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인화가 8년 만에 내놓은 《지옥설계도》는 스토리의 기시감을 깨뜨리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쓰였다. ‘스토리헬퍼’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독자의 예측을 배반하는 전개와 결말을 지향했다. 스토리헬퍼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그가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저작을 도와주는 도구다. 2300여 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분석해 추출한 3만4000여 개의 모티프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만든 것으로, 작가가 원하는 모티프들을 입력하면 전개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보여준다. 작가가 구상한 스토리와, 기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싱크로율도 제시한다. 가령, 영화 〈광해〉와 할리우드 영화 〈데이브〉는 75%의 싱크로율을, 〈아바타〉는 〈늑대와 춤을〉과 무려 87%의 싱크로율을 보인다.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인화는 여전히 동안이었다. 인터뷰 전, 스타일리시한 남성이 흰 찻잔에 녹차를 단정히 내왔다. 연구실 옆방 ‘차세대 스토리텔링 특성화 교육사업단’에서 근무 중인 게임개발자라고 했다. 이인화 주도로 개발 중인 웹 게임 ‘인페르노 나인’은 《지옥설계도》를 모태로 만든 게임으로, 2013년 초에 출시할 예정이다. 미국에서 퍼블리싱하는 이 게임의 수익금은 전액 필리핀 결식아동들에게 기부된다.
《하비로》 이후 8년 만에 장편소설을 냈습니다. 왜 휴지기가 길었나요?
디지털미디어학부를 만드느라 바빴어요.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어서 연구과제도 많았고요. 기업체 과제, 정부 과제가 몰렸습니다. 소설 쓸 시간이 없었어요. 낮에는 연구과제, 밤에는 게임하느라 바빴습니다. 연구년을 못 받았으면 이 소설도 못 썼을 겁니다.
소설가로 돌아온 절박한 이유가 있습니까?
‘바츠 해방 전쟁’ 게임을 하면서 느낀 감동을 소설로 옮겨보고 싶었어요. 뜻을 함께하는 인간의 집합지능은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더듬이를 맞댄 민중의 힘, 인간 본연의 선함과 자기희생을 써보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소설을 쓸 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썼는데, 이번에는 글이 수돗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가슴에서 폭풍 같은 감정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간 ‘게임 폐인’으로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4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게임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고, 정신과 전문의 아내한테 게임중독 치료를 받으셨다고요?
우리나라는 알코올중독 세계 3위입니다. 그전에는 본드중독, 부탄중독이 많았고, 지금은 약물중독이 심하죠. 중독의 정신적인 기저는 같아요.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한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도파민을 분비해 쾌락중추를 자극하려 합니다. 게임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소극적으로.
쉰을 바라보는 교수님이 게임의 순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흔치 않습니다. 게임중독 아이를 둔 부모 입장은 생각해봤겠지요?
인간은 지적호기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그만둡니다. 일정 점수에 도달한 후에는 흥미가 사라지거든요. 저도 요즘엔 게임을 하루 세 시간만 합니다. 예전처럼 게임이 재미있지 않아요. 소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자비를 들여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던 집을 하나 팔았어요. 집을 비싸게 팔았는데, 이 책(《지옥설계도》)를 한 권 판 것보다 기쁨이 작았어요. 저는 어쩔 수 없는 소설가인가 봅니다. 허허허.
게임 기반 소설입니다. 기존의 소설 소비방식과 어떻게 다른가요?
게임의 소비방식은 데이터베이스 소비입니다. 한 콘텐츠를 몇 시간 동안 소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게임 안에 있는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사용자들이 취사선택 후 재구성해서 소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1970년대에 〈기동전사 건담〉이 나오면서 예고된 일입니다. 애니메이션 드라마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봇 계보를 만들고 팬픽(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소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쓰는 소설)을 쓰는 식이죠.
《지옥설계도》의 현실 이야기는 술술 읽히는데, 게임세계의 이야기는 좀 어렵더군요. 서사구조가 기존에 봐오던 타입과 달라서 생경했습니다.
강남 교보문고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남자 고등학생이 많이 산대요. 기존의 《영원한 제국》 독자는 이미 나이가 들었죠. 본인들이 읽을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스토리헬퍼를 거친 후 애초의 이야기에서 얼마나 수정됐나요?
인간은 이야기로 기억을 저장하는데, 기억은 형태와 패턴이 있어요. 관습적이고 상투적이라는 거죠. 머릿속에서 구상한 소설을 스토리헬퍼에 넣어 보면 기존의 작품들과 80% 이상 일치합니다. 고쳐야죠. 싱크로율이 55%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바꾸고 변형합니다. 55% 이하로는 내려가기 참 힘들어요.
소설 집필 과정에서 스토리헬퍼에 상당 부분 기대는 거군요. 그렇다면 소설가 고유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문단문학에는 캐릭터와 사건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다루는 소설가가 살아 있겠지요. 제가 추구하는 문학은 문단문학이 아니에요. 마쓰모토 세이초나 시바 료타료처럼 이야기성이 강한 문학입니다. 저는 소설가보다 이야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소설가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고백하고 독자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면서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꾼은 보편성에서 독자의 개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즉 완결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인생에 대해 조언해주는 존재죠.
이화여대에 디지털 스토리학과를 개설하고 스토리텔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왔지요. 이 시대에 읽히는 소설에 대해 고민이 깊었던 걸로 압니다. 소설의 미래를 어떻게 봅니까?
컴퓨터 시대로 들어오면서 소설이 굉장히 위축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설과 똑같은 휴대성을 지닌 모바일 시대에는 소설이 새롭게 부활할 것 같아요. 모바일 시대에 맞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의 니즈는 높은데, 그에 부합하는 콘텐츠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바일로 소설을 읽고, 소설을 좋아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발전할 것입니다. 이때의 소설은 단순히 한 작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설계도》의 경우 소설 속 세계가 1%라면 인페르노에 대한 이야기, 공생당에 대한 업데이트된 이야기, 인페르노 게임에 대한 동영상 등이 각각 독자적으로 무한 소비될 수 있겠지요.
그동안 쓴 소설에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주인공이 죽으면서 유토피아가 그저 유토피아로 남는 허무주의 색채가 강한 소설이 많습니다. 《영원한 제국》이나 《시인의 별》이 대표적이죠. 《지옥설계도》 역시 공생당을 조직해 희망 없는 미래를 바꿔보려 앞장섰던 이유진이 죽고요.
이번 결말은 허무주의적이지 않아요. 유토피아를 꿈꾸는 주인공이 죽음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 유토피아를 꿈꾸는 더 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잖아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합니다.
이 시대는 선한 감성을 가진 다수의 사람이 지혜를 나누는 시대입니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만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16억 명이 돼야 합니다. 미국도 일자리가 없어서 해외로 취업하는 시대예요. 글로벌 디아스포라가 모든 나라에서 진행 중입니다. 한국에 일자리가 없으면 칠레나 남아프리카에 가서 찾아보세요. 칠레 어장이 엄청난 호황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어묵을 먹지 않아 웬만한 잡어를 다 버리더군요. 칠레에 가서 어묵을 만들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도 우리는 행성 단위로 살고 있고, 지구 전체가 우리가 사는 터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