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향해 웅크리다] 키스가 끊이지 않는 곳-조엔 바에즈와 수정 눈물의 감성(1)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에 소재한 몬터레이 카운티 법원 밖에서는 살리나스시 상인회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겨울 양상추를 자라게 하는 연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법원 안에서는 눈이 멀 것 같은 텔레비전 조명을 받으며 군중들이 불편하게 눈을 깜박였다. 몬터레이 카운티 감리위원회의 회의 날이었고, 196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따스한 오후, 안건은 ‘미스 조엔 바에즈’가 소유한 캐멀 밸리의 작은 학교 비폭력연구소가 “몬터레이 카운티의 평화, 윤리, 또는 복지 일반을 침해하는” 부지 사용을 금하는 몬터레이 카운티의 용도지역 규준에 위반되는지 심사하려는 것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학교 건너편에 거주하는 제럴드 펫커스 부인은 문제를 또 달리 설명했다. “이런 학교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지 궁금하네요.” 펫커스 부인은 논쟁 초입에 이미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왜 나가서 돈을 벌지 않는 거죠.”
펫커스 부인은 당혹감 섞인 결의를 풍기는 통통하고 젊은 주부였고, 딸기 분홍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강단으로 나와 “미스 바에즈의 학교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바람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어디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내가 기억하는 신사분 한 분은 턱수염을 길렀더군요.”
“뭐, 나는 ‘상관’없어요.” 펫커스 부인이 울자 앞줄의 누군가가 킬킬거렸다. “우리 집에 어린애가 셋이 있어요.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데요. 그런데 이제 하다못해…..” 펫커스 부인이 세심하게 말을 잠시 멈췄다. “누가 집 근처를 돌아다니는지까지 걱정해야 하다니요.”
청문회는 오후 2시부터 7시 15분까지 이어졌다. 다섯 시간 십오 분에 걸친 참여빈주주의에서 한쪽에서는 몬터레이 카운티 감리위원회가 우리 조국을 나치 독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쪽에서는 캐멀 벨리에 미스 바에즈와 학생 열다섯 명의 존재로 인해 “버틀리 대학교 스타일” 시위가 발생하고 포트오드 육군기지 훈련병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캐멀 벨리 도로를 활용해 미국 선단이 무력화되고 카운티 전역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거라고 했다. “솔직히 그런 시설 옆에 땅을 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수의사인 펫커스 부인의 남편이 선언했다. 펫커스 박사 부부는, 특히 부인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무엇보다 주말에 미스 바에즈가 와서 머문다는 점이 몹시 불쾌하다고 말했다. 미스 바에즈는 야외에 나와 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사유지를 산책한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1시까지 열지 않아요.” 학교에서 온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는 시끄럽게 굴지도 않지만, 혹시 그렇대도 1시까지는 푹 주무실 수 있는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군요.”
펫커스 부부의 변호인이 벌떡 일어났다. “문제는 펫커스 부부의 수영장이 아주 아름다운데, 주말에도 손님을 초청해 수영장을 쓰기 원한다는 겁니다.”
“식탁 위에 올라가 서 있어야 학교가 보일 텐데요.”
“그런 짓도 할 사람들이죠.” 감리위원들에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한 대목을 낭송하며 미스 바에즈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이미 밝힌 바 있는 젊은 여성이 외쳤다. “첩보용 쌍안경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그럴 리가요.” 펫커스 부인이 울부짖었다. “우리 집 침실 창문 세 군데하고 거실 창문에서 학교가 보인단 말이에요. 그 방향에서 보면 보인다고요.”
미스 바에즈는 앞줄에 꼼짝도 없이 가만 앉아 있었다. 아일랜드식 옷깃과 소맷동이 달린 긴팔 원피스를 입고 무릎에 양손을 포개고 앉아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더 범상치 않은 외모였다. 카메라는 그 얼굴에서 인디언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고 놀랍게 섬세한 골격과 논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완벽한 직설, 꾸밈없는 솔직함을 포착하지 못한다. 훌륭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의 소유자, 옛날이라면 숙녀라고 불렀을 법한 모습이다. “인간 쓰레기.” ‘양차 대전 참전 용사’라고 밝힌 노인이 씩씩거렸다. 똑딱이 나비넥타이를 한 노인은 이런 회합에 단골로 참석했다. “스패니얼 개 같으니라고.” 미스 바에즈의 머리카락 길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지팡이로 톡톡 두드려 미스 바에즈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강단에 못 박힌 눈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스 바에즈는 한참 후에 일어나서 장내가 완벽히 정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반대편은 바짝 긴장한 채로 앉아서 정치나 학교나 턱수염이나 ‘버클리 대학교 스타일’ 시위나 기타 전반적 무질서에 관해 뭐라고 변명을 하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 반박할 태세를 가다듬었다.
“다들 4만에서 5만 달러 상당의 주택과 사유지의 가격하락을 걱정하시는데요.” 미스 바에즈는 마침내 느릿느릿 말했다. 낭랑한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고 감리위원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냥 한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캐멀 밸리에 1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역시 제 사유지를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토지 소유주는 펫커스 박사와 부인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미소 짓고 나서 완벽한 침묵 속에 제자리에 앉았다.
조엔 바에즈는 흥미로운 소녀였다. <보스턴 사람들>을 쓸 즈음의 헨리 제임스라면 관심을 가졌을 법한 소녀 말이다. 바에즈는 복음주의적 중산층의, 잡풀처럼 얼키설키 엮인 관계 속에서 자라났다. 퀘이커교도인 물리학 선생의 딸이었고 두 개신교 목사의 손녀였는데 어머니 쪽은 영국 스코틀랜드 성공회였고 아버지 쪽은 멕시코 감리교회였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미국 전역의 학문 공동체 변두리를 떠돌며 성장했다. 그러나가 캐멀을 발견했으니, 어디 출신도 아닌 셈이다. 고등학교에 갈 때쯤 아버지는 스텐퍼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고, 그래서 팰로앨토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거기서 시어스 로벅 백화점에서 산 키다로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을 독학했고, 손가락으로 성대를 두드려 비브라토를 터득하려 애썼으며, 공급 훈련 때 학교에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대학에 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MIT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런데 조앤 바에즈는 보스턴 대학교에 한 달 다니다가 중퇴했고, 한참 동안 하버드 광장 주변의 커피바를 돌며 노래하고 지냈다. 하버드 광장의 삶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개들은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대마초나 피우고, 뭐 그렇게 멍청한 짓이나 하고 살아요.” 목사의 손녀는 거기서 만난 지인들에 대해 말했다). 다른 삶을 아직 알지 못했다.
1959년 여름, 친구를 따라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갔다. 측면에 “조엔 바에즈”라고 쓴 캐딜락 운구차를 타고 뉴포트에 도착해 1만 3천 명의 관중 앞에서 노래 몇 곡을 불렀고, 그러자 눈앞에 펼쳐졌다. 새로운 삶이. 첫 앨범은 여성 포크 가수로 서 레코드 역사상 초유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1961년 말 뱅가드 음반사에서 두 번째 앨범을 릴리스했고, 총 판매량에서 그녀는 앞선 것은 해리 벨라폰테, 킹스턴 트리오와 위버스의 앨범뿐이었다. 이미 첫 장기 투어를 마쳤고, 두 달 전 매진된 카네기 홀 콘서트를 열었고, 일 년에 몇 달 이상은 일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십만 달러 가치의 콘서트 일정을 거절한 후였다.
조엔 바에즈는 시류에 딱 맞춰 등장했다. 레퍼토리는 차일드 민요(19세기 말 제임스 프랜시스 차일드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민요 305곡을 엮어 편찬한 민요집에 수록된 노래들) 몇 곡밖에 없었고[“조에니(조엔 바에즈의 애칭)는 아직도 ‘메리 해밀턴’(차일드 민요집에 173번으로 수록된 포크 발라드)가지고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밥 딜런이 조바심을 치는 일도 생겼다.], 청아한 소프라노 음색을 갈고닦지도 않았고 소재의 기원을 따지지 않고 “슬픈” 노래면 아무거나 불러서 순수주의자들의 심경을 거스르기도 했다. 그러나 포크의 물결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에 파도를 탔다. 순수주의자들이나 상업적 포크 가수들은 그녀처럼 관중에게 다가갈 능력이 없었다. 관심사가 애초에 돈이 아니었다지만, 그렇다고 음악도 아니었다. 그보다 조엔 바에즈는 자신과 관중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언가에 관심을 두었다. “십만 관중과의 관계가 내게는 가장 쉬워요.” 그녀는 말했다. “한 사람이 제일 어렵죠.”
관중에게 여흥을 제공할 생각은 처음부터, 또 끝까지, 아예 없었다. 그보다는 감동을 주고 감정의유대를 맺기를 원했다. 1963년 말에는 그 감정의 초점을 시위운동에서 찾았다. 그녀는 남부로 들어갔다. ‘깜둥이’ 대학들에서 노래했고 셀마, 몽고메리, 버밍햄, 어디라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되면 찾아가서 함께 했다. 워싱턴 대행진(1963년, 미국 흑인의 인권과 일자리, 자유를 외치며 마틴 루터 킹 2세를 비롯해 시민 30여만 명이 참여했다)를 마치고 링컨 기념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국방 예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계산되는 소득세의 60퍼센트는 납부할 수 없다고 국세청에 통보했다. 시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막상 운동이 모호해지는 순간에는 이상하리만큼 거리를 유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부의 시위들에 진력이 났어요.” 훗날 조엔 바에즈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물급 연예인들이 소형 비행기를 전세 내서 타고 와서, 시내에 언제나 3만 5천 명 이상 모이곤 했죠.”] 앨범을 몇 장 내지도 않았는데, 이미 <타임>표지에서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불과 스물두 살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