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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993년, 말년에 ‘염불왕생’ 발원하여 극락 간 해인사 자운 대율사
陜川 海印寺 慈雲堂 盛祐大律師碑文(1911~1992)
(『慈雲大律師風振作一次報告書』 으로 함)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面 海印寺 一柱門 前
佛紀 二五四一年 丁丑 (1997) 세움
智冠, 『韓國高僧碑文總集』 - 조선조·근대편, 1290쪽
붇다의 마음 등불을 재해 계율을 널리 편 자운 대율사 원명사리탑 비문
(傳佛心燈 弘戒律 慈雲大律師 圓明舍利塔碑銘)
불교 가르침 계 · 정 · 혜 3가지 가르침에서 선禪은 본바탕이고, 경經 · 율律 · 논 論 3장은 가르침의 뿌리다. 그러므로 계를 지키지 않으면 선정에 들어갈 수 없고, 선정을 닦지 않고는 지혜가 드러날 수 없다. 『비구본계』 머리말에 “내 이제 비니법毗尼法을 연설함은 정법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함이다. 비니毗尼(律, vinaya)란 불법의 수명이니 선은 붇다의 마음이요, 교敎는 붇다의 말씀이며, 율律은 붇다의 움직임이라 하였으니 마음 · 말씀 · 움직임이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선과 교만 있고 계율이 없다면 승가에 일정한 높낮이(分限)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이 무거우면 법이 무겁고, 중이 가벼우면 법이 가벼우며, 법이 가벼우면 붇다도 가볍다고 하였다. 세존께서 열반에 즈음하여 마지막 가르치시길 ‘내가 열반한 뒤는 계율을 스승 삼아 수행하라’고 당부하셨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 온 지 어느덧 1,630년에 이르는 동안 계율을 전공한 스님은 신라시대에는 자장과 진표 두 대율사이며, 백제에는 겸익 율사이고, 고리(高麗) 조에는 뚜렷이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배불 정책으로 불교가 위축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인조와 순조 두 임금을 앞뒤로 금담錦潭과 대은大隱이란 두 대율사가 나왔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 전통 불교를 말살하려는 흉책으로 계율을 무시하고 ‘결혼하고 고기 먹도록(帶妻肉食)’ 하여 계 지키는 것마저 흐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오랜 역사를 열어 보여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는 붇다의 마지막 가르침을 받들어 근본적인 불교 중흥을 몸소 실천하신 한국불교의 탁월한 정신적 지주인 대율사가 계셨으니 자운慈雲 율사가 바로 그분이시다.
불교가 이은 법맥은 샤꺄(釋迦)의 76대, 달마의 49대, 혜능의 42대, 임제의 37대, 태고의 18대인 환성喚醒 후손인 용성당 진종震鍾 대종사[용성 스님은 68대 금계 원우錦溪元宇, 69대 청파 혜원靑坡慧苑, 70대인 백인 태영百忍泰榮, 71대 완진 대안 翫真大安, 72대 침허 처화枕虛處華, 73대 초우 영선草愚永瑄, 74대 남호 행준南湖幸準, 75대 용성 진종龍城震鍾이지만 위의 7대를 뛰어넘어 환성 지안喚醒志安의 법을 멀리 이어받았다고 하였으니 멀리 이어받은 것으로 따지면 용성 스님은 68대가 된다]의 법을 받은 제자로서 속성은 김씨요 본관은 경주이며, 법명은 성우盛祐, 호는 자운 慈雲, 자호自號는 청량 사문淸凉沙門이며 탑이름은 원명圓明이시다.
율사께서는 1911년 음력 3월 3일 유酉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路東里 41번지에서 아버님 김자옥金玆玉 공과 어머님 인동 장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동의 양반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노자 · 장자에 정통하여 (소동파의) 금시琴詩를 좋아하였다. 어머님 장씨 부인은 법복 입은 거룩한 스님이 오른손에 고리 6개 잘린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는 다섯 빛깔이 눈부신 구슬 2개가 담긴 유리 항아리를 주면서 이것은 문수보살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소중히 잘 간직하라는 어느 날 밤의 태몽이 있은 뒤부터 고기와 매운 남새 등은 먹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붇다에게 기도하였으며, 많은 불사에 동참하여 공덕을 닦았다.
율사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거룩한 자태를 지녔으니 얼굴은 마치 둥근 달 같고 입술은 붉은 연꽃 색이며, 이는 흰 연꽃 색, 눈동자는 햇빛에도 어지럽지 아니하였으며, 고요히 앉아 있는 자태는 마치 큰 연꽃이 활짝 핀 것 같았다.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세 살 때인 어느 날 어머니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빨리 집 밖으로 나가자고 보채기에 마지못한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불이 나서 집이 모두 타 버리자 모두 영명한 예견에 경탄하였다. 어려서부터 의젓한 모습을 보였으니, 사람을 만나면 합장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를 하며, 흙으로 불단을 만들고 돌로 불상과 탑을 쌓아 풀잎을 태워 향불을 삼고 꽃과 열매를 따서 이바지하였음, 메마른 못에 물을 넣어 죽어 가는 물고기를 살리는가 하면 아버님이 낚시하는 곳에 따라가면 산 고기는 모두 물에 놓아 주어 꾸짖음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니 참으로 개미 구하는 사미가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님 장씨 부인은 좋은 부인으로서는 (동한 시대) 양홍梁鴻 처와 같고, 어진 부인으로서 (한나라 열녀전에 나오는 초나라) 노래老來의 부인과 같았으며, 다짐하고 바라는 것은 (지장보살의 전신인) 광목여인光目女人과 같고, 고운 모습은 묘덕妙德과 다름이 없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머리를 잘라 어머니로서 정성을 다했고 베틀의 실을 끊어 이들의 학업을 채찍질하였다.
이러한 어진 어머니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율사께서는 7살부터 태어나 이곳 진부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비롯하여 4서 3경 같은 유학 책을 공부하였다. 어느 날 오대산에서 탁발 나온 양혜운梁慧雲 스님을 보고 무한한 환희심을 일으켜 공손히 절을 하였다. 이때 스님은 대컨 사람이란 단정한 몸과 마음이 성인이 되는 바탕이 되나니 너는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아이이므로 부처님을 의지하여 바르게 살아 중생에 넉넉한 도움을 주는 큰 사람이 되라면서 8가지 괴로움을 없애는 길(八正道) 법문을 일러 주었다. 15살 때 기도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예운당 경윤敬允 스님을 다시 만나 100년 3만 6천일이 승가의 한나절에도 못 미친다는 순치順治 황제의 출가 시를 들었다. 이때부터 점점 세상의 이런저런 일이 싫어졌고 인간 생활의 보편적 개념만 설명한 유교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927년 1월 18일 다시 상원사로 혜운 스님을 찾아가니 스님은 합천 해인사로 떠나고 없었다.
율사께서는 그 길로 부모의 허락도 없이 해인사로 달려가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팔만대장경각에서 1만 배를 올리었으니 마침내 혜운 스님을 은사 남천당南泉堂 광언光彦 화상을 계사戒師로 하여 2월 8일 대적광전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은사 스님을 시봉하면서 3장 연구에 몰두하여 1932년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 1934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권일봉權一鳳 율사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같은 해 7월 15일 해인사 선원에서 첫 안거를 이룬 뒤 1935년부터 울진 불영사에서 눕지 않고 안장서(長坐不臥) 6년 결사를 원만히 회향하였다. 1938년 도봉산 망월사 용성 대종사를 찾아뵙고 서래밀지西來密旨를 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靑山常運步 (청산상운보) 푸른 산 늘 돌고 움직이는데
白雲永不動 (백운영부동) 흰 구름 영원히 꿈쩍 않고,
人踏水低過 (인답수저과) 사람은 강바닥을 걸어 지나가는데
水不着衣裳 (수불착의상) 물은 옷을 입지 않았구나.
용성 종사는 이를 듣고 그 경지를 인증하여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허락하고 “뜰 앞에 심은 나무가(庭前植樹子) 뚜렷이 숲을 덮었도다(儼然冠山木) 몸에 감청색 두르고(身帶紺靑色) 이파리 수미산을 덮었다(葉覆須彌山)”라는 전법계와 의발 衣鉢을 전해주었다.
율사께서는 당시 일제 식민 수탈로부터 조국 해방과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중흥시키려는 큰바람을 세우고 1939년 4월 15일부터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하루 20시간씩 100일 문수 기도를 봉행하던 중 99일 만에 문수보살이 푸른 사자를 타고 앞에 나타나 “착하다 성우여, 반드시 이 나라 불교의 승강僧綱을 되살리도록 정진하라” 하시고 계척戒尺을 전해주시면서 “금계禁戒를 굳게 지니면 불밥 다시 흥하리라”라는 감응을 받았다.
율사께서는 그로부터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 머무시면서 당시 희귀한 율장을 구할 수 없어 2년 넘게 삼복 더운 날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실려 있는 5부 율장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베껴 써 율장을 수지하고 이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방대한 율장에 정통하였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가졌으며 그로부터 천화율원 千華律院 감로계단을 설립하고 율문을 강의하는 한편 한문본 「사미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범망경』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같은 25,000권과 한글 번역본 「사미율의」 「사미니율의」 『범망경』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을 3회에 걸쳐 48권을 펴내 유포시켰다. 봉암사를 비롯하여 전국 단일계단에 이르는 1991년까지 전계傳戒한 우바새 우바이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 보살 비구 비구니 같은 수계 제자가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염불念佛 왕생往生을 발원하고 『무량수경』 『정토삼부경』 『십육관경』 『아미타경』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는 글(勸發菩提心文)』 『정토법요淨土法要』 『삼시계념불사三時繫念佛事』 『원오선사 법어圓悟禪師法語』 같은 것들을 운허耘虛 스님 번역으로 펴내 유포한 것도 10만 부에 이른다.
1946년 종사宗師 법계를 받고, 1955년 불교 교단 정화 뒤 첫 대리 해인사 주지, 1956년 재단법인 해인학원 이사장, 같은 해 해인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 1957년 대한불교조계종 경남 종무원장, 1958년 조계종 중앙감찰원장, 1959년 밀양 표충사 주지, 1960년 해인사 주지 재임, 같은 해 5월 8일 스리랑카에서 개최한 세계불교승가연합 창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1967년 동래 범어사 주지, 1970년 해인사 주지 3임, 1974년 인도에서 개최한 세계평화촉진회 한국 대표 참석, 1975년 조계종 규정원장糾正院長, 1976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같은 해 8월 조계종 원로에 추대, 1977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1987년 대종사 법계를 받음, 1979년부터 입적하실 때까지 동국역경원장에 재임하였다. 율사께서는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남을 먼저 챙기고 자기를 챙기는 정신으로 일체 사사로움은 허용하지 아니하였다.
춘추 50이 되신 뒤부터는 날마다 아미따불 10만념, 『아미따경』 48편 읽기, 아미따불 예경 1,080배, 문수예찬 108배, 그리고 저녁마다 몽산시식蒙山施食, 매달 15일에는 방생 같은 실천을 한결같이 하였다.
옷은 계율에 따라 갈아입을 옷 빼놓고는 한 벌도 두지 아니하였고, 잠도 매일 4시간 이상 자지 않았으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때 아니면 먹지 않는 계(非時食戒)를 지켜 오후에는 공양을 들지 않았다.
율사께서는 1971년 3월 3일 화갑을 맞아 새로운 한국불교 중흥 서원을 세우려고 50년 도반인 영암映岩 대종사와 상좌인 지관智冠에게 30일 단식으로 이번 삶을 회향하시겠다는 굳은 결심을 조용히 알려오자 대종사 지관이 극구 만류하여 겨우 뜻을 바꾸도록 한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롭게 깨우쳐 주는 바가 크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권속들이 모여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파벌을 짓는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고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주지 같은 외호직外護職은 사양하라고 하였다. 율사께서는 측근에 대하여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였으나 측근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화함이 마치 봄바람과 같아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가까운 분에게는 엄하고 먼 사람에게 인자한 분이라고 하였다.
율사께서는 총무원을 비롯하여 해인사 같은 절에서 총무를 보면서 크고 작은 종단의 어려운 일을 사심 없이 해결하여 종단 화합에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았다.
율사께서는 해인사가 법보 종찰로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던 중 1960년 5월 8일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승가연합 창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하고 돌아왔다. 이 사리는 인도 불적개발보존위원장이었던 달마파라 대사가 스리랑카의 불타가야 성도 대탑을 복원하고 준공법회 때 개설한 비구계단의 갈마아사리였던 슬리구나실리瑟利拘那悉理 스님이 탑 속에서 사리 2알을 얻어 모시고 있다가 제자인 사타티사 스님에게 전해준 것이다. 율사께서 전해 받은 이 사리 2알을 대장경각에서 3 · 7일 기도 하던 중 문수보살의 지시를 받아 가야산 속 낙화담 서녘 천불동 길상봉 중턱 천연 바위를 깊이 파고 모셔 가야성지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해인사 주지 재임 중 과거 해인대학 설립 당시 무상으로 양도하였던 해인사 소유 임야와 토지를 모두 환수 이전하여 해인사 총림의 기반을 튼튼히 하며, 1960년 해인사 주지를 다시 맡으며 총무 영암映岩 스님과 함께 전임 주지 때 사찰 농지 경작인들이 제소하여 초심에서 패소한 사찰 농지 소송을 인계받아 3년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마지막 승소 판결을 받아 해인사 소유 토지뿐만 아니라 전국 사찰 토지도 모두 완전히 유지되게 하였다.
율사께서는 문도나 뜻있는 젊은 후학들에게 수행과 함께 비전悲田에 속하는 사회복지에도 전력하라고 당부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되 “내가 참된 율사라면 일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였으니 율사라는 호칭을 받기에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율사께서는 해외 불교의 장점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승풍을 진작시키고자 동남아를 비롯하여 남·북방의 각국 불교 상황을 수차에 걸쳐 시찰하고 얻은 결론은 한국불교가 가장 순수하여 자랑스러우니 젊은 후학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계율 정신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격려하였다.
1991년 3월 3일 상좌인 지관智冠에게 “모든 삶 덧업고(諸行無常) 만법 다 공한 것이라(萬法皆空) 온 사람 반드시 가는 것이니(來者必去) 나는 이제 가야겠다(吾將去矣). 이젠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종단의 단일계단 전계사를 그만두어야겠다.”라고 하시고 사직서를 주시면서 총무원에 제출하라 하시고 “내 나이 81(吾年八十一)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네(還鄕時到來) 자성의 집 법계에 두루 미치는데(性宅周法界) 어찌 오가는 자취 있으리오(何有往來跡)”라고 하셨다.
1992년 음력 12월 24일 문도들을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모아 놓고 “나는 이제 앞으로 남은 삶 해 질 무렵(桑楡) 닥쳐오고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마치 갯버들처럼 약해졌으니 서산에 해 떨어질 날 얼마 남지 않았다. 푸른 날감 홍시보다 먼저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봄 서리 아름다운 봄꽃 말리어 죽이는 수도 있거늘 어찌 가을 낙엽이 맑은 시내에 떨어지는 것을 슬프고 아깝다 하겠는가. 윗사람은 어버이같이 여기고 아랫사람은 갓난아이처럼 사랑하여 위아래가 6가지 화합정신(六和精神)으로 화합하고 예의 없는 행동이 없도록 하며 해진 누더기 옷(破納)과 철발綴鉢로 늘 4의정신四依精神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부지런히 정진하고 방일하지 말며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처럼 피하라. 이젠 이승의 업보 인연이 다하였으니 다음 세상은 붇다 모임에서 함께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하셨다.
다음날인 25일 상좌 지관과 손상좌 세민世敏 · 혜총惠聰 등을 불러 앚히고 이달 그믐날에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고 미리 알리셨다. 제자들이 울면서 마음을 바꾸시도록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본래는 섣달 30일로 하였으나 계유년 설날과 음력 초 3일 정초기도 입재 등을 피하여 초 4일에 떠날 것이라고 하셨다. 마침내 4日(1992년 양력 2월 7일) 밤 10시에 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게를 쓰셨다.
眞性圓明本自空 (진성원명본자공)
참 성품 둥글고 밝아 본디 스스로 공하여
光照十方極淸淨 (광조시방극청정)
시방에 비치는 빛 더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하다.
來與淸風逍遙來 (래여청풍소요래)
맑은 바람 따라 오는 길 자유롭게 왔듯
去隨明月自在去 (거수명월자재거)
밝은 달 따라가는 길 거침없이 가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아미따불의 이름을 소리 내 부르면서 조용히 입적하시니 향내 진동하고 미묘 음악이 청아하였으며 염불 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나온 5가지 빛깔의 밝고 환한 빛이 서녘 하늘을 가득 메웠다. 속세 나이 82요, 법랍은 66이다. 밝은 달과 함께 큰 빛을 남기고 가셨으며 맑은 바람과 같이 오심은 중생을 건지기 위한 원력으로 태어난 것을 보여주신 것이니 맑은 바람 밝은 달이 있는 한 스님의 오고 감, 또한 중생계에서 영원히 거침없으시리라. 7일째인 2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장으로 해인사 비봉등飛鳳嶝 서녘 연화蓮華에서 다비하니, 사부대중이 산골짜기를 가득 덮었다.
이틀 뒤 유골을 모으니 다섯 빛깔로 눈부신 사리가 은행만 한 것이 19알, 녹두만 한 것이 1,000알이 넘었으나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라는 율사 스님의 살았을 적 남긴 가르침에 따라 작은 것은 모두 거두지 아니하고 큰 것 19알만 거두어싿. 문도와 인연 있는 제자들이 추모하는 뜻을 모아 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이 청량지淸涼池 자리를 점쳐 율사의 행적비와 함께 사리탑을 세우고 대율사의 법을 지키고 율법을 널리 편 위업과 자취를 기리는 글을 짓는 바이다.
▣ 속세 인연
宿世의 願行따라 나투신 江原平昌
文殊의 常住處로 佛法의 聖地인데
父親은 關東班族 老莊에 精通하고
母親은 光目女로 佛前에 誓願했네
七歲에 童蒙先習 朗朗한 珍富書堂
容貌는 滿月이요 姿態는 依然한데
順治의 百年光陰 僧家의 반낮임을
慧雲堂因緣으로 홀연히 깨달았네
숙세의 원행따라 나투신 강원평창
문수의 상주처로 불법의 성지인데
부친은 관동반족 노장에 정통하고
모친은 광목녀로 불전에 서원했네
칠세에 동몽선습 낭랑한 진부서당
용모는 만월이요 자태는 의연한데
순치의 백년광음 승가의 반낮임을
혜운당인연으로 홀연히 깨달았네
▣ 중이 됨(得度)
大丈夫 뜻을 세워 世緣을 뒤로하고
海印에 出家하여 一六에 削髮得度
三藏은 梵魚에서 栢樹海印聖地
佛影寺六年結社 本性을 터득했네
龍城堂大宗師와 擧揚한 西來密旨
靑山은 運步하고 白雲은 不動일세
侵奪된 祖國山河 짓눌린 우리민족
볼수록 可憐하여 落淚로 옷적시다
▣ 다짐 수행(願行)
내 祖國獨立 위해 이한몸던지리라
五臺山中臺에서 九九日至心發願
獅子탄 文殊菩薩 戒尺을 傳해줬고
弘律로 佛法再興 스님은 感應했네
五部律精通한후 得戒한 大小乘戒
戒定은 禪의根本 經律은 敎의本源
戒律이 基本되어 禪敎一致 된다
▣ 나눔(回向)
宗團을 愛護하여 山門이 바로서고
六和로 宗團運營 敎團이 興했는데
癸酉年正月四日 모여든 門徒에게
간곡한 以戒爲師 山川도 슬피우네
大衆의 痛哭속에 茶毗後 남긴舍利
伽倻山 더욱깊고 紅流洞 다시맑다
眞性은 圓明하여 生滅이 없는자리
淸風이 불어올때 明月이 비춰주네
불기 2539년 을해(1995) 10월 3일
말 안 듣는 문인(不肯門人) 가산 지관伽山智冠 눈물 닦으며(抆淚) 삼가 짓다.
동래 후인 송천松泉 정하건鄭夏建 향 사르며 삼가 쓰다.
<이하 문인 등 명단 줄임>
卍 보정의 꼬리말
엮은이가 제목을 「말년에…」라고 한 것은 스님의 긴 수행 과정에서 마련에 내린 결론이 뚜렷하고 당당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미 초기에 오도송을 읊어 용성 스님의 인가를 받았고, 율사로서도 10만 명이 넘는 수계자가 나왔으며, 종단에서도 총무원장을 지내고 해인사 홍제암에 자운 율사의 영정을 모실 정도로 존경받고 있다. 화두선을 종지로 하고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한 종단에서 “가장 큰 불사는 염불로 정토에 왕생해 성불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소신을 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서방의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하는 것, 이 외에 더 크고 긴요한 불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여기 옮겨 싣는 정토삼부경의 가르침과 그 인연 공덕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왕생정토往生淨土하여 이윽고 대각을 성취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미타불 법문 듣고 무생법인 증득한 뒤에 극락세계 안 떠나고 사바에 와서 방편을 잘 알아 중생 건지고 걸림 없는 지혜로 불사 지으리. 부처님 저의 마음 아시오리니 오는 세상 이 소원 이루어지이다.”
직접 편찬하신 『정토예경淨土禮經』 회향게의 내용 그대로 자운 스님은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관음전에서 정토왕생업을 닦았고, 『정토심요』 『연종보감』 같은 많은 저서를 내어 정토법문을 널리 선양했으며, 서울 보국사와 대동염불회, 부산 감로사, 해인사 홍제암, 대구 만선염불원 등에서 염불결사를 조직해 정토수행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는 갖가지 수행을 한 뒤 아직 깨달은 것이 더 남은 사람은 반드시 극락 가서 아미따붇다의 도움을 받아 끝내는 도를 이룬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슬기로운 결정을 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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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해인사..............
너무나
먼.......
우리
대중들의
해인의
길을
안내하는
종무소
자운
대율사?
정말
오랫만에
기억의
소자가
다시
옛 추억의
강을
건너게 하네요
불법은
만인의 법에
으뜸이지만
9999개의
법 또한 만인의
법에
버금가는
법 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법이 없는
세상이
부처가
구현하는
참으로
참다운
세상이지요
나무아미타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