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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como dijeran algunos acerca del Templo que estaba adornado de bellas piedras y ofrendas votivas, Jesús dijo: «Esto que veis, llegarán días en que no quedará piedra sobre piedra que no sea derruida».
Le preguntaron: «Maestro, ¿cuándo sucederá eso? Y ¿cuál será la señal de que todas estas cosas están para ocurrir?». Él dijo: «Estad alerta, no os dejéis engañar. Porque vendrán muchos usurpando mi nombre y diciendo: ‘Yo soy’ y ‘el tiempo está cerca’. No les sigáis. Cuando oigáis hablar de guerras y revoluciones, no os aterréis; porque es necesario que sucedan primero estas cosas, pero el fin no es inmediato». Entonces les dijo: «Se levantará nación contra nación y reino contra reino. Habrá grandes terremotos, peste y hambre en diversos lugares, habrá cosas espantosas, y grandes señales del cielo».
«No quedará piedra sobre piedra»
+ Rev. D. Antoni ORIOL i Tataret
(Vic, Barcelona, España)
Hoy escuchamos asombrados la severa advertencia del Señor: «Esto que veis, llegarán días en que no quedará piedra sobre piedra que no sea derruida» (Lc 21,6). Estas palabras de Jesús se sitúan en las antípodas de una así denominada “cultura del progreso indefinido de la humanidad” o, si se prefiere, de unos cuantos cabecillas tecnocientíficos y políticomilitares de la especie humana, en imparable evolución.
¿Desde dónde? ¿Hasta dónde? Esto nadie lo sabe ni lo puede saber, a excepción, en último término, de una supuesta materia eterna que niega a Dios usurpándole los atributos. ¡Cómo intentan hacernos comulgar con ruedas de molino los que rechazan comulgar con la finitud y precariedad que son propias de la condición humana!
Nosotros, discípulos del Hijo de Dios hecho hombre, de Jesús, escuchamos sus palabras y, haciéndolas muy nuestras, las meditamos. He aquí que nos dice: «Estad alerta, no os dejéis engañar» (Lc 21,8). Nos lo dice Aquel que ha venido a dar testimonio de la verdad, afirmando que aquellos que son de la verdad escuchan su voz.
Y he aquí también que nos asevera: «El fin no es inmediato» (Lc 21,9). Lo cual quiere decir, por un lado, que disponemos de un tiempo de salvación y que nos conviene aprovecharlo; y, por otro, que, en cualquier caso, vendrá el fin. Sí, Jesús, vendrá «a juzgar a los vivos y a los muertos», tal como profesamos en el Credo.
Lectores de Contemplar el Evangelio de hoy, queridos hermanos y amigos: unos versículos más adelante del fragmento que ahora comento, Jesús nos estimula y consuela con estas otras palabras que, en su nombre, os repito: «Con vuestra perseverancia salvaréis vuestra vida» (Lc 21,19).
Nosotros, dándole cordial resonancia, con la energía de un himno cristiano de Cataluña, nos exhortamos los unos a los otros: «¡Perseveremos, que con la mano ya tocamos la cima!».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진다는 것은
건물의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다는 뜻입니다.
성전 정화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9,46).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서 제 역할을 잘하고 있었다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로마 군대가 파괴한 것이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느님께서 파괴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때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없애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 라는 뜻입니다.
탐욕, 허례허식, 위선으로 가득 찬 성전은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참된 성전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지상 세계의 성전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의 한시적인 성전일 뿐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 전체가 성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느라고 그렇게 애를 쓴 것도,
또 헤로데가 성전을 복구하는 일에 그렇게 공을 들인 것도 모두,
언젠가는 사라질 유한한 건물 때문에 헛심을 쓴 셈이 됩니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건물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업적을 쌓는 일에만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허무한 바벨탑이 될 뿐입니다.
잠깐 동안 후손들이 기억해 주고 칭송을 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은 전부 다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건축물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들만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성전에서의 제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교가 새로 생겼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내용은 단순히 옛날 일에 대한 회상일 뿐인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고, 예언하신 대로 파괴되었고,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과거에 유대인들이 그랬었다고 비웃는 것으로 그치면 그만인가?
성경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살아계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11월 24일의 복음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무서운 예언이 됩니다.
만일에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파괴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아서
그것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진짜 의로움이 아니라 '위선'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6,1-4).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회개하지 않는다면, 또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교를 만드신 분이니 없애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카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黙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
(BC 721년 북왕조 멸망, BC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BC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BC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카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카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카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첫댓글 아이구 무척 이른 시간에 올리셨네요 ^^ 방금 미사때 들었는데..이런 심오한 뜻이..ㅠㅠ
가능하면 전날 저녁에 올리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