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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우와~
깜빡 조는 사이에 또 하루가 지났구나.
신난다!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다니~
졸업할 날이 다가오고,
제대할 날이 가까워지는구나.
어김없이 연말이다.
죽지 않고 꾸준히 살았더니,
사 死 할 날도 바라다 볼 수 있어서
좋지 아니한가.
생 生이 축복받을 일이라면,
사 死, 또한 축복받아야 할 것을.
장례식장을 배회하는 칠닥이로서는 긴 군대 생활을 비로소 제대한 것만 같다.
타의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었다. 이병계급으로 시작하여 정신없이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자 삭막한 군 軍 생활도 일편으로는 즐기기도 하였다. 병장이 되어서는 제대의 희망이 생기고는 하루하루 더 할수록 끝나기를 바라는 안달 병이 심해져 간다.
칠닥은 자기 자신이 염세적 인간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계속해서 두들겨 맞기만 한 권투선수가 이기든지 지든지 어서 마지막 전 戰이 끝나고 집에 가 다리 뻗고 쉬고 싶다고 해서 그 선수를 무기력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너무나 지쳐서, 승패를 떠나 어서 게임이 끝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운명에 유린당하기를 반백 년, 이제는 꿈이던지, 성공이든지 간에 다 집어 던지고 마냥 쉬고 싶은 게다. 잠자고 싶다는 것이다. 영면 永 면함이 곧 죽음이 아니던가.”
이 말은 칠닥이가 자기 죽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주위 사람에게 해 주고는 하는 말이다. 듣는 이들은 다들 불경스럽다고 핀잔을 주고는 하였다.
칠닥이에게 있어서 운명은 지독스럽기도 하였다.
“실패는 겸손을 가르치고, 성공은 오만을 부르는 법이지.”
오만의 호사도 원치 않지만, 겸손조차도 사양하고 싶다.
짧지 않은 결혼생활을 끝내고자 할 때 어쩌다 이까지 왔는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어렵게 읍내에 유학은 하였지만 넉넉지 못한 사정으로 선배의 하숙집에서 더부살이하며 학업을 이어 가던 중학생 이규태는 그 선배가 하숙비를 제때 내지 못하여 같이 쫓겨나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규태는 찹찹한 심정에 거리로 나왔지만 이내 허기를 느끼고는 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손에 잡히는 돈은 몇 푼 되지가 않았다. 이 처절한 순간에도 배가 고파오는 자신이 미웠던 그는 밥 대신 차라리 술이나 한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배고픔을 해결하지는 못해도 마음 고픈 것은 만져줄 것만 같았다. 식당으로 들어선 이규태는 밥 대신에 단술이라는 것을 한 잔 시켰다.
그러나 주문대로 나온 단술이라는 음식은 밥도 술도 아닌 감주였다, 밥알이 둥둥 뜬 식혜를 한 사발 받은 규태는 절규하듯 뇌까렸다.
“오~오! 운명의 여신이여, 당신은 어찌 이토록 철저하게 나를 농락하시나이까?”
단술은 이 순간에서는 배도 마음도 채워주지 않는 엿 같은 상황을 안겨준 운명의 여신이었다….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 중에서.
얼마를 잤을까?
선뜻한 가위에 눌러 깬 칠닥이는 이미 자신이 북극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 끌려가듯이 힘겹게 걷고 있음에 소스라친다. 얼음장 같은 벼랑에서 서 있기도 힘든 회오리가 몰아치는 속에서도 저 멀리 화려한 궁전이 보였다. 언제 그토록 세상이 험했던가 싶을 정도로 궁전 안은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알 수 없는 곳에서 공회당에 앰프가 울리듯이 기계음 투 여자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들렸다. 잠시 후, 바비인형과 같이 생긴 눈부신 미녀가 뚜앙 나타나서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마구 뱉어낸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무래도 칠닥이에게 고백하는 것이 사랑 이야기인 듯하였다.
“저, 여자가 왜?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할까?”
언제 어떻게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따지기에는 현실에서 너무 다급한 결론을 내려야 할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또 지금이 대체, 어느 땐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였다.
"당신, 나를 사랑할 수 있지? 호 호 호……."
소름이 끼친다.
그녀가 물어 오는 음률은 온화하면서 부드럽고도 느리면서도 감미로운 데도 그 음색은 날이 선 채로 마치 손톱으로 계속해서 유리를 긁는 듯한 몸서리치는 진동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신을 주목해 왔어요…. 당신은 인상이 참, 좋아! 나처럼 차가운 이에게는 따뜻하고 포근한 게 필요해."
지금 칠닥이가 무릎 꿇고 있는 곳은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오래된 궁전 같았는데, 선뜻한 분위기만 느껴질 뿐 여인은 얼른 눈에 띄지 않고 주위의 몇 개의 얼음으로 된 누각만 보일 뿐이다. 심지어 그를 무릎 꿇게 하는 어떤 강력한 압력의 존재조차도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안 되고 그저 묵직한 중력만 가해지고 있다.
칠닥이는 용기를 내어 대답을 강요하는 여인을 쳐다본다. 잠에서 막 깨어나 햇빛을 보듯이 눈이 부셨다. 까만 하이힐, 인상 깊었던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서의 날씬한 두 쪽 코를 나란히 한 그 하이힐이었다. 뾰족한 구두에서 시작되는 고동색의 가는 가죽 띠가 여인의 복사뼈를 감고는 종아리를 휘돌아 앞정강이에 나비 모양의 매듭을 지었다. 여인의 허벅지는 대부분은 가리지 않는 채로 드러났고 유난히 반들거려서 사람이라는 느낌보다는 미술관에 조각 작품과 같이 완만한 유선의 풍만함이 그대로 배여서 저것이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충분히 욕정을 끓게 할 만하였다.
허벅지 그 위로는 검은색 수영복으로 사타구니의 둔부를 감싸고는 있지만, 왠지 유혹하기로 작정한 듯한 연출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칠닥이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거부의 징후도 동시에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어요. 겁주는 건 아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는데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면 그 건, 불행이 연속될 일뿐이지요. 내가 얼음 여왕이기는 하지만 뭐 어때요? 차갑더라도 온정을 나누어 사랑을 베푼다면 서로에게는 좋지 않겠어요. 말 많은 누가 그렸다지요? 조금만 비겁하면, 세상이 편 해진다고……. 호 호 호"
마치 갈라진 뱀의 혓바닥에서 맴돌며 똬리 치는 회유의 말씀이 계속되었다.
칠닥은 상앗빛처럼 푸르무레하면서 얼음보다도 더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정강이나 팔목이라던가, 긴 속눈썹과 진한 마스카라에 감춰진 쭉 찢어진 눈매가 필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무릎에 힘을 가했다. 일단 무릎에 힘을 가하자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이 솟았고 영문도 모르게 그 얼음 궁전을 탈출하게 된다. 탈출은 했으나 앞으로 달려도 뒤로 가는 듯한 안타까움과 금방이라도 누구의 아귀에 잡힐 듯하였다.
뛰는 것인지, 나는 것인지 분간을 알 수 없는 상황의 범벅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또, 그 꿈에서 다시 꿈 깨어나는 긴 꿈의 여행에서 깨어나고,
또, 그 꿈에서 다시 꿈 깨어나는 긴 꿈의 여행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그는 중얼거렸다.
"운명의 여신이었어....“
차가운 것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땡볕에 서 있으면 그늘이 아쉽고 그늘에 서 있으면 서늘한 냉기를 피하고 싶어지고 냉정함은 온화한 것에 기가 죽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에는 차라리 겨울이기를 바라면서도 늦가을 쌀쌀한 기온에 벌써 혹한을 두려워하는 이 완전한 음양이 서로가 상대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지는 것도 우주의 섭리인가.
운명의 여신, 그 싸늘하고 냉정함이 칠닥이의 더운 기운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귀때기가 시퍼런 젊은 시절 꾼 꿈인데, 그 당시의 운명의 여신은 나이 오십의 중늙은이 칠닥이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까??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면 그 건, 불행이 연속될 일뿐이지요. 호 호 호…….)
그런데,
칠닥이는 그 막연한 경험이 꿈이라면 어디서, 생시라면 언제인지,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잉 747이라 하는, 그 거대한 비행기로 제주도를 갔다. 갈 때와는 달리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은 상경하는 비행기는 내내 불안하였다는 것이다.
신문, 반장만 한 창밖으로 비행기 날개가 길게 뻗어 있었고 한참이나 희뿌연 구름이 스치다가는 걷히면 성냥갑이나 콩알만 한 지상의 풍경을 보여 주고는 하였다. 노끈을 늘어놓은 듯 강줄기도 보인다. 현무에 가려져 있을 때와는 달리 지상의 풍경이 펼쳐지기만 하면 비행기는 저 아래쪽의 강이나 계곡으로 곤두박질할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드는 게 웬일일까? 상대적으로 작은 비행기를 타서일까…?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호사는 칠닥이가 신혼여행을 하는 덕분이다. 비행기의 교실만 한 내부는 생경한 화려함이 화장실 가기조차도 실수가 두렵게 했다. 변기가 요상하고 문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을, 뭔가 특별할 것만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가는 비행기가 막상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떠서는 주변에 있어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기서부터는 이렇게 불안하고 안심이 되질 않는다.
며칠간의 제주도 신혼여행은 이 신혼부부의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기에 충분하였다. 예약된 여행코스를 채 다 돌지도 못하고 겨우 예정된 날짜만 채우면서 서로에게 생채기만 냈다. 함께 돌아간다는 것 사실 자체가 신혼 중 이혼의 신문의 가십거리 같은 최악은 면한 셈일 뿐이다.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는 땅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떨칠 수 없었는데 뭉게구름에 묻어 불안하게 진동하던 비행기 날개가 이미 그때, 추락을 예고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결혼생활은 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를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처럼 추락을 결국 하고 만 날은 햇빛이 쨍한 1997년 한여름이었다.
동요를 불러주면서 살림살이를 실은 화물차에 두 아이를 태우고 성남, 청계산 중턱을 넘는다. 서울을 떠나 안산으로 향하면서 아이들은 내내 우울해 있었다.
불과 수 시간 전에 칠닥은 쌍문동 삼익아파트 101동 401호가 있는 복도에서 긴 밧줄로 살림살이를 묶어서는, 건물 뒤편 화단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웃이 눈치 못 채게 할 떳떳이 못 한 이사이다. 내려진 물건을 화물차 탑 안으로 서둘러 싣고는 침대에 자지러진 아이들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소리로 조용히 타일렀다.
"자…. 떠나자…. 이제, 우리끼리 사는 거야!"
제 엄마는 거실 구석에 이불 덮어쓰고 누었고 작은 방에 있을 애들 이모도 기척이 없다. 담담한 딸애와는 달리 아들은 무척 힘들어했다. 겨우 추슬러 경비아저씨와 눈인사를 나누고 경비실을 지나 몇 자국 발걸음을 옮기자 아들 녀석은 아파트 화단에 또 한 번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 가자 아빠."하던 딸애는 그러는 제 오빠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다.
비극이다! 우리 인생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그리고 칠닥이 뇌리에 오랫동안 깊게 박힐 광경이었다.
네 물건 내 물건 하며 하나하나 갈라서 그들의 몫 9년의, 생활 찌꺼기를 실은 화물차에 세 식구는 쌍문동을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청량리로 해서 한강을 넘고 잠실을 거쳐 성남 시내를 지르고, 청계산 중턱을 넘기까지 온갖 만감이 교차하였다. 만감에, 만감. 그것이 되풀이되고는 한다. 옆자리 아이들 작은 두뇌는 또 얼마나 복잡할 건가.
비극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뭔가는 위로나, 격려나 해줘야지 싶으면서도 마땅치가 않아서 목 놓아 소리 높여 부른 것이 동요였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만들어 주신…."
해 질 녘에 안산 수리산 자락의 형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아이들을 맞았고 거동이 원만치 않으신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씀을 하신다.
"하이고 야야~ 니 참, 그동안 고생 마이 해따."
아버지는 그의 결혼생활 9년 동안 한 마디도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짐작은 쭉 하고 계셨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아픈 가슴으로 사는 아들만큼이나 가슴 찢어지는 것일 테다.
"우리 식구 중에 칠닥이가 젤 못 얻어먹고 살 끼다. 딴 식구들이야 철마다 먹고 싶은 건 먹고는 살지만……."
언젠가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칠닥이는 들었다.
“결혼의 실패는 칠닥이가 성인이 되어서 겪는 실수 중에서도 크게 저지른 경우의 하나이지. 신이 정해 준 몇 퍼센트의 인간들……. 그(神)는 일정 부분의 비율로 인간을 몇 부류별로 갈라놓기를 즐기는데, 칠닥이는 극소수 부분인 나락에 있는, 덜 떨어진 부류로 분류하고서는 여즉 풀어주지 않는 거야. 나쁘지…? 늘 절벽 끝까지 몰고 가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즘에 가느다란 노끈을 내려 주고는 하였어. 싸가지 없이 말이야.”
“실패한 일도 큰일 한 셈이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현상이 그 일(실패) 아니겠어?”
미지의 좋은 배우자 만날 수 있음이 운이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아주 운 좋은 몇 프로가 틀림없이 존재하겠지. 반대로 아주 운 나쁜 존재가 또 그만큼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이 관리하는 우주의 섭리일 터이다. 칠닥의 경우에는 후자 쪽인데, 자괴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런 만큼이나 반전의 기대도 있는 것이 그 또한 우주의 섭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악처를 만나야 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악처는 철학자를 만들었다. 칠닥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도 반드시 있는 것이다.
틈은 애초에 일찍 벌어져 있었다.
“옥림이 신랑은 외국인 회사에 다녀. 그 집은 돈이 많으니 신랑 유학비를 친정에서 대 주었고 지금은 봉급이 엄청나.”
신부는 입을 삐죽거리며 지금 이 상태가 매우 못마땅하다는 걸 애써 강조를 했다. 어쩌란 말인가?
“그럼, 그런 것이 부럽나?”
“우리 집도 돈이 많았으면, 나도 그런 남자와 결혼 했을 거야.”
칠닥이는 무척이나 난감하면서 좋지 못한 예감이 사정없이 엄습해 왔다. 이제, 막 결혼하여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에, 새색시의 입에서 뜬금없이 터져 나오는 타령의 그 순간에, 이 여자와는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그런 예감으로 더 이상의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신부는 제주도 여행 첫날밤에 짐을 싸고 말았다. 덩그럽게 혼자 남은 칠닥이는 안주 없는 양주를 큰 잔으로 들이키면서 참으로 낭패다, 싶었다.
결혼식 얼마 전에 걱정하던 주변이 있었다.
“야야, 니 그렇게 센 여자는 그만두는 게 안 날라?”
종국이가 조심스럽게 우려의 일단을 내비칠 때 그때, 그만두었을 것을.
센 여자라기보다는 칠닥이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부족해서임을 알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결혼식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지 않았던가.
“관포 상회 친구 중에 대학 나온 총각 없니 껴?”
칠닥이의 관포상회 거래처인 롯데슈퍼 안주인의 부탁에 칠닥이는 발 벗고 나섰다. 거래처에 호의를 베푼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다. 대학생이 흔하던 시절은 아닐 때였다.
“니, 영남대학 토목과라 했제? 아가씨 함, 만나 보그라! 내 거래처 여동생인데, 어른이 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이데이. 인물도 괘안코.”
칠닥이의 제언에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호기를 부렸다.
“지금, 토목이 중동에서 마구 철수하는 바람에 취직이 쪼매 어려워서 그렇제 영주, 어데서 나를 오라 해서 곧 출근 할 끼다.”
녀석은 자신의 현 처지가 그래도 희망이 있는 백수인 점을 변명으로 늘어놓았다.
그렇게 대학 나온 동창 한 녀석을 장사하는 화물차에 태웠다. 거래처 안주인의 여동생과 선을 뵈러 가는 11월 저녁에 영주로 향하는 국도에는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이대로라면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폭설이다.
영주 시내 번화가의 이 층에 있는 다방으로 녀석을 아가씨에게 소개하였고 다방 구석 저쪽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모르게 주시하고 있었다. 칠닥이는 시간을 끌지 아니하고 자리를 일어서 나오면서 잠복해 있는 그녀의 어머니와도 눈인사를 나누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도로에는 이미 내린 눈이 발목을 묻었고 비척거리는 칠닥이의 심정은 드넓은 눈밭과 같이 찹찹하였다. 눈 덮인 똥 밭이라더니, 대학 나온 총각이라, 대학을……. 자신은 아니었다.
"제기럴!"
그 일 있었던 이후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결혼 조건에서 고집스럽게 일 순위로 포함 시킨 것이 대졸이었던 그녀는 그렇지도 못한 칠닥이와 이렇게 신혼여행을 떠났다. 참으로 못마땅했던 조건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 된 셈이다. 그러나 칠닥이에게는, 제 동창에게 소개했다가는 가로채서는 결혼을 한 셈이 되어 적잖은 죄의식과 부담감이 있었다.
신혼여행 며칠 전에는 여자는 그랬다.
결혼식 전날 버스 대절을 맞추고는 돌아오는 길에서도 여자의 말이다.
“봐요! 우리 이 결혼 없었던 거로 하면 안 되겠어요?”
뒤통수를 내리치는 제안이다. 이미 결혼 사실을 알린, 친인척 보기에 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가. 소개를 주선했던 동창 녀석에게도 면목이 없는 요상스러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칠닥이로서는 인제 와서 성공적인 결혼이 의무같이 느껴졌다. 의무와 같은 결혼식의 일정은 억지로, 억지로 이어졌고, 결국 그날은 왔다.
그날이 없었다면 아이들 태우고 결혼 전으로 돌아가는 고개도 넘을 일이 없었을 것을.
“대체, 사랑이라는 걸 해 볼 겨를이 없었잖아. 평범 이하에서 출발하여 그저 그 평범에 이르기조차가 너무나 버거워서 그냥 그대로 몰락해 버린 경우이지. 가난이 문틈 사이로 스며들면 사랑은 창문 너머로 멀리 달아나 버린다는 불멸의 진리를 끊임없이 숭배하는 데에는 나는 반론할 여력이 없었어.” 가슴 저린 칠닥이의 독백이다.
비록 빌어 살기는 해도 칠닥이네가 쌍문동 삼익아파트에 살 때가 그의 결혼생활 중에 그나마 살림을 갖추고 있던 때다. 나른하고 무료한 일요일 오후, 딸애는 출출 했던가 제 엄마가 집에 없으므로,
"아빠! 달걀프라이 좀 해 주라."
"응, 그래 그럴까?"
팬을 달궈서 기름 두르고 달걀을 깬다. 처음의 비린내가 구수한 맛으로 변해 갔다. 가스레인지 옆에서 입맛을 다시던 녀석이,
"아빠, 한 개 더해! 하나 더……."
달걀프라이 두 개를 어찌나 맛나게 먹는지 칠닥이도 시장기 느끼게 한다. 냉장고에서 두 개를 더 꺼낸다. 하정이는 채 달걀을 다 먹지 않았음에도 화들짝 놀라서 소리친다.
"아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아빠도 프라이 해 먹으려고…."
"안 돼! 안 된단 말야!"
엉엉하고 울어 버린다. 칠닥이는 놀래서,
"아니 녀석이…. 왜 에?"
"아빠까지 먹으면, 달걀이 다 없어지잖아, 엉엉"
"없으면, 또 사면되지?"
"엄마는 안 산단 말이야! 이것 봐! 냉장고에 달걀이 없어졌잖아!"
급기야 냉장고를 확인 한 녀석은 엎디어 칠닥이의 다리를 부여잡고는 입에 가득한 달걀 파편을 튀기며 통곡을 다 하였다. 그제 사, 칠닥는 아이의 당혹스러운 행동에 대한 이유를 짐작하였다. 아이의 어미는 훗날 아파트 한 채의 행복을 위하여 달걀 한 개의 여유를 묶어 두고 있던 것이다. 아이는 어미가 없는 절호의 기회에 눌려 있었던 먹고자 하는 본능을 해소하려던 참이었음이라.
아이 엄마는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깡그리 무시하고 유보하였다.
“괜찮아, 우리 돈으로 산 거 아니잖아? 가지고 들어가.”
“엄마가, 엄마가…….”
아들은 극도로 불안해했다. 할머니 댁에 갔다가 이모로부터 선물 받은 게임기를 받고는 뛰면서 기뻐했다. 이리만지고. 저리 만지고 하다가는 집이 가까워지자 안절부절못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장난감을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그러는 아이의 심정을 아빠는 잘 안다. 어린 애의 당혹감을 지켜보자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 엄마는 가족이 살 만할 때까지 모두가 어떠한 호사도 용납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가지는 것도 모두가 포기해야만 한다. 아파트 한 채에 대한 집착은 무서웠다.
아이들을 구박하는 것은 자격이 부족한 남자의 환경에 대한 보복의 일환이었다.
보복은 악랄했다.
“엉엉 아빠는 왜 국기 봉을 사놔서 부러지지도 않는다 말이야! 엉엉~”
아이들은 뒷머리에서 종아리 끝까지 끔찍할 정도로 멍이 들도록 맞았다. 플라스틱 얇은 삼십 센티 자는 맞다가 부러지면 매가 끝나기도 하는데 피브이시로 된 태극기 봉은 맞아도, 맞아도 부러지지를 않았다. 아이들은 억울하고도 원통해 했다. 피가죽이 되어 안아 줄 수도 없는 아이들을 부여안고 중얼거렸다.
“이 여자하고는 그만 살아야 한다!”
꿈에 나타났던 그 운명의 여신이었다.
그 영화의 대사는 그랬다.
“불행은 제대로 된 짝을 못 만나서 일어난다. 돈도 열등감도 성공도, 거지 같은 부모 밑에서도 제대로 된 짝을 만나면 다 해소되는 것이다.”
이혼하고자 하는 후배가 이혼한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혼하고 나서 벌어지는 엄청난 현상을 모두 감내할 자신이 있다면 이혼하게. 이혼해서 괴로워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이혼하지 않아서 불행한 아이도 있다네. 그리고 이혼은 큰 고통과 무지한 인내를 요구한다는 사실도 명심하고 말이야.”
돈 한 푼 없이 결혼식을 치를 수 있을까?
고물상 마당에 색색 오렌지주스가 120박스가 내려져 있다.
칠닥이는 실성 사이다의 판매사원 정대성이에게 부탁해서 받아 놓은 이 물건을 서울의 덤핑시장에 내다 팔 요량이다. 가격대가 300만 원은 남짓 하는데 그 돈을 만들기 위해서 줄잡아 50만 원은 까져야 한다. 손해 보는 것이다. 결혼 비용은 약 700만 원이 예상되므로 이 짓을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결국 칠백만 원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손해비용이 백만 원인 셈이다. 이자로 치면 고리에, 고리인 셈이다.
“닥치면, 다 해결 된데이~ 그라이 무조건 부딪쳐야 하는 기야!”
먼저 결혼한 익준이는 그렇게 충고를 했다.
“야, 야~ 쪼옴 쉿다 하그라. 여어 막걸리 한잔할래?”
아버지 오 부자가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땀 흘리는 칠닥이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는 무심히 내뱉는 말에 그는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다아~ 이 게 아부지나 나나 팔자이시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를 오 부자는,
“허· 허, 그래 맞다.”
칠닥이는 자신을 염려해 주는 아버지가 야속하기가 그지없다. 어째서 자식, 결혼식에 돈 한 푼 내놓을 처지가 못 되었는지 원망스럽다. 어머니는 금 닷 돈을 주겠노라 하지만 엄청난 결혼 비용에 비한다면, 차라리 받지 않고 받았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가 않은 심정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덤핑을 친 색색이 값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많은 물건을 받아서는 덤핑으로 내다 팔아야 한다. 손해 본 부분이 부풀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주공설운동장에 대성이를 불러서는 아예 화물차를 대절을 해서 쌕쌕이를 옮겨 싣고는 서울로 향했다.
“야아, 니 이거 한 차 싣고 가면 얼마 버노?”
내용도 영문도 모르는 화물차 기사 원경이는 답답한 질문을 해 댄다.
“손해 보니더! 손해.”
"갖다 파는데, 왜 손해 봐?”
700만 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800만 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그 800만을 갚기 위해서는 950만 원어치의 외상을 얻어야 하고 그 950만 원의 외상을 갚기 위해서는 1200만 어치의 쌕쌕은 덤핑 치워야 한다. 한 번만 더 반복하면 처음의 700만 원의 빚을 1,400만으로 갚는 꼴이 되고야 만다.
칠닥이의 결혼생활은 이렇게 처음부터 빛으로 시작되었다.
2005년 장례식장에서는 죽은 오칠닥이 혼백이 되어 주저리주저리 순서도 없고 두서없는 독백을 미친년 경 외우듯이 하고 있다.
한 젊은 사람이 10억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의 사회적 추세가 그랬다. 10억,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소중한 밥을 굶거나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가동치 않는 승용차에서도 찜질을 감수하며 경제적으로는 계속해서 자신을 학대했다. 이른바 성공하기 위한 종잣돈을 만든답시고 절약에 절약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렇게 지독하게 만들어진 10억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이나, 저나 아파트 한 채에 모든 행복을 유보하고 있던 셈이지. 행복을 추구하려 돈을 벌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한 수업을 받겠다는 논리야, 50대 주부가 자녀 유학비로 빚지고 스스로 고층 아파트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이 들리는군. 결국은 돈을 위해서 행복을 포기한다는 거꾸로 사는 현실이지. 세태나 흐름에 희생되지 않는 가치관을 가져야 후손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행복 유보 현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터인데 말이야……”
“자본주의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승자들 속에서조차도 패자를 기어코 가려내려 하는? 내가 보기에는, 승자 독식이라고 하는 그것이 심화 될수록 부자들이 당해야 할 저항에 의한 보복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야. 우리에게는 더블어의 개념을 여지없이 빼앗아서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원동력이지. 결과는 승자 자신들도 삭막함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는 거야.”
"어릴 때 시퍼런 지폐에 낚싯줄을 묶어, 골목 어귀에 숨어서 어문 놈 놀리던 장난질이 있었어. 지나는 행인이 주변의 눈차를 살피며 허리를 숙여 돈을 막 움켜잡으려는 순간에 낚싯줄을 당기지. 10억이 현실이 되는 날, 100억의 꿈을 또다시 꾸기 시작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칠닥이는 운명의 여신의 얼음 궁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러워서 안도의 긴 한숨을 내 쉬었지만, 이내 엄습해 오는 그녀의 보복에 대한 불안감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꼭 건너야 할 징검다리. 그 절박함이라는 것이 건너서 닿지 않으면 허공에 빠지기 때문이다. 절박한 징검다리의 끝이 저승길의 초입이라 할지라도 그 끝에 어서 닿아서 이 질곡의 줄타기를 그만두고 싶다.
“인생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성공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신 神! 그 또한 한계가 있는 존재인데, 세상에는 무진장 재수 좋은 부류가 있다면 그 비율만큼 무진장 재수 없음을 만들어야 하는 게 신의 의무이다. 나는 절박으로 뭉쳐진 징검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서 대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한 섭리를 터득했다. 실패하는 이유는 말이지. 신 神이 만들어 내는,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일상사일 뿐이다.
운명의 여신은 그 후에도 질기게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1988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곧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정국이 되자 국민의 정서는 5공 청문회를 강력히 요구하게 된다.
노태우는 결국 전임 대통령,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전두환은 이를 갈며 복수를 외쳤지만, 그로부터 8년 후인 1996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 12.12와 5.18사건 공판으로 서초동 법정에서 그 두 사람은 나란히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서게 된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고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찹찹한 표정을 중계방송을 통해 칠닥이는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재임 기간 중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는 점까지 아주 유사하다. 법원의 판결로 수천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각각 선고받았다.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던 그들은 다른 점도 꽤 많았다. 그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주변을 맴돌며 굽실거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전두환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고, 노태우의 주변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두환이 주변의 측근들에게 거액의 돈으로 인심 좋게 뿌려댄 반면, 노태우는 상당히 인색했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자기 친동생에게 맡겨 둔 재산을 되찾으려 법정 다툼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동생에게 맡겼던 부정한 재산이 부정한 방법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것을 알고 나눠 가지려고 하기보다는 전부를 돌려받고자 했다.
정권찬탈의 두 주인공이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모습은 달라 보인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민주-공화 3당이 통합을 선언하자 민자당이 탄생했다.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내건 기치는, 88년도 4.26총선으로 형성된 불안정한 정치 구도를 해소하고, 중도민주 세력을 대통합해 남북통일에 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탄생한 여, 야는 이질적 정치 세력 간의 인위적인 연합구도 속에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마산행" 등 차기 당권 및 대권과 관련된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5월 9일 창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김영삼 당시 최고위원과 박철언 정무제1장관 간의 대결 양상은 내각제 합의 각서파문에 따른 김 대표의 당무 거부사태들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3당 통합, 집권당의 내분은 정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3당 통합 당시에, 초선 노무현의원은 정치 야합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다가 이기택의원을 비롯한 여덟 명의 의원이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들은 멀지 않아 김대중을 돕게 되는데,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고배를 마시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이른바 "소통령" 행각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동시에 외환위기까지 불어왔다. 혼란스러운 정가는 김대중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는 계기가 된다. 일부 반대는 있었으나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은 15대 대선에서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고 여당의 이회창을 꺾고는 드디어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다. 사람들은 김대중, 그를 인동초라 불렀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에서 국토해양부 장관을 지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굴곡은 많았다. 노무현은 지역 갈등 해소를 정치 제 일 목표로 삼고 불리한 지역구에 당당히 총선에, 연거푸 출마한다.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부르며 지지자들이 결집하여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고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전무한 형태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다. 그런 노사모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노무현은 김대중의 후임 여당의 16대 대통령 후보로 당당히 지명받게 된다. 결국, 그는 김대중을 이어서 대통령이 되는 극적이고도 감동적인 사실을 실현한다.
20년 전 결혼식장 그때와 같이 순전히 그만을 위하여, 역시 친인척과 다들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인 장례식장에 칠닥이는 다소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잘 차려입은 예복으로 입구로 들어섰다. 넥타이며 양복과 구두며 양말까지 온통 검은색인데 셔츠만큼은 새하얗다. 하객들의 눈길이 쏠리면서 박수가 터졌다.
죽음을 축하해!! 축하해!
장례식 입구에 칠닥이가 우뚝 섰고 그의 아들과 딸이 양옆으로 그리고 형제, 자매가 도열해서 문상객을 맞는다. 친인척을 비롯해서, 죽마고우에서 최근의 직장동료들을 포함해서 형이나 동생의 지인이나 아들딸의 친구도 몇, 몇 찾아와서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칠닥이는 잔잔한 미소를 흘리며 그네들과 가볍게 악수를 건네며 몇 마디의 관심 어린 대화를 나눈다. 그가 하객에게 식장의 자리를 권하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고 장례식 하객들이 저마다 수군대기를 한다.
오늘의 주인공, 오칠닥의 죽음을 진심 어리게 축하하는 덕담을 나누는 것이다.
"칠닥이는 참, 편하게 죽음을 맞았데. 어릴 때, 교회 종각 바로 밑에서 들었던 종소리의 진동처럼, 그냥 딩~ 하고는 어지럽다. 하더니 죽어 있더란 거 아냐? 고통 없이 잘 죽은 거지."
"그러게, 모든 몸에 장기가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잖아? 아까울 거 하나 없는…. 치과 병원비가 비싸서 치아 상한 것을 하나둘 뽑아 버리다 보니 아, 글쎄 어금니가 딸랑 하나 밖에 안 남았는데 그것도 이미 심하게 마모가 되어서 더 살아 있자면 잇몸이 작살날 판이다잖아…. 죽었으니 의치를 해야 할 큰돈은 굳은 거지……. 애그~ 하여간, 돈복은 지지리도 없었어!"
"따지고 보면 어디 돈복만 없었나? 계집 복도 없지, 부모, 형제 덕도 못 봤지. 자식과는 떨어져서 정을 나눌 수가 있었나……. 가재 복이야! 가재 복……."
"쉬~잇~ 주인공이 듣겠다."
예전에 그의 결혼식장 구석에서 수다 떨던 동네 그 아낙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장례식장 구석에서 역시나 소곤대고 있다. 그때는 화려한 한복을 입었던 그녀들이 오늘은 검은 양장의 모습인데 표정만큼은 다름없이 밝았다. 간간이 들리는 말의 중간이나 끄트머리로 그녀들의 대화 내용을 유추해 내기란 죽어서 허공을 떠도는 그에게는 처음 느끼는 또 다른 재미로 다가온다.
“죽음? 참, 신기하네!”
결혼식,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신부가 없는 대신에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들과 딸애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별다른 것은 앞집 여자가 소복 차림으로 마치 칠닥의 아내처럼 행동하였고, 그러는 그녀를 딸애가 적잖게 견제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큰 마루방에 단상이 차려지고 큰 초가 촛대에 꽂힌 채로 양쪽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 당연히 주례는 없고 칠닥이의 영정사진이 이 글을 쓰던 컴퓨터의 모니터 크기로 걸려 있다.
그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죽은 그는 당혹스럽고 황당해진다.
사진을 들여다보자 천연색 영정이 서서히 흑백으로 바뀌면서 칠닥이의 사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아부지요! 아부지가 왜, 여 계시니 껴? 지금은 제, 장례식이라요. 아부지가 지 자리에 계시면 우에 되니 껴?"
아버지는 그저 대답도 표정도 없었다.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부안에서 올라와, 안산의 상록구 수암동, 연립주택 4층 409호 안방에서 유심히 뚫어 보던 벽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사진 그대로였다.
지금의 영정사진의 주인은 오 부자인가? 오칠닥인가?
뫼비우스의 띠.
(좁고 긴 직사각형 종이를 한 번 꼬아서 양쪽 끝을 맞붙여 이루어지는 띠. 바깥 면과 안쪽 면의 구별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독일 수학자 뫼비우스가 창안한 데서 이름이 유래 됐다.)
과거를 회상하던 칠닥이가 허공을 떠돌며 자기 장례식장을 한 바퀴 돌아본다.
“홀!”
“짝.”
“아이, 씨발! 벌써 얼마가 나갔나. 삼치기로 돌릴까?”
장례식장 구석에서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삼치기나 홀짝의 노름을 하는 작자는 황 근섭과 김 우목이다. 칠닥이와는 중학 시절에 노상 학교를 땡땡이치던 교우였다.
황 근섭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감 선생이다. 삼대 외동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대체로 엄하게 키우는 셈이다. 그러나 녀석은 학교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어서 공립중학교에는 낙방하여 일단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나중에 제 아버지가 돈 주고 보결로 입학시킨 경우이다. 우목이 역시 보결로 입학을 하였는데, 이 녀석은 아예 초등학교 때부터 학습이 안 되는 녀석이다. 인삼 방을 경영하는 돈 많은 그의 집안의 극성스러운 우목이 어머니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학교를 파하고 우목이나 근섭이가 사라지고 저녁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디 빈집 구석에서 노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두 집 어머니가 칠닥이를 찾아와서는 그들의 거처를 수소문하고 그랬다. 노름이 심한 두 녀석에게 겨우 중학생인 칠닥이가 면도칼로 손가락을 그어 혈서를 써 주기도 하였다.
황 교감네 최대의 비극은 외동아들 근섭이의 죽음이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목젖이 갈라져서 발음이 부정확하게 옹알, 옹알 하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옹야’ 이었다. 황 교감은 근섭이가 고등학교에 드는 해에 이제는 그 목젖을 수술해 주어야겠다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외로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진단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죽음에 이른다. 당연히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삼대독자를 잃은 온 가족의 슬픔은 더 할 것이 없었다.
우목이는 타고난 바람둥이이었다.
녀석이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시커멓게 큰 자신의 남성 심벌이었다. 기회가 되면 그것을 꺼내 놓고는 뽐내기를 좋아했는데, 그 피는 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다. 김 우목의 아버지 김대규는 늙어 걸음을 억지로 옮길 정도가 되어도 다방 마담을 끼고는 살다가 아들뻘 되는 사람과 시비가 붙기도 하였다. 우목이는 좆만 큰 것이 아니라 머리도 크고 그보다 더 큰 것이 툭하니 불거져 나온 눈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소눈까리(牛目)이다.
저쪽 방은 새근거리는 소리와 부스럭거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왔다.
“엉덩이를 돌려 봐. 이렇게….”
“아프단 말이야.”
칠닥이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우목이는 초저녁부터 여자 둘을 만나기로 했다면서 칠닥이를 불러서 들러리를 세운다. 한 계집은 조그마하니 올막 졸막 피부도 반지르르하게 예쁘장한데, 한 년은 우락부락 드세게 큰 것이 숫제 우람하였다. 더구나 흙탕물에 빠져서는 시커먼 발을 슬리퍼로 질질 끌고 다니는 진상이었다. 그렸거나 어쨌거나 윗방에서는 우목이 녀석이 작업에다 열중인데, 칠닥이도 옆에 누워있는 괴물 같은 여자에게 어떻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칠닥이는 슬그머니 손을 여자의 가슴으로 얹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썅!”
음냐, 음냐. 칠닥이로서는 그저 잠꼬대인 척해야만 했다.
그랬던, 근섭이와 우목이가 칠닥이 장례식장에 찾아와서는 삼치기나 홀짝 노름을 밤을 새우면서 벌이고 있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한다.
안 해서 후회하는 것은 그냥 후회인데, 해서 후회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우목이는 신혼생활 하는 동창의 집에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드나들었다. 가난을 지독히 경멸하는 여자에게 부잣집 아들과 같은 부 富한 외모를 은밀하게 과시하고 그것을 우월한 감정으로 즐겼다.
“하이고 오, 우목씨는 부잣집 큰아들처럼 부옇게 참 잘 생겼데이~ 그치?”
가난이 용서되지 않아서 상대적인 현상조차도 목말라 하는 여자와는 오랫동안 살지는 못 할 거라는 예감은 또 한 번 스쳐 갔다.
“야! 야, 내 같으면 니 마누라는 맘대로 울렸다, 웃겼다 하겠다. 야.”
우목이는 자신감 넘치는 호언으로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사은품으로 칠닥이에게 제공하였다.
몇몇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개동이가 나타났다.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 온 그는 안주머니에서 시퍼런 지폐뭉치를 꺼내며 호기롭게 동생들을 불렀다.
“하이고, 이리 와 보라! 이 돈 좀 가져가거라.”
“오빠야, 나 나 좀 주라 더, 더, 더!”
제일 먼저 금자가 달려들었다. 개동이는 두꺼운 지폐 뭉치를 세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지폐 쏙 빼서는 식구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 준다. 한 사람씩 나누어 줄 때마다 그는 새로 지폐를 세고는 하였다. 가지고 있는 돈이 이만하다는 것을 확실히 시위하는 방법이다.
“하나, 둘, 셋, 너이, 다섯,,,”
“또, 하나, 둘, 셋, 너이….”
금자는 더 달라고 졸랐고 금희와 금미는 무표정하게 돈을 받았고 칠닥이는 주는 돈을 집어 던졌다.
“햐~ 자식이 썽질 하고는….”
오 부자와 봉순이는 돈을 많이 지닌 맏이를 그저 흐뭇하게 바라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저만한 돈이면 지금 세 들어 사는 거지 같은 집을 사도 사겠다.
개동이가 사기도박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읍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안다.
“형아야, 그 오토바이는 머로?”
개동이가 영화에서나 봤던 750cc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온다.
“응, 땄어.”
다음날 개동이는 걸어서 들어왔다.
“오토바이는?”
“잃었어!”
이른 아침에 칠닥이네 부엌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고, 어무이요 개동이 형 좀 찾아 주소! 지가 중동에 해외 파견을 나가는데 그 여비를 그 형한테 몽땅 잃었뿌랬니더~ 으 이~ 그 돈 없으면 중동에 못 나가니더. 좀 찾아 주이소! 엉. 엉.”
“아이고, 총각요. 우리는 갸가 어데 있는지 진짜 모르니더. 참말로 딱하니더 이.”
개동이에게 사기당한 젊은이는 칠닥이의 중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16쪽, 260매.
(현대사- 백담사, 3당 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