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도회 명칭인 ‘사도들의 모후 마리아’ 축일 기념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떤 얘기를 어떤 식으로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기에, 전에 비슷한 말씀을 드린 게 떠올라서 그 얘기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의사이면서 심리학자로 유명한 아들러(‘열등감’과 ‘우월감’에 대해 이론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상담이론에 많은 영향을 준 심리학자)는 인간관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 ‘협동’을 꼽았습니다. “완전히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또 ‘함께 완성할 수 있는 하나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조화로운 공동체’는 곧 ‘수도공동체’를 연상시키는데,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완성하는 하나의 일’ 즉 공동작업,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거의 비슷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가령 10대 청소년기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 입시라는 ‘같은 목표’를 꿈꾸며 사는가 하면, 청소년기 그 이후에는 또 사회로부터 “이러 이런 게 성공적인 삶”이라는 식의 ‘획일화된 인생 형태’를 강요받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내면의 압박과 자기 착취,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감과 열등감, 유행에 대한 집착 등에 사로잡혀 다 거기서 거기인 거의 비슷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는 부모를 잘 만났고, 조금 더 돈을 잘 벌고, 조금 더 부유하게 산다는 것 정도일 뿐, 우리네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큰 차이 없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서로가 거의 비슷하게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는 보편적 가치(즉 남들 하는대로)에 따르지 않고, 특별하게도 주님의 삶을 따라 사는 수도 생활 같은 것을 유별난 삶이라고 여기던가, 또 내면에 대한 성찰 같은 것들은 그저 쓸모없는 낭비, 이유 없는 몰입, 사회부적응 자의 허영 정도로 취급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남들처럼 사회적 성취를 얻고, 돈을 벌고, 소비를 해야, 그게 정상인 것이지, 내면이나 자아에 몰입하는 것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세상에는 인생 전부를 바쳐 올인을 하거나 몰입을 하거나 확 미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적당히 한쪽 발만 담근 채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머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흠뻑 빠져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따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삶이나, 그 후 역사상 볼 수 있는 많은 추종자들 삶이 그랬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그랬듯이 일부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용기, 그리고 외로워질 가능성도 떠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도자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