될 것이다. 그가 이르는 대로 순리에 따르고 사심이 없는 아름다운 삶을 엮어가기를 기대해 본다. 약력 충남 공주출생 충남대 졸업 ROTC전역 농협중앙회 정년퇴임 군포시테니스연합회 및 협회 회장 군포시 국제교류협의회 수석부회장 (주)조은석재 회장 (주)한튜브 회장 (주)아이토비 회장 (주)서울신문NTN 회장 (주)유리얼미디어 회장 (주)인티그램 회장 군포시 사랑장학회 이사장 |
첫댓글 멋있다. 윤회장! 우리축자회에도 이런 걸출한 인물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