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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카작행) 아, 우슈또베 바스또베!


마침내 찾아갔습니다. 원동에서 화물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에 처음 내버려진 고려인들의 일부가 1937년 10월 9일부터 이듬해 4월 10일까지 토굴집을 짓고 살아남은 곳, 그리고 그분들이 묻혀 있는 곳,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2006년에 우슈또베에 들러 구전설화를 채록하였지만, 시간에 쫓겨 미처 들르지 못한 그곳, 알마티에서 350여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그곳을 오늘(08년 7월 17일) 강 목사님이 승용차를 운전해 주어, 강 권사님과 요엘 군과 아들 선범이와 함께 리자 권사님의 통역에 힘입어 다녀왔습니다.
바스또베는 우슈또베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니 언덕이었습니다. 갈대가 우거진 수로 옆의 자동차 길을 달려,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얕은 산 아래로 보였습니다. 완연한 공동묘지가 보였습니다. 차를 더 달려 산 아래 길로 접근해 무덤 사이에 차를 세우고 걸어갔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표석이 눈에 띄어 달려가니, 돌판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조기 정착지이다”. 오른쪽에는 똑같은 내용이 러시아어 돌판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돌판 뒤에 보이는 두 개의 토굴 흔적, 70여 년의 세월 속에, 그리고 개방 독립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가면서 많이 메꾸어졌지만 움푹 패인 그 자리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짐승도 아닌데 땅을 파고 살았다니, 아들 녀석을 데려다 그 앞에서 설명해 주면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른 때는 ‘김치’ 하면서 밝게 찍었지만, 엄숙한 표정 그대로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 내가 만났던 이따냐 할머니가 살고 임로자 할머니가 살으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분들이 여기 살면서 무엇을 보았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면서, 사면팔방의 모습들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저 멀리, 기차에서 내렸을 서쪽도 바라보고, 남쪽, 동쪽, 그리고 산쪽인 북쪽도 올려다 보았습니다. 30여 미터 앞의 갈대 무성한 물길도 찍었습니다. 거기 지금도 지천으로 우거진 갈대(고려말로 ‘깔’)를 꺾어다 토굴집 이엉을 했겠지요.
먼거리에서 토굴자리와 공동묘지 전체를 내려다 보고 올려다 보면서도 찍었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 그때 이곳에 살면서, 언덕 위에 올라가 과연 그 너머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해 올라갔습니다. 아, 망망한 벌판이었습니다. 아득한 벌판을 바라보며, 절해고도와 같은 그곳에서 빠져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살았을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발길을 돌려 우슈또베로 향하는데, 오른쪽으로 벼밭이 보입니다. 그때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일군 논이겠지요. 큰 냇물이 옆에 있었습니다. 물이 흔한 곳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고려인들은 돌밭에 앉혀 놔도 살아남는다’는 말을 카작인들이 한다고, 고려인 2세 리자 권사님이 말해줍니다. 밀밭도 보입니다. 고려인들을 부렸을 기차길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역도 아닌 곳에 버리고 나서, 다시 자동차로 이곳까지 실어 날랐다지요. 선로에 서서 바스또베를 바라보니 마침 그곳만 구름에 가려져 검은 색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한이 맺혀서 그런 것만 같습니다.
우슈또베를 빠져나오는데, 카작 청년(아저씨?) 하나가 양무리를 몰고 지나갑니다. 1937년 당시 우리 고려인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카작인의 후손이겠지요. 자기네도 어려우면서도 뜨거운 물도 주고 빵도 주어 죽지 않게 돌봐준 그 천사같은 민족의 후손이겠지요. 다시 바라보니 여전히 저 멀리로 바스또베(머리 산)가 검은 빛을 띈 채 슬프게 누워있습니다.