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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시와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 1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하나인 듯 여럿인 듯 매미 울음이 지축을 뒤흔드는 절집 마당. 참새는 내려앉다 말고 허공 속으로 이내 사라진다. 때아닌 법고가 울린다. 개울물이 저리 맑다. 등뒤로 푸 른나 무푸 른하 늘이 예 그대로인 것을 그(대로)가 일러 준다. 꽃담이 붉다.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 존자의 하늘, 구름이 희다.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운문(雲門)을 나서니 운문(韻文)이 되는 것.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김상환,「雲門」전문
1. 만해 한용운과『님의 침묵』
1.1. 한용운 약전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 본관은 청주. 자는 貞玉, 속명은 裕天. 계명은 奉玩. 법명은 龍雲. 법호는 萬海/ 卍海. 1887년(9세)『西廂記』를 독파하고『통감』의 文義를 해득했으며,『書經』朞三百註를 통달하다. 1892년(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貞淑)와 결혼하다. 1896-1897년(18-19세) 塾師가 되어 童蒙들을 가르치다. 의병에 참가하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관고를 습격하여 1천냥을 탈취하다. 의병의 실패로 몸을 피해 고향을 떠나다. 1899년(22세)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는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되돌아와 다시 전전하다. 1904-1905년(26-27세) 고향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다시 백담사로 가서 승려가 되다. 金蓮谷師에게 득도하여 全泳濟師에 의해 계를 받다. 李鶴庵師에게「기신론」,「능엄경」,「원각경」을 수료하다. 1907년(29세) 건봉사에서 首先安居(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다. 1908년(30세) 유점사에서 徐月華師에게「화엄경」을 수학하다. 일본 동경, 경도 등지를 순유하며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다. 동경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다. 서울로 돌아와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여 소장에 취임하다. 1914년(36세)『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다.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다. 1915년(37세) 영호남 사찰들(내장사․화엄사․해인사․통도사․송광사․범어사․쌍계사․백양사․선암사)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어 열변을 토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키다. 1917년(38세)『정선강의 채근담』을 동양서원에서 발행하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疑情頓釋(의심스러운 생각들이 환하게 풀림)이 되어 진리를 깨치다. 1918년(40세) 월간 문예지『惟心』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다. 여기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惟心』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지목된다.「조선독립의 서」가『독립신문』에「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제목으로 발표되다. 1925년(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다. 8월 29일『님의 침묵』전편을 탈고하다. 1926년(48세) 5월 20일 시집『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다. 1933년(55세) 유씨(숙원)와 재혼하다. 뜻 있는 인사들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북향의「尋牛莊」을 짓다. 1934년(56세) 딸 영숙 태어나다. 1939년(61세) 회갑을 맞아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다솔사에서 몇몇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연에 참석하여 기념식수를 하다. 1944년(67세) 6월 29일 신경통으로「尋牛莊」에서 입적하다.
1.2.『님의 침묵』의 세계와 현(담)
만해의 시, 특히 ≪님의 침묵≫의 세계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런 만큼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등의 부정적 서술어가 상당수에 달해 있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 인식은 그가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과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인 것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부정의 의미는 근원적인 긍정의 빛 속에서만 밝혀질 수 있다. 문제는 긍정의 필연성과 부정의 필연성을 매개하는 내재적 상호 침투다. ≪님의 침묵≫의 세계는 성속(聖俗)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는다”는 형이상적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기저에는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깔려 있다. 이는 토속적인 방언과 더불어 기층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세속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적인 면은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목소리만 높여 민중을 애써 강조하지도 않는다. 특히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는 만큼, 시적 분위기가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 주체는 물론, 여성 운(韻)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여성 중심주의는 외부 사상(불교의 관음사상, 인도의 여성사상)에도 기인하지만, 한국 시가의 전통에 기대어 있다는 것이 주효하다. 고려 가요와 함께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모두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라는 사실은 익히 아는 바다. 만해 시의 특징은 자유와 평등,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집약되는 근대적/불교적 세계관과 긴밀하게 통한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에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 편의 연작시다.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의 시에는 밝음과 어둠, 죽음과 삶, 세속과 열반이 서로 통하여 작용하고 있다. 양자를 결합하면서도 이기적인 세속을 거부하고 형식적인 열반을 부정하며, 한국시의 형이상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고 있다. 역사와 현실 상황에 치열하게 맞서 있으면서도, 물러나 이를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은 분명 그의 시가 구축한 새로운 영토다. 그 새로움(novelty)과 깊이의 시학은, 다름아닌 현(玄)과 현담(玄談)에 있다.
2.「십현담주해」의 개요와 序
2.1. 1475년(성종 6) 김시습(金時習)이 중국 당나라 동안 상찰(同安常察) 스님(872-961)이 지은「십현담」의 요지를 해석한 책. 1권 1책. 목판본. 폭천산(瀑泉山)에서 저술하였으며, 1509년(중종 4) 전라남도 순천 대광사(大光寺) 간행본이 전한다.「십현담」은 열가지 선종의 용어인 심인(心印)·조의(祖意)·현기(玄機)·진이(塵異)·연교(演敎)·달본(達本)·환원(還源)·전위(轉位)·회기(廻機)·일색(一色)에 대하여 각각 칠언팔구의 게송을 쓴 것인데, 이에 대하여 중국의 문익(文益)이 주를 붙였고, 김시습이 요해한 것이다. 서문에 의하면「십현담」은 불조(佛祖)의 현관(玄關)이어서 뛰어난 대장부가 아니면 그 관문 속을 엿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본문을 요해함에 있어 각각의 제목에 대하여 주석하고, 게송에 대하여 세밀한 해석을 가하고 있다. 책의 끝에는「조주 삼문(趙州三門)」이 첨부되어 있고, 책 끝에 간기와 시주록이 붙어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2.2. 3.1 운동에 불교계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가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22년 감옥에서 나온 한용운은 설악산으로 들어가 오세암에 칩거하면서 1925년 여름 연달아 두 권의 책을 완성한다. 한문체《십현담주해》와 국문체 시집《님의 침묵》이 그것이다. 《십현담주해》가《님의 침묵》보다 두 달 정도 먼저 탈고되었다. 그는《님의 침묵》한 권으로 불후의 시인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십현담주해》의 현묘한 세계와 선적 사유가 놓여 있다. 양자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으로서 설악산 시대의 2부작이라 할 만하다. 《십현담주해》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님의 침묵》에 비해 별로 주목되지도, 널리 읽혀지지도 않았다. 이유인 즉은, 한문체인데다가 중국 고승의《십현담》을 주해한, 텍스트의 난해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선사상의 요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님의 침묵》을 읽고자 한다면《십현담주해》를 먼저 정독할 필요가 있다.《십현담주해》는 선사로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저서로서 그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고비를 이루는 작품이다. 단순한 뜻풀이 수준의 책이 아니라 주해 형식을 빌어 자신의 깨달음과, 정위(正位)와 편위(偏位)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않는 조동선(曹洞禪)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책이다.《십현담주해》는『조선불교유신론』에서『유마경』번역, 소설 창작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유와 글쓰기의 전 과정에서 보면 중간 단계를 이루지만, 그의 생애에서 보면 사유의 가장 심층을 이루는 저술에 속한다. 다음은 서준섭 교수가 번역한《십현담주해》의 서(序)다.
을축년(1925) 내가 오세암에서 여름을 지낼 때 우연히 십현담十玄談을 읽었다. 십현담은 동안 상찰 선사(同安 常察 禪師)가 지은 선화(禪話)이다. 글이 비록 평이하나 뜻이 심오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그 유현(幽玄)한 뜻을 엿보기 어렵다. 원주(原註)가 있지만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다. 열경(悅卿)의 주석도 있는데, 열경은 매월(梅月) 김시습(金時習)의 자(字)이다. 매월이 세상을 피하여 산에 들어가 중옷을 입고 오세암에 머물 때 지은 것이다. 두 주석이 각각 오묘함이 있어 원문의 뜻을 해석하는데 충분하지만, 말 밖의 뜻에 이르러서는 나의 견해와 더러 같고 다른 바가 있었다. 대저, 매월에게는 지키고자 한 것이 있었으나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운림(雲林)에 낙척(落拓)한 몸이 되어, 때로는 원숭이와 같이 때로는 학과 같이 행세하였다. 끝내 당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결백하였으니, 그 뜻은 괴로운 것이었고 그 정(情)은 슬픈 것이었다. 또 매월이 십현담을 주석(註釋)하였던 곳이 오세암이고, 내가 열경의 주석을 읽었던 것도 오세암이다. 수백년 뒤에 선인(先人)을 만나니 감회가 오히려 새롭다. 이에 십현담을 주해(註解)한다.
을축 6월 일 오세암에서, 한용운 씀.
序
乙丑余過夏于五歲 偶閱十玄談 十玄談者 同安常察禪師所著禪話也 文雖平易 意有深奧 初學者卒難窺其幽旨耳 有原註 而未詳其人 幷有悅卿註 悅卿者 梅月金時習之字也 梅月之避世入山 衣緇而住于五歲時 所述也 兩註各有其妙 足以解原文之意 至若言外之旨 往往與愚見 有所同異者存焉 夫以梅月之有所守 而世不相容 落拓雲林 爲猿爲鶴 終不屈於當世 自潔於天下萬世 其志苦 其情悲矣 且梅月註十玄談于五歲 而余之讀悅卿註者 又五歲也 接人於數百年之後 而所感尙新 乃註十玄談
乙丑 六月 日 於五歲庵. 韓龍雲 識.
3. 십현담十玄談의 원문과 국역
3.1. 心印
問君心印作何顔 心印誰人敢授傳
歷劫坦然無異色 呼爲心印早虛言
須知本自虛空性 將喩紅爐火裏蓮
莫以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그대에게 묻노니 심인이란 어찌 생겼는가
심인을 뉘라서 감히 전할 수 있겠는가
긴 세월 한결같이 다른 색깔이 없으니
심인이라고 호칭을 붙이면 벌써 잘못이다.
(심인이란) 본래부터 텅 비고 공한 성품인 줄 반드시 알아야 하니
비유하자면 시뻘건 화로 속에 피어난 연꽃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무심을 도라고도 절대로 말하지 말게
무심하더라도 오히려 한 관문에 가로 막힌다.
3.2. 祖意
祖意如空不是空 靈機爭墮有無功
三贒尙未明斯旨 十聖那能達此宗
透網金鱗猶滯水 廻途石馬出紗籠
殷懃爲說西來意 莫問西來及與東
달마 조사께서 오신 뜻은 공한듯하나 공하지 않고
신령한 기연은 작용이 있고 없고 상관없으니
3현의 지위에 오른 보살도 이 뜻을 밝히지 못했는데
10지의 지위에 오른 성인인들 어찌 이 종지를 통달할 수 있으리오.
투망을 용케 벗어난 금 잉어도 용문폭포를 뛰어넘지 못하지만
길머리를 돌린 돌덩이로 된 말[石馬]은 비단 등롱을 탈출하는구나
은밀하게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말하노니
서쪽에서 오셨는지 동쪽에서 오셨는지를 묻지 마소.
3.3. 玄機
迢迢空劫勿能收 豈爲塵機作繫留
妙體本來無處所 通身何更有蹤由
靈然一句超羣像 逈出三乘不假修
撒手那邊千聖外 廻程堪作火中牛
아득히 긴 시간으로도 거둘 수 없는데
부질없는 기연으로 얽어맬 수 있겠는가
(마음의) 오묘한 바탕은 본래 처소가 없는데
온 몸엔들 어찌 자취를 남기랴.
신령스런 한 마디가 뭇 형상을 초월하고
3승을 훌쩍 벗어나니 닦을 것도 없네
두 손을 뿌리치고 천 명의 성인 밖에서
길머리를 돌리면 불 속의 소를 만들 수 있다.
3.4. 塵異
濁者自濁淸者淸 菩提煩惱等空平
誰言卞璧無人鑑 我道驪珠到處晶
萬法泯時全體現 三乘分別强安名
丈夫自有衝天志 莫向如來行處行
탁한 것은 저절로 탁하고 맑은 것은 저절로 맑아
보리와 번뇌는 모두 공하고 평등하다
누가 변화의 옥을 알아볼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가
나는 말하리라, 검은 용의 여의주는 곳곳에서 빛난다고.
온갖 법이 사라질 때에 (한 마음의) 온전한 바탕이 드러나고
3승으로 분별한 것은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네
대장부란 본래 충천의 기상이 있으니
여래께서 가신 길이라도 절대로 가지 마시오.
3.5. 佛敎 (演敎)
三乘次第演金言 三世如來亦共宣
初說有空人盡執 後非空有衆皆捐
龍宮滿藏醫方義 鶴樹終談理未玄
眞淨界中纔一念 閻浮早已八千年
3승의 차례로 불법을 연설하시니
3세의 여래께서도 역시 그렇게 설하셨네
처음에 ‘유’와 ‘공’을 설하시니 모든 사람이 다 집착하더니
나중에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라 하시니 중들이 모두 반연하네.
용궁 속에 가득한 경전들은 모두 의사의 처방전 같은 것이지만
사라쌍수에 이르러 ‘마지막 말씀’ 하셨지만 진리는 드러내지 못하셨네
진실하고 청정한 세계에서 잠깐 한 생각을 일으켜도
사바세계에서는 벌써 팔천 년이 지나가네.
3.6. 還鄕曲 (達本)
勿於中路事空王 策杖還須達本鄕
雲水隔時君莫住 雪山深處我非忙
堪嗟去日顔如玉 却嘆廻時鬢似霜
撒手到家人不識 更無一物獻尊堂
수행의 과정에서 부처를 섬기지 말고
지팡이를 재촉하여 제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구름과 물에 막히는 시절인연에도 그대여 머물지 말고
설산의 깊은 골짜기에서도 나는 허둥대지 않으리.
아! 집 떠나던 때는 옥 같던 내 얼굴이
돌아올 때에는 도리어 귀 밑 머리 희어짐을 탄식하네
손 뿌리치고 제 집에 이르렀건만 아는 이 아무도 없고
어머님께 바칠 물건 하나도 없네.
3.7. 破還鄕曲 (還源/破還鄕)
返本還源事已差 本來無住不名家
萬年松徑雪深覆 一帶峰巒雲更遮
賓主穆時純是妄 君臣合處正中邪
還鄕曲調如何唱 明月堂前枯樹花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일 이미 틀렸고
본래 머물 것도 없으니 제 집이라고 할 수도 없네
만 년 묶은 소나무 길 위에는 휜 눈이 덮이고
한 줄기의 높은 봉우리마다 흰 구름이 걸렸구나.
손님[賓]과 주인[主]이 화목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하고
임금[君]과 신하[臣]가 합하는 자리는 바른 가운데 삿됨이다
고향 돌아가는 곡조를 어떻게 부를까?
명월당 앞뜰에는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네.
**손님[賓]과 주인[主]: 손님[賓]은 방문자 또는 질문을 하는 학인을 지칭하고, 주인[主]은 주인 또는 대답을 하는 스승을 지칭한다. 조동종 계통에서 선문답을 분류할 경우에 사용하는 일종의 선판(禪判)이다. 손님[賓]과 주인[主]에는 4종류가 있다고 한다.
**임금[君]과 신하[臣]: 선문답을 임금[君]과 신하[臣]의 두 축을 설정하여 그 관계 양 상을 분류한 것인데, 이것을 군신오위(君臣五位)라고 한다. 이것은 조산 본적 선사가 제창한 것으로, 그의 스승 동산 양개 화상이 분류한 정편오위(正編五位)의 취지와 일치한다.
3.8. 廻機 (轉位)
涅槃城裏尙猶危 陌路相逢沒了期
權掛垢衣云是佛 卻裝珍御復名誰
木人夜半穿靴去 石女天明戴帽歸
萬古碧潭空界月 再三撈漉始應知
열반의 성 속도 오히려 위태롭고
길 위에서 상봉해도 깨칠 기약이 없네
방편으로 때 묻은 옷을 걸친 이를 부처라 한다면
진귀한 곤룡포를 입은 분은 누구라 할꼬?
나무 사람은 한 밤 중에 신을 신고 떠났는데
돌 여자는 동틀 무렵 모자 쓰고 돌아오네
오래된 푸른 연못에 비친 하늘의 달을
자꾸 자꾸 건져본들 그저 부질없음만 알뿐이다.
**몸에 털 뒤집어쓰고 뿔 달다(被毛戴角) : 짐승으로 환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 구제를 위하여 다른 부류의 생명체로 몸을 바꾸어 실천 수행하는 보살행을 뜻한다.
3.9. 轉位歸 (廻機)
被毛戴角入鄽來 優鉢羅花火裏開
煩惱海中爲雨露 無明山上作雲雷
鑊湯爐炭吹敎滅 釰樹刀山喝使摧
金鏁玄關留不住 行於異路且輪廻
번뇌의 바다 속에서는 비와 이슬 되어 (중생을) 적셔주고
무명의 산속에서 구름 되고 천둥 치네.
화탕 노탕 지옥 불어서 쳐부수고
검수도산도 소리 질러 꺾어버리네
번뇌의 쇠사슬과 꽉 막힌 관문도 남겨두지 말고
짐승으로 다니면서 또 다시 윤회에 뛰어든다.
3.10. 一色
枯木巖前差路多 行人到此盡蹉跎
鷺鸞立雪非同色 明月蘆花不似他
了了了時無所了 玄玄玄處亦須呵
殷懃爲唱玄中曲 空裏蟾光撮得麽
마른 나무 차가운 바위 앞에는 갈림길이 많고
가는 사람마다 여기에서 죄다 자빠지네
흰 색 해오라기가 흰 눈 위에 섰다고 같은 색깔이 아니고
밝은 달과 갈대꽃은 색깔이 갖지 않다네.
분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도 깨달을 것이 없고
현묘하고 현묘한 자리라도 그 역시 칭찬할 것이 못 되네
은근히 그대를 위하여 현묘한 노래를 부르노니
허공 속의 달빛을 잡을 수가 있겠는가?
[참고문헌]
김광원,『님의 침묵과 禪의 세계』, 새문사, 2008.
김인환,『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 열림원, 2003.
서준섭,「한용운의《십현담 주해》읽기」,『한국현대문학연구』제13집. 2003.6.
신규탁,「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에 나타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선사상」,『禪文化硏究』제16집, 2014.
안병직 편,『韓龍雲』, 한길사, 1988(제6판).
기타
【계속】
(다음 주 강의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