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와 낙선재를 사랑했던 헌종(憲宗) 임금
일찍이 아버지 익종(효명세자)을 빼어 닮았다는 평을 들으면서 자라기 시작한 헌종이었지만 그 유년기는 실로 불행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곧 그의 아버지 익종이 22세의 한창 나이에 아깝게 숨을 거두었는데, 헌종의 나이 겨우 4세때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였던 순조의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한창 자라나야 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 헌종의 슬픔또한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익종의 뒤를 이어 어린 헌종은 할아버지 순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된다. 곧, 다음 보위를 이을 후계에 지명된 것이다. 왕세손으로 책봉되면서 어쩌면 헌종은 '아버지께서 이어야 할 것인데..' 아쉬움과 그리움 섞인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34년, 할아버지인 순조마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어린 헌종으로서는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순조가 세상을 뜬 지 6일 후 8세의 어린 헌종은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 27 임금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이었기에 할머니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고, 헌종은 경연에 나아가 제왕학 수업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함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다.
이때 헌종 사후 지어져 올린 시책에는 헌종을
타고나신 뛰어난 자질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어려서부터 낮에 누우신 적이 없고 밤에도 책을 놓지 않으시며 권강(勸講)·진강(進講)은 한결같이 옛 규례를 따라 행하시고 경연을 조금도 늦추거나 그만 두시지 않았다.
맨 먼저 산림(山林)의 선비를 중용하되 경연(經筵)의 벼슬을 제수하여 그 정초(旌招)를 갖추시고, 대신(大臣)·제신(諸臣) 중에서 성학(聖學)을 진면한 자에게는 반드시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흉금을 비워 들으셨다. 유사(儒士)를 친림하여 과시(課試)하는 일과 낭관(郞官)의 일차 윤대는 정성스러워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세상이 다 도(道)가 있을 것을 기대하였다.
라고 적고 있어 헌종의 성품과 학문을 좋아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 지 살필 수 있다.
16세가 되던 해 헌종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직접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헌종의 치세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연달아 계속되고 있던 서양의 통상 압력이 날로 거세어 졌는데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특정 세력에 의한 집권으로 민중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순조 연간 이래로 계속되고 있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 헌종의 치세에는 우리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되기도 했었다. 그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헌종은 왕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15년 재위에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중희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언가 일을 본격적으로 해 보려던 순간 세상을 떠난 것이다.
흔히 역사에 가정을 붙이는 일을 어리석은 짓이라 하지만 만일 헌종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예 군주를 자처하고자 했던 헌종이 과연 날이 갈 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전해오는 기록 대로 학문을 좋아하고 영특했던 헌종이라니까 아마도 난국을 수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역사와 세월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헌종은 날로 요동치는 조선의 정세를 뒤로 한 채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약관 23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일을 채 해 보기도 전에, 그것도 증조 할아버지 정조에 버금가는 문예 군주를 꿈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헌종의 짧은 일생에 실로 아쉬움이 드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만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헌종과 효현, 효정 두 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경릉
(동구릉내에 있다. 경릉은 삼연릉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한 형식이다)
낙선재 현판 (사진 위) 와 헌종이 자신의 호로 사용했던 보소당 현판 (사진 아래)
이제 비운의 군주 헌종의 생애를 음미해 보며 낙선재를 둘러보기로하자.
낙선재가 처음 지어진 것은 헌종이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1847년 전후의 일로 당시 헌종이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를 한 곳에 마련하고 이름을 각각 수강재 (순원왕후), 낙선재 (헌종), 석복헌 (경빈 김씨) 라 붙였는데, 낙선재(樂善齋)는 착한 일을 즐겨 한다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때 헌종의 처소인 본 건물이 1847년에 처음 지어진 것을 시작으로 순원왕후 (순조 비) 와 경빈 김씨의 처소인 수강재와 석복헌이 그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에 각각 지어짐으로서 낙선재 일곽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헌종은 건물을 지으면서 자신과 경빈 김씨의 처소에는 단청을 일절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단청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영조를 존경하여 평상시에 검소한 생활을 했던 영조를 본받아 자신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자 했던 헌종의 의중이 깊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낙선재를 지으면서도 헌종은 사치스러움을 배격하고 검소함을 강조하고자 무척 노력했던 것 같다. 그의 사후 기록된 행장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했던 말에서도 그 의중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 보기로 한다.
...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았으니 이 집은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고, 색칠한 서까래를 걸치지 않았으니 질박함을 우선으로 한 뜻을 보인 것이다.. 동쪽 벽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빛나고... 잘 꾸며진 서적은 유양의 장서보다도 많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낙선재에서 헌종은 정무를 보살피는 와중에 틈틈이 편안하게 글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한가롭게 머무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그래서 낙선재 주위의 주련이나 편액의 글자체가 범상치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낙선재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 보니 문득 '보소당(寶蘇堂)' 이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보소당이라는 뜻은 송나라의 대문인인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라는 뜻인데,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두터웠던 서예가이자 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의 당호였던 보소재를 본따 지은 이름이라 한다. 살아 생전에 문예 군주를 꿈꾸었던 헌종이 이 보소당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을 만큼 남다른 애착을 보인 것도 어찌보면 우연만은 아닐 것 같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이라고 해야 할까?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익종 (효명세자)이 그러했던 것처럼 헌종 역시 학문과 문예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 낙선재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기를 즐겼다. 헌종이 숨을 거둔뒤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 (뒷날 대왕대비로서 고종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옹립하도록 명을 내린 인물) 도 아들 헌종을 두고
낮 동안과 깊은 밤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옛 사람의 서첩을 몹시 사랑했었다.
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헌종의 문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선비화가이자 추사의 제자로 알려진 소치 허련을 여러 차례 낙선재로 불러 자신의 앞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왕실 소장의 고서화를 감정하도록 한 것이나 추사 김정희를 좋아하여 소치를 부르면 김정희의 글씨를 가져오도록 하고 귀양살이를 하던 김정희의 근황을 묻고 종이를 내려 주었을 만큼의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에서도 잘 두드러 진다.
그런 까닭에 낙선재에는 추사체로 보이는 글씨의 현판이 유독 눈에 잘 들어온다. 보소당이라는 당호가 적힌 현판의 글씨도 그렇거니와, 옹방강의 호가 적혀 있는 낙선재의 주련을 보더라도 헌종이 얼마나 학문과 문예를 끔찍히 아꼈는 지 알 수 있다. 필자가 낙선재의 주련이나 현판이 범상치 않다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낙선재 건물 바로 뒤편으로 단청을 한 육각 지붕의 아담한 정자가 눈에 보인다. 평원루라 불리우는 곳으로 그곳 주변으로 헌종이 즐겨읽던 서책들과 아끼며 감상하던 서화들이 상당수 보관되어 있었다고 전해오던 곳이다. 하지만 주인이 없어서 일까?
주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서화류나 서책들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거나 없어져 버렸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낙선재 문고라 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말았으니.. 주인을 잃은 공허함만이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첫댓글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